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십이호신
조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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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편집]
오나라 강동 손씨 휘하의 열두 명의 범 같은 장수들을 묶어 부르는 명칭. 동오십이호신(東吳十二虎臣), 혹은 강표지호신(江表之虎臣)으로도 부른다. 조위의 오자양장 및 촉한의 오호대장군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정사 삼국지 저자 진수는 이 12명에게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이라는 열전명을 붙이고 한권에 함께 담아 편찬했다. 동오십이호신은 손씨 휘하에서 오랜 기간 충성스럽게 봉직한 가신들이 많다. 실제로 진수도 "이 장수들은 모두 강표지호신(江表之虎臣, 강동의 용맹한 신하)로서 손씨에게 두터운 대우를 받았다."라고 평해서 강동십이호신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강동십이호신을 십이지장이라고 칭하는데 무슨 내장이름도 아니고. 정사 평가나 알려진 대로 쓴다.
다른 놈들은 딱딱 조조 휘하 다섯놈, 유비 휘하 다섯놈으로 딱 구분되는데 손씨네는 손견대부터 손호대까지 일하던 놈들을 죄다 총괄한 개념이라 머릿숫자가 되게 많다. 연대도 황건적 토벌때부터 손오 망하기 직전까지 100년 동안의 연도를 동안 유명한 놈들 그대로 때려 박았다. 실제로 앞의 세놈은 손견대 출신, 그 다음 네놈은 손책대 출신 그 다음 네놈은 손권대 출신, 마지막 정봉은 주로 손권 사후 손량부터 손호 시절까지 일했다.
왜 인지는 모르겠는데 인성이 별로인 애들이 좀 있다. 반장이나 감녕같이...특히 12명 중에서 감녕 이 인간은 솔직히 손오의 충신으로 보기가 뭣하다. 근데 정작 이 12명 가운데 가장 인지도가 높은 놈이 감녕이라는게 유머긴 하다. 이 열전에 태사자는 없는데 태사자는 손씨의 장수라기보단 독립군벌이나 제후에 가까워서 유요와 사섭과 같은 전에 있다.
손견때부터 봉직[편집]
이른바 손견 사천왕이라고 불리는 장수들, 근데 정작 손견의 목숨을 살린 조무는 없다. 넘 일찍 퇴장해서 그런가...정사에선 죽지도 않았는데 기록도 거의 없고 열전도 없다. 나관중이 이걸 안타깝게 여겼는지 연의에선 조무를 손견의 충신으로 멋지게 퇴장시켜 줌.
정보 자 덕모. 손견대부터 봉직한 가신, 손책이 독립하기 위해 원술로부터 군사를 얻어 가는 길에 손책군은 조랑의 공격을 받는다. 이때 정보는 기병 1명과 같이 손책을 가리고 막으며, 말을 몰아 내달리고 빨리 부르면서, 창으로 적들을 돌파하여, 적들이 분산되어 손책은 탈출할 수 있었으나 결국 병사는 모두 잃어 손책은 원술로부터 아버지 손견의 잔여 병력 1천을 얻게 된다. 손책이 강동을 정벌하는 때에도 정보는 여러 공을 세웠다. 손책이 죽고 손권이 뒤를 잇자 정보는 여범, 주유와 함께 지휘관으로 임명되고 장소와 함께 3군을 돌아다니며 손권에 불복하는 자들을 토벌한다. 주유와 함께 좌우독이 되어 각각 1만 명 합계 3만명에다 유비군을 합쳐서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당시 주유와의 사이는 안 좋았다. 남군에서의 전투에도 참가하여 조인을 패주시키는 데도 공을 세우고 주유 사후 남군태수가 되지만 유비와의 형주 분할로 다시 강하태수로 옮겨져 탕구장군으로 승진 후 사망한다. 오서에 따르면 그가 강하태수 겸 탕구장군을 지낼 때 반란군 수백 명을 죽여 모두 불에 던지게 한 적이 있었는데,이후 열병을 앓다가 100여 일 후에 죽었다고 한다.
