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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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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 시대는 한국사 교과서 기준으로 초기국가 파트에서 다루는 그 기간이다.

개요[편집]

위만조선의 우거왕이 한무제한테 깝치다가 1년만에 gg 치고 망한다.(왕검성 함락)

그리고 한나라는 야 씬난다~ 한 4군 설치해서 지배해야징 히힛~하면서 내려온건 좋았는데 짱깨가 재수없었던 토착인들이 개극딜을 시전했다.

한나라 정부도 ㅄ은 아니기 때문에 8조개에 불과했던 법을 60개조로 늘린다. 고로 세상이 매우 흉흉해 졌다. 사실 세상이 흉흉해졌다기 보다는, 법체계가 좀더 정교화 될만큼 인구가 늘었다고 보는편이 더 옳지 않나 싶다.

그리고 한나라도 독립 세력을 지근지근 밟는다.

이때 위만조선 멸망으로 발생한 유이민이 지역으로 이주함에 따라서 본격적인 삼한시대가 열렸다.

아직 삼국이 고대국가(중앙집권 국가)로 진입하지 못하고 연맹왕국 단계에서 헤매던 기간이다.

솔직히 이 시기 중국 입장에선 오랑캐로 보였으며, 로마인들이 게르만족 보듯 했을 것이다.

특징[편집]

왕권은 미약하고 부족장 세력이 강하다. 날씨가 가물어도 왕 탓이니 왕을 몰아내고 새 왕을 뽑았다. (부여의 경우)

여기서 왕의 제사장적인 성격과, 더불어 존나 약한 왕권을 유추할 수 있다.

이 때 당시 왕실은 돌아가며 하거나 부족장 세력의 대표정도에 불과했다. 중앙에서 관리들을 파견하지 못하고 지방자치를 했었다.

대신 전쟁나면 부족장들이 자비로 말과 무기를 장만해 싸우러 나가야만 했다. 평민들은 주로 보급임무에 종사했지 싸우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 르네상스 시대 지배층이 시민군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봤는데, 이유는 피지배층에게 무기를 쥐어줬다가는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


수저놀음의 시초인 신분제는 이미 갖추어 있어서 지배계급은 부족 대표인 왕, 싸우는 사람인 부족장 세력, 피지배 계급으로는 생산자인 평민들 그리고 부채나 전쟁 포로, 죄수 가족 출신인 노비가 있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 나라들[편집]

그냥 마을 촌장이나 동네 통장반급 어르신들이 한 나라의 왕이라고 자처하던 안습한 시대였다.

제천행사는 추석의 유래가 되었다는데 암기할때 팁은 부여의 영고 혼자 12월이고 나머진 추수가 끝나는 10월이다.

단 삼한의 경우 5월에 한번 더 놀았다. 씨뿌리고 나서 수릿날을 한번 더지냈다. 이것은 단오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부여[편집]

고조선 다음으로 오래된 왕국이지만 고조선 못지 않게 기록이 없다.[1] 기원전 5세기 부터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형사취수제와 12월 영고의 풍습으로 보아 수렵이나 유목민족의 습속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성곽과 궁전 감옥을 보유했다고 한다.

우가, 저가, 마가, 구가라는 왕을 뽑을 수 있는 선제후 세력인 4가加가 있었고, 이 가들은 사출도를 다스렸다. 이 사출도와 더불어 왕이 다스리는 지역을 합쳐 중앙 5부라고 불렀다.

왕권이 약하던 시기로, 애초에 선제후들이 왕을 뽑은대다가, 흉년이 들면 왕의 모가지를 따버렸다. 여기서 왕의 제사장적인 성격 역시도 유추 가능하다.

말, 주옥, 모피를 생산했다.

1책 12법[2]과 우제점법[3]으로 유명하고 역법으로 은력(은나라의 달력)을 썼다. 순장후장의 풍습이 있었고 죽은 사람에게 옥갑을 넣어주었다고 전한다.

계급은 왕과, 그 밑의 가. 그리고 그 밑에 부유층인 호가 있었으며 그 밑에 하호라는 피지배층과 노비가 있었다.

법체계는 고조선의 8조법과 유사했다고한다.

