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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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범죄 조직에 대해 다룹니다. 이 문서는 사회를 좀먹는 집단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놈들을 보게 된다면 절대로 입단할 생각하지 말고 하루빨리 정의의 사도들을 호출하여 주십시오. |
하나회는(은) 사실 북한과 빨갱이에게 깊은 사랑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회는(은) 사실상 북한과 빨갱이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존나 싫어한다면서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싫어하면 관심을 주지 마 병신들아 ㅉㅉ "하나회는(은) 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북한과 빨갱이을(를) 사랑하면서 왜 본심을 숨기는 것일까?" |
“ | 야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니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 지금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어! 역적 놈의 새끼들! | ” |
— 장태완,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하나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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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는...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회의 폭동이야. 근데, 그러니까 시민군이기 때문에 시민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 | ” |
— 1980년, 광주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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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아니 씨발 전땅크 망언을 패러디,박제해버리네 ㅋㅋㅋㅋㅋㅋㅋㅋ
머한민국에 있었던 군대 내 사조직 겸 반란군. 국가와 국민의 종, 그들을 수호해야 할 군대 내에서 사조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다른 거 볼 거 없이 직속부하가 직속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하나회의 명령을 따랐다는 것으로 이 조직의 막장도를 알 수 있다.
또한 이 씹년들이 천조국까지 엿맥이면서 멋대로 집권한 결과 '천조국이 저 새끼도 쫓아내주겠지?'라고 기대한 당시 운동권들은 "천조국한테 배신당했쪄 빼애액!" 거리면서 빨갱이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ㄴ 천조국은 그때 내부 사정으로 한국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음. 이란 친미 정권이 무너지면서 극종교주의자인 호메이니가 집권하고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카터가 납치법들에게 끌려 다닌다며 자국에서 무쟈게 욕 먹었다. 결국 카터는 레이건에게 패배함. 근데 극우로 알려진 레이건이 오히려 전땅크에게 물 먹였다는 게 함정.
ㄴㄴ 운동권은 천조국의 사정을 이해할 지능이 없다.
성립[편집]
육사가 제대로 돌아간 게(= 4년제 과정 시작) 전두환 기수 때부터였고 그래서 전두환과 동기들은 자기들만 정통 육사고 우리 위는 다 사이비라고 생각했다. 논리 따위 없는 개소리였지만 미친놈들 입장에서는 그런 건 상관없었다. 제대로 정신 박힌 놈들이었으면 애초에 군 내부에서 사조직을 안 만들었을 거고 쿠데타 일으킬 때도 정통성을 생각해서 이딴 미친짓은 안 했겠지. 반인반신이 5.16 군사정변 이후 괜히 군 제대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윤보선과 선거전 치른 것이 아니다. 어쨌든 그래서 이놈들은 우덜끼리 뭉쳤다.
6.25 전쟁에서 맹활약을 했고 군의 정치 개입을 좋게 보지 않았던 평안도, 함경도 출신의 실향민 계통의 군장교, 이종찬과 같은 경기도 출신 장교들로부터 반인반신이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밀어줬다.[1] 반인반신이 반신그라드 출신인 것답게, 장세동(고흥군 출신)과 고명승(부안군 출신) 외에는 대다수가 TK 출신이었다.
원래 하나회가 아니었고 오성회라는 극히 중2병 같은 모임이었는데 이걸 박정희가 하나회로 다시 만들어주게 된다. 그 과정은 아래와 같다. 참고로 오성회라는 게 멤버들 별명도 존나 중2병 같은 별명을 지었다. 그래서 원래 5명밖에 없던 오성회가 수십 명에 달하는 하나회로 번창하게 된 것이다.
- 용성 전두환
- 드래곤을 뜻하는 게 아니다. 용맹하고 싸움을 잘해서 용성(勇星)이다.
- 관성 노태우
- 물리학을 뜻하는 게 아니다. 임무 수행을 잘 해서 관성(冠星)이다.
- 혜성 최성택
- 천문학을 뜻하는 게 아니다. 지혜롭다고 해서 혜성(慧星)이다.
- 여성 김복동
- 팬티스타킹을 뜻하는 게 아니다. 현명하고 박식해서 여성(黎星)이다.
- 웅성 백운택
- 곰을 뜻하는 게 아니다. 마초스럽고 남자답다고 웅성(雄星)이다.
