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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마!
하지 말라면 제발 좀 하지 마
하지 말라는데 꼭 더 하는 놈들이 있어요 ㅉㅉ

누군가의 무덤을 파내서 부장품을 스틸하는 행위. 주로 무덤 스케일이 ㅎㄷㄷ 한 중국에서 많이 있을것 같지만 도굴꾼은 어디에나 있었다. 물론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이나 이집트 같은데는 여러가지 장치를 해놨지만[1] 한국고구려백제는 친절하게 입구를 만들어놔서 도굴꾼들 눈에 띄는 족족 털렸다. 백제나 고구려 유물이 잘 없는 이유 중 하나.

누가 도굴하는가?[편집]

돈 없는 거지들이 우연히 얻어걸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로 프로도굴꾼들이 클랜을 만들어 과거 문헌들을 분석해 가며 전문적으로 무덤을 털었다.

진시황릉 뿐만 아니라 꽤나 많은 왕, 황제들의 무덤에 도굴방지를 위해 각종 방어장치가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들어갔다간 죽기 딱 좋은 날이 될 뿐이어서 보통 짱꼴라 도굴꾼들은 전문가들이었다.

2015년 5월엔 중국에서 10개 175명이나 되는 도굴꾼들을 검거했다. 이쯤 되면 다들 도굴전문가들이다.

http://www.ytn.co.kr/_ln/0104_201505271157334298

이처럼 수많은 묘가 발굴,도굴된 현재에도 도굴이 성행하는데 빈틈이 많았던 옛날은 어땠을지 상상도 안 간다.

참고로 니가 대한민국에서 발견된 유물을 문화재청에 신고하지 않고 가져가거나 훼손하는 경우도 도굴의 범주에 포함되어서 처벌받는다 조심하자

도굴을 막을 순 없을까[편집]

네임드 황제들은 도굴을 막으려고 별 짓을 다 했다. 잘 알려진 진시황릉 외에도 측천무후나 칭키즈칸의 무덤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1. 측천무후의 건릉

보물을 500t이나 무식하게 넣어둔 건릉은 일단 지금은 발견했다. 1960년대에 도로공사중에 발파작업을 하던 중 우연찮게 입구를 발견했는데 그 전까지 이 무덤은 17차례의 공식 도굴을 방어했고 황소의 난때는 40만 병력이 산을 파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중화민국때도 군벌 쑨롄중이 폭약을 이용해 산을 깎았으나 실패했다.

무덤 자체는 안 털렸고 정부에게 발견됐으니 다행. 그러나 혹시 모른다. 어떤 도굴킹이 이미 파놨을지도?

2. 칭키즈칸의 무덤

사실 칭키즈칸의 묘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현재도 탐사가 진행중이고.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언제 묻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 무덤을 만든다고 동원한 애들을 모조리 다 죽여버려서 찾기가 힘들다. 현재 동아시아를 주로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이 가장 찾고싶어하는 무덤이라는 카더라가 있다. 무덤 안의 부장품 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인 무덤이긴 하다.

ㄴ사실 몰라서 못찾는것도 있지만 몽골사람들 대부분이 저주걸릴까봐 차라리 안찾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카더라

우리에게 유명한 사건[편집]

오페르트 도굴 사건[편집]

정확하게는 오페르트 도굴 미수 사건이 맞다. 그런데 다들 도굴사건이라고 부른다. 파긴 팠으니까.


조선말기 오페르트 라는 유대인(독일계 유대인:아슈케나지)이 당시 한반도의 집정자였던 대원군의 아버지 묘를 판 사건이다. 당연히 당시 조선사회는 뒤집어졌다.

윾머인이 또;;


1. 유대인 오페르트는 왜 도굴을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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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업을 하던 집안에서 태어났던 오페르트는 홍콩에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쫄딱 망했다. 그래서 도굴 해적질로 전업을 했다.


그리고 오페르트는 동양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었고, 동양 국가들을 상당기간 독자연구했다. 물론 그당시의 조선에 대한 연구 또한 마찬가지다.

잠시 머물다 가는 척 사람들과 안면을 터두기도 했고, 의외로 한국인에 대해서는 주변국보다 긍정적으로 봤다. 조선인(한국인)은 주변 중국인, 일본인 같은 동양인보다 키가 훨씬 크고 피부색이 하얀데, 동쪽으로 갔었다던 백인이나 유대인의 지파 중 하나일 수 있다. 라고 평가함.