황개 자 공복. 어렸을 때부터 고아가 되어, 책을 공부하고 병법를 강독했다. 손견을 따라 남의 도적들을 격파하고 북에서는 동탁을 격파하는 등 공을 세우니 별부사마로 배수된다. 손견이 죽은 후, 황개는 손책을 수행하며 태사자와 만날 때도 수행하였으며 무봉 교위로 있을 때는 황조를 공격하는데 참가한다. 후에 손책이 죽고 손권이 뒤를 이은 다음에는 손권을 수행하면서 몸에 갑옷을 입고 전진하였으며, 위험한 지역까지 가서 성을 공략했다. 이후 산월족으로부터 지켜 다스려 그들을 귀부케 했다. 적벽대전에서는 주유의 부장으로 참전하는데 오나라 수군이 조조의 군대를 상대로 한차례 승리를 거둔 뒤 황개는 주유에게 화계를 사용할 것을 건의한다. 이 말에만 따르면 적벽대전의 화계의 공은 오로지 황개의 공! 이후 황개는 전투 중에 화살에 맞아 차가운 물속에 추락해 오나라 병사들이 일단 구해주기는 했는데 구한 사람이 황개인지 몰라 그냥 측간에 던져두고 온다(…). 물에 빠져 죽을 위기는 넘겼으나 이제 화살에 맞은 상처 등으로 인해 화장실에서 똥냄새나 맡으며 죽을 안습의 상황. 황개는 죽기 전에 마지막 힘을 짜내어 한당을 부른다. 운 좋게도 한당이 이를 듣고 "이는 공복의 소리다."라고 하며 그에게 향해 가서 눈물을 흘리며, 그의 옷을 풀어 바꿔 입으니, 겨우겨우 살아나게 된다. 이후 무릉만의 반란을 무찌르고 태수가 되었으며 관직에 있다 병으로 죽었다.
한당 자 의공. 요서 사람으로 오나라 인물들 중 찾아보기 힘든 최북방 출신이다. 황개, 정보처럼 손가 3대를 받든 오의 숙장으로 셋 중 가장 오래 살았다.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숙하고, 힘이 세어 손견에게 총애를 받았고, 정벌에 따라 두루 돌아다녔으며, 수차례 위험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적을 무너뜨리고 사로잡아 별부사마가 되었다. 손책이 동으로 장강을 건너 3군을 토벌하는데 따라가니, 선등교위로 승진하여 병사 2천 명과 기병 50필을 받았다. 유훈을 정벌하는데 따라가 황조를 격파하고, 돌아와 번양을 토벌하며, 낙안현장을 맡으니, 산월족들이 두려워 하며 복속하였다. 후에 중랑장으로 주유 등과 함께 조조를 막아 격파했다. 이후 여몽과 함께 관우 뒤치기에 참가해, 편장군으로 승진하고, 영창태수가 되었다. 이릉대전 의도의 전역 때에는 육손, 주연 등과 함께 촉을 공격했다. 이후 조비의 남정때 조진을 막아냈으며 223년, 석성후에 봉해지고, 소무장군으로 승진하며, 관군태수를 맡고, 나중에 또 도독의 칭호가 더해졌다. 죽음에 임하여서는 해번의 병사 1만 명으로 단양의 도적을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병들어 죽으니, 아들 한종이 후작을 잇고 병사를 영솔했는데 문제는 한종이 시발놈이라 아비의 시신을 이끌고 위나라로 튀었다.