애초에 반인반신은 전땅크를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전땅크는 이를 거절하고 계속 군인으로 남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반인반신이 그래서 전땅크에게 생각할 시간을 줘봤는데
“ |
각하, 군대에서도 각하의 편에 서 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
” |
전땅크는 반인반신에게 이렇게 답변한 것이다. 이에 반인반신은 전땅크를 대위에서 거의 반쯤 바로 중령을 달아줌[2]과 동시에 전땅크를 리더로 한 군 내부 사조직을 하나 만들어줬고 대한민국 국군 전체가 그 사조직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으니 그 사조직이 바로 하나회다. 하나회는 전땅크를 대장으로 하고 전땅크의 친구인 물태우를 부장으로 삼아 여기에 이런저런 육사 출신 고위 장교들을 추가해서 구성됐다.
그런데 이들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한번 숙청될 뻔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1973년 그 조직의 후원자 중 한 명인 당시 수경사령관 윤필용이 중정부장 이후락에게
“ |
각하께서 매우 노쇠해보이시니 그만 물러날 때가 되신 거 같습니다. 후계자는 형님이십니다. 형님은 아무나 갈 수 없는 북한에 가셔서 김일성이를 만나고 오지 않으셨습니까. 신라의 김춘추도 당나라와 고구려를 갔다 오고 난 뒤에 왕이 됐습니다. |
” |
라고 말한 것이 박정희의 귀에 들어가 보안사령관었던 강창성에게 다 잡아 족치라고 지시한다. 이로 인해 윤필용 사건이 발생하여 윤필용의 참모장이자 이후락의 울산 동향 학교 동문이었던 손영길을 비롯해서 윤필용의 부하들, 이후락의 울산 동향 친지들까지 잡혀갔다.[3] 이와 동시에 윤필용의 후원 그룹인 이들도 연행되어 수사 대상이 되었지만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의 간청으로 박정희는 하나회 조직은 그냥 나두고 윤필용과 그중 몇 명만 자르라고 지시하면서 위기에서 벗어났다.
학력[편집]
이 문서에서 설명하고 있는 대상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마치 너의 인생과 무능 후장 관처럼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니 하루빨리 갖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나같은 놈은 이세상에 없는 게 낫다. |
주의! 이 문서에서 다루는 대상은 병신입니다. 그냥 개좆병신 그 자체입니다. |
김복동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다 공부를 존나 못했다. 웃기게도 그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공부를 못한 놈이 다름 아닌 전두환이었다. 심지어 전두환은 퇴교 심의 대상이기까지 했다가 간신히 소위로 임관했다. 다음은 하나회 회원들의 육군사관학교 소위 임관 성적이다. 물론 노태우는 200명의 입교 인원 중 10등 안에 들 정도로 1학년 때는 공부를 잘했으나 전두환 같은 못된 친구들을 사귀면서 학업을 멀리한 결과 학업 성적이 꽤 추락했다. 전두환 기수인 육사 11기는 입교는 200명이 했는데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싫어서 44명이나 퇴교했다. 왜냐면 한국전쟁은 1953년에 휴전했는데 전두환의 입교년도가 1951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육사를 퇴교한 학생들은 일반 대학교로 진학해서 병역을 면제 받았다. 결국 156명이 소위로 임관했다.
다음은 성적 순 나열이다.
- 김복동: 13/156
- 권익현: 55/156
- 노태우: 67/156
- 손영길: 81/156
- 정호용: 86/156
- 전두환: 126/156
제일 공부를 못했던 전두환이 나중에는 제일 잘나가게 되자 장교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꼴등으로 임관한 소위에게 "너 장군감이다. 원래 낮은 성적으로 임관한 장교들이 출세하게 되어 있어."라고 말하는 게 관례가 되었다. 참고로 전두환의 성적이면 50명이 있는 학급으로 따지자면 41등을 한 셈이다.
