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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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노래이다.
현재 출근이후 귀가시간이 드럽게 늦어지던 애인을 기다리는 노래인 '정읍사'를 제외하면 고구려와 백제의 노래는 전해지지 않는다. 비록 고구려, 백제의 노래가 신라의 통일이후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삼국의 노래는 의외로 조선시대 세종대왕치세에도 껍데기 자체는 남아있었고 예조에서 이에 대해 논한기록도 존재했다. 임진왜란때 궁궐문서가 없어지면서 그나마 남은 고구려, 백제의 노래가 없었진 것으로 보인다. [1]
고려 시대에 나온 노래 중 몇개도 향가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신라시대에 나온게 아니더라도, 노래의 모든 부분이 신라 향가의 양식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라고.
향가는 불교와 매우 관련이 깊고, 불교를 찬양하는 성격의 노래가 많다고 해석되어지지만
신라의 고유 사상인 풍월도와 전래되어진 불교가 합쳐진 것이 신라의 특이한 불교, 즉, 호국불교인 것을 감안하면 정말로 향가의 내용이 오로지 불교에 대한 찬양인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특히 향가 작가인 낭승(郞僧)이 화랑의 소속이었던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심지어 기록에는 자기가 향가는 지을줄 알아도 범패는 못한다고 자진 시인하는 낭승도 있었다. 스님인데 불교의 노래를 할 줄 모른다니.
향가의 형식은 고등학교때 배우기를 4구체, 8구체, 10구체(사뇌가)의 형식이라고 하며, 또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다.
4구체에서 10구체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8구체는 그 과도기의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
사실 각 4,8,10이 탄생하던 시기는 완전히 뒤죽박죽인데다 순차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4구체가 10구체로 진화한다는건 확신할 수 없는 이야기다.
여느 학자들은 8구체는 사실 존재하지 않으며 향가는 오로지 4구체와 10구체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인즉슨, 8구체 향가는 4구체 향가 2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막무가내의 소리는 아니고 8구체를 분리시키는 기준은 상당히 합리적이다.
또다른 의견은, 기록자가 10구체 시가의 기록을 남기던 상태에서 몇 군데를 누락시켰을 수도 있다고 한다. 8구체는 몇개 되지 않으므로 방금까지 제시된 의견들을 모두 수용한다면, 사실상 8구체는 원래부터 없었던 형식으로 보여지게 된다.
향가의 작가는 실존했는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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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난 남간이 싫으므로.
학계에서는 향가의 작자가 실존했는가 혹은 허구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그 이유는 향가에 관련된 자료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이 주로 의존했던 자료는 우리가 흔히 아는 일연의 삼국유사였다.
그런데 향가의 작가라고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이 꽤 이상하다.
일단 폰으로 적기 때문에 한자를 많이 쓰지 못함을 양해바라고, 계속 적자면, 천수대비가의 작가인 희명(希明)은 이름만 딱 봐도 빛을 바라는 여성이다.
어린 자식이 실명한 상태였는데, 부디 눈을 뜨게 해달라고 자비를 바라는 것이 천수대비가의 주 내용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희명씨는 원래 부모가 지어주신 이름이 희명 맞으신가여? 왜 노래의 내용과 작가의 이름의 연관성이 이렇게 깊은거죠?
희명만 있는게 아니다. 안민가의 충담사는 忠談이 이름이다. 충성스러운 말이란 건데, 안민가의 내용은 공교롭게도 왕에게 백성을 잘 다스리라고 충언을 하는 것이다.
융천사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들의 이름이 향가의 내용과 너무 비슷하다. 충분히 허구일 가능성은 있다.
일연이 작가의 이름을 임의로 창작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 향가의 작가들은 전부 허구인가? 이것도 사실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만이 아니라 향가 작가가 나오는 자료는 또 있다. 그 자료와 새로운 참고자료인 화랑세기를 비교해보면, 향가의 작가가 어느정도 실존 인물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간은 화랑세기 필사본 위작일듯 ㅇㅇ 라고 하는데 화랑세기는 개인이 장난을 쳐놓기엔 이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다. 인위적인 거짓을 가해놓을 가능성은 남간 말 만큼 크지 않다는 얘기다.
만일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 궁내성 얘길 근거로 쓴다면 더더욱 주장을 굽힐 이유가 없다. 공개 목록에 굳이 화랑세기가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끼앙!
고로 너는 학계에서 bb인정합니다 하는 이론이 나오기 전까지 믿고 싶은걸 믿으면 된다.
향가의 작가는 실존인물일 수도 있고, 허구일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ㄴ화랑세기는 위작임에 분명한 게 향가연구가인 김완진이 화랑세기에 수록된 향가를 해석해봤는데 기존 향가와 달리 그동안 나온 향가해석법에 맞춰 해석하면 술술 해석된다는 점에서 암만봐도 박창화가 기존 향가 연구를 참조하여 창작해냈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냐면 향가라는게 시대차이도 제법 나기 때문이고 향찰 기록에 통일된 기준도 없기 때문에 향가해석은 향가마다 달리 해석자가 자기의 추론과 판단으로 변형해서 적용해야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의 향가는 그런 변형 적용이 없이 해석된다는 점에서 의심스러운게 당연하다.
물론 환단고기 따위에 수록된 향가에 비하면 매우 차원이 높기 때문에 이유립보다 박창화의 역량이 더 위라는 걸 알 수 있다.
ㄴ 맞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도 꽤 오래전 논문만 읽고 주장을 편 점에 대해서 반성을 하도록 하겠다.
미안하다~~!! 남간놈드라아아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있는건, 화랑세기 필사본의 송랑가의 향찰표기는 개인이 조작하기 힘든 수준이라는 것이다. 필사 당시에 1960년대 수준의 고전문법 지식을 특정 개인이 습득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의문이 남을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완전히 개인의 상상만으로 창작해내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양주동 선생의 조선고가연구도 1942년에야 나왔다.
그럼 양주동 선생의 연구를 응용한 것인가 하고 보아도 향찰 해독의 차이가 한 두 군데도 아니고 엄연히 몇 군데에 존재하고 있다.
ㄴ 향가는 양주동 선생 이전에 일본 학자 오구라 신페이가 먼저 연구하기도 했고 박창화는 해방 이후에도 60년대까지 활동했으므로 이런 연구를 종합했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이 양반이 뭔가 그럴듯한 역사소설 만드는데 능한 사람이기도 했고.
아직도 완벽하게 위서라고 판명나지도 않은게 참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위서일 가능성이 높은건 인정한다. 그렇다면 사료적 가치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려움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위서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ㅜㅜ
환단고기 따위야 차원이 다르니 환단고기 얘기는 넣어두고.
그렇기는 하지만 화랑세기에 의존하지 않고도 향가 작가의 실존인물설을 주장할 만한 주장이 아예 없어지지는 않는다.
최소한 삼국유사만 참고한다 쳐도 모죽지랑가의 작가와 같이 차자명으로 된 실존인물이 혼재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가요에 부수된 산문기록의 다수가 역사의 설화화로 보여지는 이상, 향가의 작가층이 허구로만 구성된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국카스탠 노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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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vjm46tGaUKk
국카스텐 노래,몇집인지 모르겠고 귀찮다. 그냥 니들이 알아서 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