기원후 3세기 경에 선비족에게 개털리고 반쯤 망했다가 고구려한테 기원후 6세기 초쯤에 합병당해 완전히 망했다.

기록은 별로 없지만, 이후 삼국시대의 2개 국가인 고구려와 백제가 스스로를 부여의 계통이라고 자처했던 만큼, 한국사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언어학적으로 고립어한국어의 원본이 되는 말을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언어적 계통 상으로 고구려, 백제를 거쳐 일본어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일본제어한국어를 묶어서 부여어족이라는 어족을 주장하기도 한다.

고구려[편집]

부여계가 남하해서 졸본에 도읍을 정하였다. 산지가 많고 땅이 척박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래서 성정이 사납다고 짱개들이 삼국지 위지 동의전에서 뒷담을 까고 있다.

부동산 재벌 라이즈라고 보면 된다.

반면 한나라와 좇목중이던 부여는 좋게 평가하였다. 국동대혈에서 일년에 한번씩 제사지내고 놀았다. 그것이 제천행사인 동맹이다.

특산물로 맥궁이라는 활을 생산했다.

정치체제나 풍습이 부여와 유사했다. 당연하다. 이시기엔 고구려를 졸본부여라 불렀을 정도였으니. 사실 부여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세운나라이기도 하고.

감옥이 없어서 부족회의에서 석방 아님 사형 둘중 하나만을 결정했다고 한다. 부경이라는 약탈물 창고를 보유했다.맥궁을 생산했고 옥저나 동예를 조공 셔틀로 삼아 빨아먹었다.

서옥제라고 데릴 사위제를 하였다. 사위가 장인에게 첫 아이를 볼때까지 노예노동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갓구려의 후손들은 여자가 취집을 갔지만 갓구려는 반대였던 거다! 거기디가 혼수따윈 안해갔다. 딸 팔아먹는 파렴치한 짓이라고 존나게 그켬했다고 한다.이는 옥저와 다른점이다.

한사군과 옥저나 동예를 처묵처묵 하면서 훗날 중집국가까지 발전해 신라, 백제와 함께 삼국시대의 주역이 된다,

아까 어떤놈이 중국과 공유랬는데 구라까지 말자.

삼한[편집]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여러 군장국가들과 연맹왕국의 집합체다. 대체로 철이나 쌀을 생산해 먹고살기는 좋았다고 한다.

정교 분리의 사회로 천군이 지배하는 소도라는 신성지역이 치외법권이었다.

신지,견지/읍차,부례로 족장에도 격이 있었다.

제천행사는 5월 수릿날, 10월 계절제로 1년에 두 번했다.

무덤은 독무덤이나 주구움무덤(주구토광묘)[4], 널무덤(목관묘), 덧널무덤(목곽묘)이다.

마한[편집]

삼한중 하나이다. 54개의 소국 10만호 규모로 추정되며 주로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 분포했다. 마한 목지국 왕이 마한왕을 자처하는 짱이었다. 왕명은 진왕으로 불린다. 하지만 3세기 경부터 차근차근 백제에 통합당했다.

백제[편집]

이때는 마한의 소국 중 하나였다. 부여계 집단들이 남하해 송파구 일대에 자리잡아 세워졌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는 부여계 문화의 영향이 미미한 편이다.

최상의 위치선정으로 가장 빨리 중집국가에 도달했다. 목지국과 마한의 짱자리를 놓고 대결을 펼쳐 승리한다. 낙랑인지 한사군도 한번 찔러보기도 했다.

서울에 일찍부터 하수도를 갖추고 중원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삼국중 가장 먼저 차를 마시며 ㅂㅅ같은 고구려 새끼들 찐따 신라놈들이라며 까대며 문화생활을 영위했다.

진한[편집]

삼한 중 하나이다. 12개 소국 5만호 규모로 추정되며 주로 경북 위주로 있던 국가였고, 이 진한의 소국 중 하나였던 신라가 진한 지역을 모두 통합한다.