손책때부터 봉직[편집]
장흠 자 공혁. 손책이 원술에게 의지할 때부터 손책의 측근이 되었다. 손책이 강동으로 진출하자 병사가 주어졌고 손책이 3군과 예장을 정벌할 때 종군했다. 대부분의 기록이 도적 토벌에 대한 것으로 이로 인해 꾸준히 승진했다. 손권의 권유로 여몽과 함께 학식을 쌓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장흠은 괄목상대로 워낙 임팩트가 큰 여몽에게 묻히고 말았다(...). 2차 합비 공방전에 종군했는데 위나라의 장수 장료가 나룻가 북쪽에서 손권을 습격하자, 장흠은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이 공으로 탕구장군에 임명되어 유수독이 되었다. 이후 도읍으로 소환되어 소송의 사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매우 검소해 장막으로 이불을 하고 처첩들은 베로 치마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서성과는 사이가 나빴는데 조조군과 싸우는 유수구 전투에서 장흠은 여몽과 함께 여러 군대를 가지고서 지휘하였다. 서성은 항상 장흠을 두려워했지만 장흠은 매번 서성의 좋은 점을 칭찬하였다. 서성은 장흠에게 감사해했고 사람들도 장흠을 찬양했다. 손권은 장흠에게 그 이유를 듣고 그의 사적인 원한에 사로잡히지 않는 태도에 감탄했다. 번성 공방전에서 손권이 관우를 공격할 때 장흠은 수군을 감독하여 면수로 들어갔다. 귀환하는 길에서 병이 나서 죽었다. 손권은 소복을 입고 슬퍼했고 장흠의 처자에게 주민과 땅을 주었다.
주태 자 유평. 손책이 강동을 장악했을 때 동료 장수인 장흠과 같이 귀순했는데, 둘 다 매우 용맹하고 죽이 잘 맞아 자주 함께 전투에 참전했다. 손권은 주태의 사람됨과 풍채를 마음에 들어하여 손책에게 주태를 자신에게 달라고 청하여 수하에 두었다. 이후 손권이 선성을 주태와 지킬 때, 아직 방어선이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산월의 습격을 받아 수많은 군사에 포위되는 일이 있었다. 그 때 주태는 12군데나 창을 맞으면서도 몸을 바쳐 손권의 목숨을 구하였다. 황조를 공격하는데서 공을 세우고 적벽대전에도 참가. 그후 주유, 정보와 함께 조인을 공격하는데도 참가하고 유수구 전투에 참가해서 유수를 맡게 된다. 이때 손권이 서성과 주연을 주태 휘하 장수로 배치하려는데 서성, 주연이 주태의 출신이 한미하여 배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들자 어느 날 연회석에서 여러 장수들 앞에서 주태의 갑옷을 벗어줄 것을 부탁해 몸의 흉터마다 짚으면서 그 생긴 경위를 물으니 그 성한 데가 없음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후 손권은 주태에게 어책(御幘), 어개, 청라산(靑羅傘 : 군주가 쓰는 푸른 비단우산)과 수많은 재물을 하사한 뒤에 자기 맘대로 궁궐에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주태는 이에 수레에 머물며 병마를 시켜 인도해 따라 나가면서 북을 치고 뿔피리를 불게 하였다. 후에 관우를 습격하여 형주를 취하게 되었을 때는 한중태수 분위장군 능양후에 봉해지면서 목숨을 걸었던 보답을 충분히 받았다.
진무 자 자열. 손책이 수춘에 있을 시절 손책을 찾아가 스스로 그 가신이 되었는데, 당시 18세였으며 신장이 7척 7촌에 달했다. 이후 손책을 따라 장강을 건너 정벌에 공을 세워 별부사마가 되었다. 199년, 손책이 여강태수 유훈을 격파하고 여강 사람 중 정예한 자들을 묶어 진무에게 거느리게 했다. 손권의 친애를 받고, 공적이 있어 편장군으로 승진했다. 215년, 손권을 따라 2차 합비 공방전에 참전하였으나, 난전 중에 전사한다. 손권은 이를 애통히 여기며 직접 장례에 참가하고 빈객 2백여명의 부역을 면제한 다음 진무의 애첩을 순장한다. 손권은 이 일로 잔인한 짓을 했다면서 두고두고 까인다. 일러스트가 좀 괴상한데 이건 연의에서는 얼굴은 황색, 눈은 적색으로 괴이한 용모라고 서술되서이다. 연의에선 유비와 손상향이 형주로 귀환할 때 반장 등과 함께 데리고 돌아오려 하다가 손상향의 일갈에 물러났다.