ㄴ 그리고 대한민국 국군 장교 임관 역시 저렇게 개좆병신같아서 저게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소위로 임관하는 생도들의 병과를 선정하는 방식이 존나 병신 같은 게, 전교 1등과 전교 꼴등이 동일하게 보병 병과를 받고 어중간한 생도들이 포병 기갑 같은 병과를 받는다. 웃기는 게, 고승덕과 진워렌버핏이 육사 생도일 경우 둘 다 보병이라는 병신 같은 기준으로 임관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보병만 진급이 존나 잘 되는 게 대한민국 국군의 구조라는 것이다. 기갑은 대장에 박찬주 혼자, 중장도 오정석 혼자다. 근데 보병은 대장만 수십 명 나왔다.
그리고 말이 첫 4년제 육사였지, 인적 자원의 질적 수준은 육군사관학교 역사상 제일 개판이었던 게 11기였다. 당장 자퇴율이 22%나 될 정도면 말 다한 것이다. 특히 이 당시에는 진짜 뛰어난 장교들은 갑종장교로 깡그리 몰렸고 육사는 갑종 탈락해서 오는 사람들이나 쫄병이 되기 싫어서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김복동이나 노태우가 존나 특이한 거였다.
참고로 1/156은 누가 했냐 하면 김성진 소위가 했다. 하지만 김성진은 오히려 전투 지휘관의 길을 포기하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식으로 초창기 육사는 공부를 잘하면 육사 교관으로 전락했고 공부를 못하는 새끼들이 전투 지휘관 자리를 차지했다.
군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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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고 먹으면서 진급은 잘 되었던, 한마디로 십상시 같은 존재였다.
육군사관학교 개교 당시 구육사와 신육사로 나뉘었는데 육사 1기~10까지가 구육사이며 11기 이후로 신육사라고 부른다. 구육사와 신육사를 가르는 기준은 교육 기간이다. 구육사는 그냥 빨리빨리 임관시킨 반면 신육사는 4년제 대학교의 형태였다.
한국전쟁이 터졌다. 구육사는 생도고 나발이고 바로 전쟁터에 싸그리 쑤셔박았다. 채병덕 이 돼지새끼가 판단 미스를 저질렀는데 동두천과 태릉 쪽 방향 전선에 무리하게 육사생도들을 투입해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존나게 많이 전사했다. 그리고 거기서 살아남은 생도들은 바로 소위로 임관시켰다.
1951년이 되자 신육사 1기에 해당되는 육사 11기를 선발했다. 구육사는 닥치고 장교로 임관시켜서 죄다 전쟁터에 쑤셔박는 와중에 신육사는 그래도 대한민국 국군의 미래를 위한다고 저기 부산 구석에 처박아놓고 훈련시켰다. 당시 노태우 생도가 존나 좆병신이라고 인증하는데...
“ | 우리는 4년 내내 이렇게 쫄쫄 굶고 추위에 바들바들 떨었는데 그런 우리와 임관하지도 못한 2기 생도들을 동급으로 인정할 수 없다. | ” |
— 노태우 생도
|
그럼 니들이 걔들이랑 바꿔볼래? 걔들이 4년 동안 공부할 테니까 육사 11기 니들이 북한군과 총 쏘고 칼빵 쑤시고 현피 뜨고 동료들 우수수 뒤져 나가고 이래볼래? 너무 개좆같은 발언을 하며 항의하자 육사 당국에서는 이의진 생도 1명을 시범 케이스로 퇴교시켜 버렸다. 한 명을 퇴교시켜 버리니까 그제서야 조용해졌다.
그러나 이런 좆병신 새끼들에게 기회가 왔다.
박정희는 갑종장교를 견제하기 위해 신육사를 좀 키워줘야 했는데 그래서 신육사 출신 중에서도 하나회를 밀어줬다. 그런데 갑종장교들은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다. 그래서 박정희도 그에 걸맞는 군공을 신육사 출신에게도 만들어 주려고 꾀를 냈다.
