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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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본인은 혜경궁 홍씨의 집안에 외가도 송시열후손인 은진 송씨였으며 첫처가도 세도가였던 여흥 민씨였다.
홍명희(洪命憙) | |
이명 | 호 벽초(碧初), 필명 가인(假人)/가인(可人)/백옥석(白玉石) |
출생 | 1888년 5월 23일 충청북도 괴산군 군내면 동부리 |
사망 | 1968년 3월 5일 노환으로 북괴에서 사망 |
본관 | 풍산 홍씨 |
직업 | 소설가였는데 정치질한다고 명성 버림ㅅㄱ |
국적 | 대한제국, 일본제국, 북괴 |
경력 | 소설 임꺽정의 작가, 북괴 부수상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 내각 부수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과학원장, 최고인민화의상임위원회부위원장 |
가족 | 아들 홍기문, 홍기무, 홍기하 딸 홍영숙, 홍주경, 홍무경, 홍계경, 사돈 정인보, (잠깐이지만) 혹부리우스[1], 장인어른 김소월 |
개요[편집]
일제강점기의 유명 문학가이자 북괴의 개새끼.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조선 3대천재로 유명했으며 상당히 친한 랄부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악질 친일파가 된 랄부친구와 달리 이쪽은 스케일 크게 월북을 해서 혹부리똥꼬빨다가 뒈짖했으니 셋다 개새끼가 되었다.
정치인으로서 기본미덕인 정치력, 카리스마같은건 좆도 없었는데 정치에 뛰어들어 안먹을 수 있던 욕을 푸짐하게 드시는 사람으로 통한다. 근데 대한민국에서 그의 기록을 갈아버리고 진보진여에서 월북은 했지만... 갓 소설가임해서 그의 행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잘 없다고 한다.
해방이전[편집]
할배 홍승목이 중추원 참의를 지내다 경술국치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주는 작위를 받고 애비는 금산군수로 있었을 정도로 잘나가는 집안 출신이었다. 첫부인 민씨는 그 유명한 여흥 민씨소생의 아가씨였다고 한다.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중경의숙에서 학문을 배웠다가 1906년 일본 다이세이중학에서 수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경술국치때 아빠가 자살한 소식을 듣고 쇼크를 먹고 1911년 일본 문예지 '문장세계'에 단편소설 '유서'를 올림으로써 문학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자살을 알리는 편지를 받은 화자가 이 같은 내용을 번복한 편지를 받고 장난으로 여겨 답장을 보낸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훗날 일본 근대문학에서 오지고 지리는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후 3.1 운동에 참여하고 상하이에 가서 랄부친구 이광수와 조소앙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트리오가 궁핍한 생활을 한 탓에 에엑따 시발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항일운동을 하면서 동아일보편집국장, 오산학교 교장, 신간회간부로 임했다. 아들 홍기문의 증언에 따르면 신간회가 창설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한다며 원서를 읽고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고한다. 1928년 11월 21일부터 그의 인생작인 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으며 1930년대에는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을 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에 발표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작 임꺽정은 작가 본인의 투옥, 개인사정때문에 연재가 4차례 중단되었다가 1940년 4번째 연재중단에 좆본의 고문을 받고 고향에서 조용히 백수로 지내다 잠깐 조선언론보국회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해방이후[편집]
1945년 빨갱이 문학인들의 거두로 활동했으며 신탁통치 오보사건당시 반탁을 했지만 빨갱이들 대다수가 찬탁으로 입장을 바꾸자 어음... 시발 하면서 찬탁으로 바꿨다고 한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누군가에게 007빵당한뒤 근로인민당의 머튽이 되었다. 하지만 소설가, 문학인으로서 실력은 있어도 정치가로서의 카리스마, 정치력은 좆도 없었기에 뭐 되는게 없었다. 결국 김구가 남북협상을 할 때 같이 올라갔다가 쏘오련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월북을 했다.
월북한 뒤 아주 잘나가면서 6.25 전쟁당시 친구였던 정인보를 조용히 납북시켰고[2] 전처와 사별한 김일성이 그의 딸 홍영숙과 결혼해 혹부리우스와 잠깐 사돈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 하지만 홍영숙이 너무 일찍 죽었고 홍명희가 조용히 살았기 때문에 혹부리도 자기 기억에서 홍영숙을 지운듯? 그리고 이때 자기 친구인 이광수가 폐결핵으로 골골대자 강계에 있던 군병원으로 이송시키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이광수는 병원에 도착하기전에 폐결핵으로 죽었다고 한다.
월북자였다보니 남로당파쪽에서 활동했는데 전쟁말기 ~ 전쟁직후에 남로당파의 핵심이었던 박헌영(투옥), 리승엽(벌집핏자), 빨치산(국군에게 던져버림)이 혹부리에 의해 개작살이 나는 것을 보고 지린탓인지 전쟁이후 아닥하고 혹부리 똥꼬만 착실하게 빨다가 자연사했다.
사후[편집]
해방이후 홍명희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미완으로 놔두는게 좋겠다면서 일제에 의해 연재가 중단된 부분에서 연재를 그냥 끝내버렸다. 그리고 사후 북괴에선 임꺽정이 드라마, 영화화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영화 임꺽정의 주제가가 시발 ㅋㅋㅋ 고난의 행군이후 북괴의 현실을 비꼬기 위해 민중가요로 불리다보니 지금은 테이프와 음반이 강제수거되고 있는 중.
장남 홍기문은 북괴에서 사회과학원 부원장으로 있으면서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하고 향가를 연구하는 과학자로 있다가 1992년 사망했고 손자 홍석형은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으로 있다가 뽀그리우스에 의해 숙청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