동습 자 원대. 후한서와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키는 8척(尺)으로 무력이 남들보다 뛰어나고 지조와 절개가 강개하고, 굳세고 강건하며 영열했다고 한다. 손책이 회계에 왔을 때 그를 보고 한 눈에 반해 문하적조로 삼았으며, 199년에 유훈을 치러갈 때 따라가 환현을 정벌하고 심양에서 유훈을 격파하고 강하의 황조 토벌에도 따라갔다. 200년에 손권이 손책의 뒤를 잇고, 오국태가 앞일에 대해 묻자 "강동은 산천의 험함과 손견, 손책의 은덕이 있으니 장소와 같은 문관에게 안을 맡기고 저 같은 무관들이 바깥을 지키면 문제가 없을 입니다." 라는 말을 해 무관치고는 식견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파양의 팽호를 토벌할 때 능통, 보즐, 장흠과 함께 적을 토벌하는데 동습의 공이 가장 커 10일만에 적을 다 토벌하자 위월교위 편장군이 된다. 208년에 손권이 황조를 공격하자 황조가 몽충선 두 개를 가로로 묶어 강을 막고 화살을 날리니 진군이 불가능하고 피해만 커져갔다. 거기서 동습은 능통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해 몽충선 내부로 친입한 다음 몽충 두 개를 잇는 밧줄을 끊어 버리니 몽충이 표류하고 적은 혼란에 빠져 황조는 성문을 열고 달아나다 주살되어 강하 점령에 성공한다. 조조가 유수구를 공격하자 손권은 동습에게 다섯겹 누각이 있는 배를 맡겨 유수구를 지키게 했는데 그날 태풍이 몰아쳐 배가 전복될 위기에 처하자 다른 병사들은 다 작은 배로 도망치는데 동습만이 사망한다.
손권때부터 봉직[편집]
감녕 자 흥패. 아마 여기서 가장 유명한 네임드. 젊어서 익주 파군에서 관리를 지내고 천거되어 촉군승으로 임명되었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관직을 버리고 본군으로 돌아갔다. 사람됨이 싸움을 잘하고 무리를 끌고 다니기 좋아했기에 동네 건달들을 모아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수적단을 만들어 인근에서 행패를 부렸다. 비단으로 돛을 맨다고 해서 금범이란 말의 유래가 되었다. 또한 물소 꼬리로 만든 깃발을 등에 지고, 손에는 활을 들고, 허리에는 항시 큰 구리방울을 달고 다녀 사람들은 감녕의 구리방울 소리만 들어도 몸을 사렸고, 이게 감녕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했다. 두목 노릇을 20년 동안 하며 보니 점차 성격도 누그러지고 제자백가의 책을 가까이하여...는 페이크고 유장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고 부하들을 데리고 형주로 가서 유표에게 의탁했다. 이후 황조의 푸대접을 받아 손오로 귀순. 남군 공방전 당시에 이릉성을 탈취하지만 곧바로 조인이 보낸 몇 배나 되는 적군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병사들이 모두들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감녕만은 태연자약하게 있었다. 이것이 고사성어 담소자약의 유래. 익양대치 때는 노숙에게 병사 5백을 요청하여 관우에게 대항하겠다고 말해 노숙이 가려 뽑은 병사 1천을 받아 강을 지켰고 관우는 이를 보고 '흥패가 강을 지키는구나' 하고 강을 건너지 않고 관우뢰를 만들었다. 유수구 전투에서는 감녕이 단 100명의 군사로 야습을 성공시켜 그나마 좀 체면치레를 했던 관계로 손권은 '조조에게 장료가 있지만 나에게는 감녕이 있으니까 충분히 승산이 있다.'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215년에 죽어 병사는 반장이 이어받는다. 정사에선 이렇지만 연의에서 이릉대전까지 가서 멋지게 싸우다 죽는데 그의 시신을 까마귀가 감쌌다는 간지 묘사가 있다. 덕분에 관우급으로 네임드 신은 아니더라도 그 지역에서는 지역신 급으로 숭배받는다.