인종주의와 식민주의가 팽배하던 시대에 동아시아 인종 중 가장 백인스럽다는 이런 평가는 한국인종이 실제로 당시 동아시아인들 중 키가 크고 피부색이 밝은 색인 걸 떠나서도 꽤 고평가를 한 거다.


문제는 오페르트는 개인연구를 하기 이전에 이미 도굴꾼으로 전업을 한 상태.

조선인, 조선을 동양 국가들중에서 백인(문명인)에 가깝다고 고평가 
= 상대가 가치가 있다
= (장사가 쫄딱 망하고나선 해적 도굴단으로 전업한 오페르트 입장에서) 털면 나올 것이 있어보인다.

이런 도굴꾼 사고회로가 돌아가게 된다.


때문에 동양에서 살면서 장사도 하고,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면서 돈을 벌려던 그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집정자인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묘를 파는 계획과 드림팀을 꾸리게 된 것이다.



2. 동업자는?

오페르트는 외국에서 용병들을 고용해서 다국적 드림팀을 짰다. 이 팀은 도굴클랜 수괴 유대인 오페르트, 필리핀 인부들, 한국인 천주교도들, 중국인 100여 명으로 구성됐다.


대장인 오페르트는 당연히 도굴질로 돈을 벌려고 했고 중국 애들도 그냥 돈 주니까 따라온 거였다. 문제는 천주교인데, 이놈들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막기 위해서 조선과 협상을 하려 했고 그 협상 도구로 흥선대원군 아버지(남연군)의 시체를 쓴다는 천주교 교황과 대주교들이 물구나무서기를 할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도굴작업에 참여했다. 분명 부모 시체를 금쪽으로 여길 조선인일 텐데 천주교뽕 빨고 시체팔이로 전직한 것을 보면 새삼 종교의 힘을 알 수 있다.


3. 왜 실패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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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 딴딴띠~

그리하여 왁자지껄한 다국적 병신들은 지금의 충청도 서해대교 방면으로 진입하여 묘를 파헤쳤다. 그런데 그들이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 몇 시간의 생지랄 끝에 무덤 상단에 쌓아놓은 흙은 대충 치웠는데 시체가 들어있는 관이 석회로 코팅이 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서 시멘트가 쳐져 있었던 것. 공구리질 덕분에 100명이 넘는 초호화 도굴팀이 생 난리를 쳐도 관뚜껑을 열 수 없었다.

야사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언젠가 아버지 무덤이 파헤쳐질 거라는 소리를 듣고 시멘트를 발랐다고 하는데 당시 조선 양반 집안에선 매장할 때 석회로 공구리를 치곤 했다. 무덤에 물이 들어가면 부정을 탄다나? 치밀하고 권력욕이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성격상 혹시몰라서 아버지 묘를 조금 더 깊게 파묻고 석회질을 딴딴하게 해댔을 순 있었겠다. 실제로 나중에 보니까 1미터가 넘는...정말 비정상적일만큼 두꺼운 쎄멘트질이 되어있었다. 100여명의 인력과 화약 조금 정도로는 당연히 시체건 부장품이건 도굴할 수 없었다.

아무튼 두꺼운 석회는 깨질 기미가 안 보이고 날은 밝아오고 썰물 때가 다가오고 충청감사의 파병 병력이 거의 도착했다는 소식에 오페르트 팀은 무덤을 두고 철수했다.


4. 이후

이렇게 끝냈으면 그냥 병신으로 역사에 남았을 텐데 돌아가기는커녕 뻔뻔하게 흥선대원군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데 그 내용이 "니 애비 시체 굴묘편시 할 각이었는데 내가 인심 써서 봐줬다. 그러니까 나한테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리 나라랑 수교해라."였어서 흥선대원군에게 쫒겨났다. 이에 빡친 오페르트는 화풀이를 한답시고 영종도를 침공했다. 그런데 거기 관리의 총질에 필리핀 인부 둘이 죽자 나머지는 광속으로 도주했다.

이후 오페르트는 미국 법정에서 욕 먹고 독일에서는 자국 망신이라고 욕 먹고 덤으로 유대인들에게도 욕 먹었다. 독일 내 유대인들이 같은 유대인이라고 욕 먹자 원흉인 오페르트를 깠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선교사, 중국인들, 필리핀인들은 알아서 잘 튀었으나 한국인 천주교도들과 영종도에서 죽은 두 필리핀 놈들은 모가지가 썰려서 저잣거리에 내걸렸다.

  1. 그런데 둘다 온갖 장치를 만들었는데도 꼼꼼한 도굴꾼성님들한테 탈탈 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