신라[편집]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상북도 경주 근처에 고조선 유민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육촌장이 박혁거세를 추대해 사로국이란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이 기록은 고고학적으로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 기원전 2세기~기원전 1세기에 한반도 서북지방의 청동기 문화가 유입되었음이 밝혀지면서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2015년 유럽의 인류고고학 학자들과 국내 연구진들이 합동 조사연구한 결과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여 한반도로 이주한 스키타이 세력이라고 결론내렸다. 국립경주박물관의 황금보검과 각종 금관, 세공품 양식들이 스키타이유물과 일치한다고 발표함.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참조)

박혁거세의 신화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육촌장이 사로국이란 나라를 세웠는데 영문을 알 수 없는 알을 왕으로 추대했다는대서 이런 정황이 포착된다.

스키타이니 흉노니 고고학으로 반박된 지 오래되었다. 오히려 토착계 유물도 많이 나와서 현재는 고구려의 영향이거나 교류의 흔적으로 보는 중. 신라의 금세공품의 편년은 아무리 빨라봐야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 정도이다. 그전에는 옥만 장신구로 썼다.

실제로 신라 초기에 왕자리를 돌려먹었던, 석씨[5]와 김씨[6] 역시도 토착인들이 아닌 멀리서 온 도래인으로 묘사된 대서 근거가 강화된다.

어쨋건 이 시기에 박석김 세 성이 왕을 교대로 해먹었고 대족장이나 대제사장 정도로 취급당하며 안습의 나날을 보냈다. 장자세습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서 왕위를 삼촌이나 사위가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잦았다.

병신들이 이 시기 신라를 단순히 왜에 털리던 약소국으로만 알고 있는데, 탈해 이사금 시절부터 지금의 울산 지역인 우시산국과 부산 지역인 거칠산국을 합병하는 등 정복전쟁도 활발히 하는, 진변한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침 좀 뱉던 국가였다. 괜히 안라국이 포상팔국한테 털리니까 신라에게 도와달라고 한 게 아니다.

변한[편집]

삼한 중 하나이다. 12개 소국 5만호 규모로 추정되며 김해 마산지역에 주로 분포했고, 소국 중 하나였던 가야가 주도권을 가지면서 가야에 흡수되었다. 철이 주 생산품으로 여러지역, 특히 왜와 교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변한 지역의 철은 당시 국제 무역에서 기축통화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저, 동예[편집]

군장국가 단계에서 기원후 3세기경 태조왕때 고구려한테 합병당했다. 안습 ㅠㅠ

둘다 북한 동해안 지방에 있었던 나라로 강원도 북부에서 함경도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랑 같은 예맥족이라서 기록했던 짱개들이 구분을 못했던듯.

옥저[편집]

곡물과 어염을 생산했고 고구려에게 바쳤다. 초기부터 고구려 빵셔틀 노릇이나 하다가 결국 고구려에게 복속당했다.

어린 여자아이를 시집보내는 민며느리제로 유명하다. 이 페도놈들.

결혼할때 신부집에서 신랑으로부터 지참금을 받는다.

이 전통은 오늘날 헬센에 결혼할때 남자가 100중 80 해가는(혹은 집을 해가는) 문화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신 머한시대에는 조혼풍습이 기피되면서 신부의 나이가 올라갔을 뿐이다.

가족묘에 장사지냈고 세골장이라는 장례 풍습을 지녔다고 한다.

동예[편집]

양잠,단궁, 과하마, 반어피를 생산했고 고구려에게 바쳤다.

제천행사는 무천이다. 이것도 10월.

특히 방직 기술이 발달했다.

다른 부족의 영역에 함부로 침범하는 것을 금했으며 침범할 경우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했는데 이것을 책화라고 한다.

책화와 족외혼의 풍습은 신석기 씨족사회의 유풍이다.

이견[편집]

원삼국 시대 그딴거없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당장 한국사 교과서만 펼쳐도 그런말은 없고 걍 초기국가라고 말하고 있다.

  1. 사실 삼국시대 이전에는 기록이 대부분 부실하다.
  2. 1을 훔쳤다가 걸리면 12로 갚는 법
  3. 전쟁 터지면 소 잡아서 소 발굽으로 점 치던 것
  4. 매장주체부와 분구를 만들고 그 주변에 주구(周溝: 도랑)를 두른 무덤 양식. 마한 지역에서 많이 쓰였다.
  5. 석탈해가 시조
  6. 김알지가 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