그게 바로 베트남 전쟁 파병이다. 박정희는 갑종이 한국전쟁 참전용사라고 하니까 신육사 출신인 하나회도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라고 하기 위해서 순서를 정해서 차례대로 베트남 전쟁에 투입시켰다. 예를 들면 전두환 대령 → 노태우 대령 → 박희도 중령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이건 비교 대상이 아니다. 갑종과 구육사는 말 그대로 생지옥에서 피터지게 싸워가며 동료들이 부하들이 계속 뒤져 나가는 그 지옥 of 지옥에서 겨우 살아남아 참전용사가 된 것이지만 하나회, 그러니까 신육사 샊들은 말 그대로 베트남 관광 투어를 했을 뿐이었다. 특히 전두환 대령이 제일 가관이었는데 무기밀매상을 만나서 적성화기를 사다가 그걸 적을 무찌르고 노획했다고 구라를 쳤다가 들켜서 대대적인 개망신을 당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이놈들은 부대배치도 존나 꿀만 빨았는데 노태우는 숫제 중대장을 한 적조차 없고 소대장도 6개월만 했다. 그러고 대대장이 될 때까지 계속 참모 아니면 훈육장교 같은 것만 반복했다. 훈육장교는 존나 꿀빠는 보직이다. 사관생도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훈육장교는 그 기숙사의 사감 역할을 하는 보직이다. 특히 대위 시절의 전두환 마냥 ROTC의 훈육장교(서울대)를 하면 ROTC는 기숙사도 없으니까 레알 놀고 먹는 보직이 된다. 반면 구육사와 갑종은 존나 빡보직만 골라 다녔다.
그리고 이렇게 신육사만 초고속으로 진급시키고 땡보만 배치하는 등 편애하는 바람에 갑종들은 한없이 밀렸다. 이게 어떤거냐 하면 짬밥 상 장태완이 중대장이면 전두환이 그런 장태완 밑에서 소대장을 하는 수준으로 장태완과 전두환은 짬밥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전두환이 1955년 소위로 임관할 당시 장태완은 소령 진급심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8년 기준 장태완과 전두환 둘 다 소장이었다. 그나마 준장 진급은 장태완은 1971년, 전두환도 원래 1971년에 하려고 했는데 무기밀수가 적발되어 한 번 누락해서 1974년에 진급했다.
최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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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육참총장하고 기무사령관을 오늘 바꿀라캅니다. |
” |
— 김영삼, 취임 11일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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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그들) 모두 깜짝 놀랐제? |
” |
— 김영삼, 하나회 숙청의 시작을 알린 기무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 인사 교체 다음날 청와대에서 자기 비서관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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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으로 '웃기지 마라. 내가 대통령하면서 그렇게 더럽게 안 한다. 왜 동거를 하느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
” |
— 김영삼,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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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태우 시절까지도 군의 실세로 군림하며 인사권도 독점하는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지만 결국 김영삼에게 박살이 났는데 이 과정이 굉장히 드라마틱하기로 유명하다. 김영삼은 집권 이전부터 하나회가 자기에게, 나아가서 헬조선에게 존나 큰 위협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이들을 어떻게 박살을 낼지 고심했다. 그러다가 공직에 없는 자기 주변의 비선 인사들을 기용해서(변호사, 예편장교 등) 숙청의 그림을 그리게 지시했다. 물론 하나회를 잘못 건드리면 12.12 반란 시즌2를 찍을 가능성이 있는 매우 위험한 작업인 만큼 김영삼의 최측근은 물론, 국방부 장관 같은 군부 최정상급 요인도 숙청이 진행되는 순간까지 내용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했다. 실제로 하나회는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청와대의 의중을 파악할 수단을 갖고 있었지만 김영삼은 자신의 최측근 보좌관들에게도 관련 작업은 일체 함구하여 김영삼이 하나회를 쳐낼 거라고 예상조차도 못하고 있었다. 김영삼의 이러한 속도전과 비밀주의 성향의 숙청 작업이 유효했다는 건 현재 정설이다. 과거 정승화 참모총장은 김영삼과 반대로 하나회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숙청 작업을 시도했고 그 의도를 파악한 하나회가 저지른 것이 12.12 군사반란이다.