능통 자 공적. 아버지 능조는 오나라의 손책과 손권을 2대에 걸쳐 섬겼는데 황조 토벌때 감녕이 활을 쏴 죽였다. 당연히 능통은 감녕을 원수로 여겼다. 당시 능통은 15세였는데 손권은 능통을 별부사마에 제수하고 파적도위를 겸임하여 아버지의 병사를 거느리게 했다. 손권이 보둔과 마둔을 공격할 때 능통도 따라갔는데, 손권은 보둔을 함락시키고 마둔에는 병사 1만을 남긴 채 능통과 장이에게 포위를 맡기고 돌아갔다. 208년에 능통은 황조 토벌전에 따라나서 복수를 하려고 했다. 능통은 동습과 함께 몽충을 이끌고 돌격했으며, 적장 장석을 베고, 여몽이 적의 수군을 패배시킨 틈을 타서 능통은 먼저 그 성을 공격하여 크게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원수인 감녕이 그 전에 투항해 버려서 손권의 신하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복수는 물 건너 갔고 아버지의 원수인 감녕을 증오해 감녕은 항상 능통을 경계하고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손권 역시 능통에게 한을 품지 말라고 명령했다. 어느 날 여몽의 집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능통이 칼춤을 췄다. 감녕이 이에 일어나서 자신도 쌍극무를 출 수 있다고 말했다. 여몽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자신도 칼과 방패를 쥐고 칼춤을 춰서 두 사람의 거리를 벌렸다. 후에 손권은 능통의 의도를 눈치채고 감녕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주둔하게 했다. 적벽대전에도 참가했으며, 남군전투에서 주유가 감녕을 구원하러 갈 동안 본거지를 무사히 지켰다. 능통은 어진 선비와 가까이 지내며 재물은 가벼이 여겼다. 또한 공손하고, 수하를 잘 대했고 의를 중시했으며 주로 불리한 시점에서 후위를 맡거나, 불리하지 않아도 닥돌이 필요한 상황에서 먼저 창들고 뛰어가는 역할이었기에 손권이 크게 신임했다고 한다. 이후 합비 공방전에서 영혼까지 털리고 도망치던 손권을 수하의 300명을 이끌고 죽을 힘을 다해 구원했고 29살에 요절했다. 손권은 크게 슬퍼하고 능통의 두 아들인 능열과 능봉을 궁 안에 거둬 양육했다. 연의에선 감녕과 화해하지만 정사에선 끝까지 서로 화해 안 했다.
서성 자 문향. 손권에게 등용되어 병사 200으로 황조의 아들 황역이 이끄는 수천 군사의 침공을 물리쳤고, 남쪽의 산월을 쳐서 중랑장으로 임명되었다 한다. 또 213년 조조가 유수구에 쳐들어왔을 때에는 동습과 함께 수군을 이끌다가 폭풍을 맞아 배가 적의 해안가에서 좌초되었다. 서성은 그대로 적을 향해 돌진하여 적을 흩어 버린 뒤 바람이 그치자 돌아왔다. 손권은 서성을 매우 칭찬했다. 합비 공방전에서는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창을 잃었는데, 이를 하제가 되찾아왔다. 조비가 형정을 보내 손권을 오왕에 봉하자 서성은 그 자리에서 위나라 사신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치욕스러워 할 정도로 대담했다. 충직한 인물이었지만 주태, 장흠과 반목했다는 일화 역시 남아 있다.그 뒤 이릉대전에도 참전했다. 222년 전종, 하제, 여범 등과 동구에서 조휴의 군사와 분투했으며, 여기서도 폭풍우를 만나 익사한자가 수천 명에 다다랐다고 한다.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전종 등과 끝까지 분전했고, 하제의 전함을 보고 조휴는 철수한다. 224년 조비가 직접 오나라 정벌군을 일으켰을 때에는 나무에 갈대를 입혀 성과 누각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전함을 많이 띄워 위군을 속여, 놀란 조비가 군대를 철수시켰다. 황무 연간(222~229년)에 죽었다. 연의에서는 서성과 정봉이라며 세트로 활동하지만 실제로는 정봉이 한세대 쯤 뒤 인물이다.