그리고 집권하고 열흘이 좀 지나서 숙청을 시작했는데, 국방부 장관을 불러서 자신이 군 통수권자라는 사실을 주지시킨 다음에 非하나회 출신 장성을 기무사와 육군총장에 앉혔다. 이 두 자리는 하나회 숙청시 군사적인 저항이 생기면 제일 위험한 위치였으니 우선 자른 것. 그러나 숙군 타깃이었던 하나회의 핵심 인사들은 이 일이 자기들 모가지를 몽땅 날리기 위한 사전 작업이라는 것을 당장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하나회 해체 준비 자체가 위에서 말했듯이 김영삼의 청와대 최측근까지 제외된 비선인사들로 구성된 테스크포스에서 진행되던 내용이었고,[4] 김영삼이 취임 이후 군 인사들을 격려하는 행보를 보인데다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연막 작업도 해서 하나회에서는 기무사와 육군총장 모가지가 날아가는 것을 봐도 당장 의심 따위도 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김영삼 본인이 3당 합당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니 하나회 입장에선 노태우의 후계자라고 봐서 안심한 것도 있었다. 결국 숙청의 시작인 기무사와 육군총장 인사 교체에 대한 하나회의 반응은 학군장교 그룹과 알자회 같은, 자기들을 제외한 군내 사조직을 와해하기 위해서 하는 요식 행위 또는 명분 쌓기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4월로 넘어가며 숙청이 급격히 진행되었는데 초기에는 김영삼과 측근들이 당초 계획한 대로 주요 야전군 사령관이나 합참 사령관 같은 군 정상급 요직에 있는 장성들을 솎은 후, 이후에는 군단 및 사단장급 장성들까지 하나회 출신은 몽땅 한직으로 보내버렸다. 이때 떨어진 별이 50개가 넘어가는데, 이게 4월 단 한 달 만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나회 출신 장성들은 뒤늦게 지들 모가지가 타깃이라는 걸 인지했으나 이미 늦은 상황. 몇몇 장성은 자포자기하고 퇴역 이후 뭐하고 살지 고민하거나 실권을 잃은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조기 퇴역 후 정치인에게 줄을 대려고 시도하기에 이른다. 어찌나 기밀 유지가 철통 같았는지 하나회 해체 이후 심층 취재를 시도한 기자들도 누가 어떻게 진행했는지 확실히 파악을 못해서 한동안 소문에 의존해서 기사를 써야 했을 정도라고 한다.
일단은 여기까지가 김영삼이 생각한 숙청의 범위였고, 실제로 행정부는 여기서 슬슬 정리하고 군부를 통제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하나회 병신들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병신 짓거리를 하는데…
“ |
"군을 이런 식으로 막 해도 돼? 선배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뭐냔 말이야. 소신도 없고, 다 죽었어. 정부가 장군들을 함부로 대하니까 외부에서도 제멋대로 군을 매도하잖아. 이래도 되느냐 말이야." |
” |
— 이충석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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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들어서자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모임에서 하나회를 상대로 한 숙청 작업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했고 그게 표면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하나회의 반발 소식을 접한 김영삼은 아 이 새끼들을 이 정도로 내버려뒀다가는 나중에 꼭지가 돌아서 쿠데타를 저지르겠구나 라는 현명한 판단을 하고 아예 영원히 재기할 수 없게 개박살을 내겠다고 마음 먹는다.[5] 이전에는 주요 군 장성들이 진급에서 밀리는 수준에서 하나회 숙청이 진행되었다면, 이때 진행된 2차 숙청은 아예 하나회 출신 장성은 몽땅 강제로 예편 때리는 식으로 군에 얼씬 못하게 진짜로 쫓아냈다.
그걸로 끝나면 또 모르겠는데 당시 국방부 장관 권영해, 육군참모총장 김동진은 평소 하나회에게 극심하게 핍박을 받고 진급에 불이익을 받아오며 하나회의 ㅎ자만 들어도 이를 갈던 양반들이었다. 때문에 김영삼과 행정부가 2차 숙청을 끝으로 마무리하자고 했을 때 오히려 이들이 여기서 마무리하면 안 된다고 그때까지 숙청 대상에서 빠져있던 영관급 장교까지 손길을 뻗어서 하나회의 ㅎ자만 연관되었다 싶으면 진급 누락은 기본, 좀 깊게 연관되었다 싶으면 아예 강제 예편까지 끼얹어버렸다. 1차 숙청이 하나회의 손모가지를 찍는 작업이었고, 2차 숙청이 하나회의 머리를 박살 내는 작업이었다면 3차 숙청은 하나회를 관짝에 처넣어버리는 작업이었다.