반장 자 문규. 난폭하고 사나운 성격으로 술을 좋아해, 젊을적에 가난하지만 언제나 술을 즐겨 마셨다. 손권을 섬기면서, 219년 관우 토벌에서 주연과 협력하여 관우를 사로잡았다. 222년 이릉대전에도 참전해 풍습을 죽이는 큰 공적을 세웠다. 촉의 대장인 풍습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유비군에게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를 안겨주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이릉대전에서는 맹활약했다. 조비가 오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했을 때 강릉에서 제갈근과 함께 하후상을 상대했다.229년 손권이 황제로 오를 때 우장군에 제수되었다. 반장은 시장 운영에 뛰어나, 반장이 시장의 감독직을 맡으면서 도난, 상해사건이 없어졌다. 또한 전쟁이 일단락되면, 군대가 관리하는 시장을 열었고, 기타 부대에서 물품 부족이 있다면 모두 반장의 시장에서 보충했다. 반장은 이런저런 일에서 범죄 행위를 자주 되풀이했다. 강한 물욕으로 금전에 집착했고, 신분에 맞지 않는 복장을 좋아하며, 자신의 밑에 부유한 관리나 병사를 살해해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인간쓰레기 급 불법행위를 자주 일으켰다. 그러나 손권은 반장을 사람으로 아낀 것이 아니라 공적만 아낀 것이다. 반장이 죽고 반장의 아들 반평이 단지 행실이 불량하다고 손권은 반평을 촌동네인 회계로 쫓아낸다. 그놈의 비뚤어진 인간성 때문에 반장은 오나라에서도 출세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전투에서 관우의 망령에 놀라는 사이에 관흥에게 끔살당한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연의의 창작이다.
손량~손호 시기에 봉직[편집]
정봉 자 승연. 어려서 용맹하여 싸움터에서 매번 적장을 베고 깃발을 탈취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도 상처를 입었다 감녕, 육손, 반장 등에게 속했다. 손권을 따라나서 어려서부터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서 명성을 쌓아나갔고 252년 12월에 손권이 사망한 후 제갈탄, 호준 등이 지휘한 위의 공격에서도 제갈각의 휘하에서 위군 진영을 공격해서 한당의 아들 적장 한종을 베는 전과를 세웠다. 그 공으로 멸구장군, 나아가 도향후로 승격한다. 255년에 관구검의 난에 참여한 문흠과 문앙이 위군에 패하고 오나라로 도망왔을때 단기로 적병 수백을 베고 군기를 빼앗아 왔다. 제갈탄의 반란때에도 그를 돕기 위해서 참전하였다. 이후 손휴가 제위에 오른 후 손침을 제거할 계획을 세울 때 장포가 그를 추천했고 이에 가담하여서 258년에 손침을 죽이고 이 공로로 대장군으로 승진한다. 263년에 위나라의 등애가 촉을 공격할 때 동생과 같이 구원을 가다가 회군한다. 손휴가 사망한 후에는 손호를 차기 황제로 추대하고 우대사마좌군사로 승진한다. 268년에 11월 제갈탄의 아들 제갈정과 함께 합비를 공격하지만 여음왕 사마준에게 패배했으며, 269년에 곡양성을 공격했지만 여기서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270년에도 군을 보내 진나라의 와구(渦口)를 공격했지만 공이 없음을 추궁받아 271년 12월, 분노한 손호에 의해서 정봉의 도군이 처형되었다. 271년에는 만욱이 정봉과 유평에게 손호를 단념하도록 발언했는데, 이 발언이 손호의 귀에 들어가서 272년 신년연회에서 만욱과 유평에게 독주를 보내는 등 죽게 만들었지만 이 시점에서 정봉은 이미 사망한 상태라 아들 정온이 대신 처형당했다고 한다. 정봉은 승진하면서 점점 교만한 태도를 보였으며, 그가 죽은 다음 해인 272년에는 손호에게 정봉을 참언한 자가 있어서 생전의 군사행동에서의 실패를 이유로 정봉의 유족은 임천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연의에선 서성과 세트로 오래 봉직한 노장 이미지가 있고 장료를 죽였다고 나오지만 연의의 창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