김영삼과 非하나회 출신의 군인사들이 행한 이 불도저 같은 숙청 작업에 힘입어 12.12 사태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대한민국 민주화에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하나회는 실체와 권력을 모두 잃어버리고 종이 호랑이가 되어서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는다. 물론 하나회 출신 장성들이 이후 정치인으로 길을 걷거나, 제대 군인으로서 간접적으로 군에 영향을 미치고는 있었지만 그들이 직접 군부를 움직일 수 있는 루트를 완전히 끊어버려서 과거처럼 군을 동원해서 정부를 갈아엎는 미친 짓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만약 하나회가 숙청이 안 되었다면 군부 내 사조직으로 남아서 정치권에 영향력을 계속 끼쳤을 터이고, 최악의 경우엔 남미 막장 국가들처럼 정치권이 마음에 안 들면 군부가 주기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나라를 뒤엎는 미친 상황이 벌어졌을 지도 모른다. 이것은 김영삼의 성격을 상징하는 굵직한 업적으로 남았다.
하나회 숙청이 성공한 이유[편집]
어찌 보면 참 운이 좋은 케이스였는데, 김대중이 만약 김영삼을 누르고 대통령 당선됐다면 김대중 비토설 등을 제기하며 반발하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김대중을 죽여버릴 가능성이 컸다. 심지어 그 성공 가능성도 매우 높았을 것이다. 전두환이 낙마하고 노태우가 물태우 소리를 들으며 샌드백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민간에 진출한 군부 출신 인사들에게 한정된 것이고 군에서 하나회의 영향력은 여전히 절대적이었다. 만약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도 3당 합당을 하지 않고 독재 인사들의 간접적 후계자로 인식 받지 않고 독자적인 힘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역시 군에 대한 숙청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김영삼이 기득권과 붙어 먹은 게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키며 기가 막히는 숙청을 가능케 했다.
그 외에 하나회라는 조직 자체가 뭔가 확실한 대의나 명분으로 꽉 짜인 조직이 아니었다는 점도 도움이 되었다. 군부를 통제할 박정희의 친위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전두환이 군부에 잔류하며 만든 사조직으로서, 전적으로 인맥과 지연으로 맺어진 조직이었다. 일단 핵심 인사에 들어선다면 상당한 정보력과 권력을 쥘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하나회 버프에 따라 빠른 진급과 비리를 저질러도 비호 받는 수준의 버프만 받았고, 거기서 더 아래로 내려가 영관급쯤 되면 인맥과 인맥으로 연결되니 자기가 하나회 소속인지 아닌지도 잘 모를 정도였다. 실제로 숙청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몇몇 영관급 장교들은 자신이 하나회 출신인지 아닌지 잘 몰라서 일단 자백하고 보는 일도 있었다. 개개인이 절대적 충성심과 대의로 무장했다면 우두머리 몇몇 잘라낸다고 제압 당하지 않고 오히려 집단적으로 반발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위쪽부터 재빨리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앞서 말한 바 있지만 하나회 회원들은 죄다 공부를 존나 못했다. 그래도 김두한처럼 공부는 못했지만 권모술수는 매우 뛰어난 사람들이었던 것도 아니고 이 새끼들이 죄다 아양 특화형 인간이라서 아양떠는 것만 천재들인 상병신들로만 골라 모였다. 그랬기에 하나회 구성원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머리가 매우 나빠서 시류를 읽는 흐름에 매우 둔했고 그래서 김영삼이 저렇게 작전을 짤 때까지 가만히 서서 구경이나 하다가 아무 대처를 못하고 죄다 숙청당한 것이다. 당장 동기생 중 꼴등에 거의 가까웠던 전두환이 리더인 것만 봐도 답이 나오는 것이다. 그 이후 이를 절감한 하나회는 후배들 중에서는 그나마 공부를 잘하는 인원들을 섭외해서 하나회로 영입했고는 하나, 그 중에 박희도 같은 병신새끼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멍청한 새끼들만 골라 모아놓은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도 군계일학이라고 한 기수 당 1명 나올까말까하게 똑똑한 놈들도 있긴 했지만 그들은 하나회 내부에서 비주류였다. 대표적으로 김복동이나 이현부 등이 하나회 중에서 머리가 똑똑한 몇 안되는 인원들이다.
그리고 갖가지 명분과 의지를 갖고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와 달리 하나회의 권력에 대한 욕망은 자기들의 보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에 숙청이 쉬워진 점도 있었다. 박정희는 권력에 미쳤고 잔혹한 독재자가 맞지만 자기 나름의 목적과 대의를 갖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라를 끌고 간 인물이었다. 후에 극도로 타락하는 행보를 보면서 카이사르적 독재자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하나회도, 전두환도, 박정희와 같은 절대적 대의나 권력에 대한 욕망은 갖고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보신을 위해 움직였을 뿐, 그나마 전두환이 박정희 이후 권력의 공백을 캐치하고 독재자의 길을 걸었으나 전두환이 빠진 하나회는 더더욱 군내 요직을 차지하고 금전적, 정치적 이득만 취하면 되는, 찌질한 조직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하나회의 성향은 6월 항쟁 당시 전두환이 권력을 잃어갈 때 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며 친위 쿠데타를 돕기보다는 당장 자신들을 개박살 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의 눈치를 보며 뒤로 빼던 모습을 보면 파악하기 쉽다. 이후에도 노태우가 대통령 하고 자기들은 여전히 군내 요직을 장악하고 잘 먹고 잘살고 있었으니까 굳이 군을 넘어서서 나라까지 장악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 하나회를 생각보다 쉽게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회와 유사한 군대 사조직들[편집]
군에는 당연히 사조직으로 하나회만 있던 게 아니었다. 만나회, 알자회, 나눔회, ROTC 모임 등 다양한 사조직이 존재했다. 특히 ROTC는 각 대학별로 사조직화되어 있는 상태이다. 심지어 하나회에 대항하려고 만든 청죽회라는 사조직도 있었다.
청죽회는 존나 불쌍한 게 하나회에 대항하려고 만들었는데 그 때문에 군부독재정권 당시에는 박정희의 탄압을 당하고 청죽회 회원을 중령으로 강제 예편시킨 뒤 나이지리아주재 한국 대사로 유배보내 버렸다. 그런 주제에 사조직이라는 이유로 김영삼은 또 하나회를 싹쓸이 할 때 청죽회도 같이 싹쓸이해버렸다.
물론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전대갈의 하나회가 군내 사조직 중 최강 라인이었고, 실제로 김영삼이 군내 하나회를 박살 내고 하나회와 연관 없는 놈들로만 장성들을 구성하려고 막상 보니까 남아있는 현직 장성 중에서 하나회와 연관이 없는 놈이 전혀 없는 수준이라서 결국 하다하다 못해 하나회 핵심 인사였지만 자기랑 같은 학교 동문인 놈을 요직에 앉혔을 정도였다. 물론 요직에 앉은 이 새끼는 누가 하나회 출신 아니랄까 나중에 김영삼의 행보에 반발하며 척을 진다.
일단 하나회 자체는 군에서 축출 당한 건 팩트다. 다만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사회적으로 매장 당한 건 아니기에 정치인으로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이고, 재향군인회 같은, 제대 후 사조직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배불리 먹는 놈들도 많다. 위에 언급했듯이 쿠데타를 일으킬 힘을 빼앗았을 뿐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바보는 아닌지라 하나회가 어떤 새끼들인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선거 나오면 표를 안줬다. 하나회 출신 인사들도 국회의원이 되려고 선거에 줄창지게는 나오는데 계속 낙선당했다. 대표적으로 박정희의 세자인 전두환의 세자인 박희도나 조선 역사상 최악의 똥별의 직계후손인 이진삼 등이 있다. 결국 2021년 현재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무슨무슨 협회 회장 정도가 고작이다. 박희도 역시 '대한민국불교도총연합 회장'이 유일한 현직 직함이다.
일반인들이 오해하는 내용 중에 알자회가 하나회의 적통 후계라는 것인데, 알자회는 하나회와 연관이 거의 없는 사조직이다. 실제로 하나회가 짱짱하게 잘 나가던 시절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고 하나회가 김영삼에게 뚝배기 깨지던 시절에는 기껏 영관급 장교들로 구성된 인원수도 몇 안되는, 초소형 친목회 수준이라서 어그로를 끌지 않았다. 하지만 호랑이 없는 숲에서 여우 새끼가 대장 한다고 하나회가 개박살 나니까 다른 사조직들이 금세 덩치를 불렸고, 그중에서 알자회가 빠르게 세를 불려서 2010년대에 이르러선 군내 요직을 차지하고 쿠데타 모의에 밥 숟가락 얹을 정도로 성장했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알자회와 2017년 계엄령 모의를 참고.
이젠 여군끼리 사조직만든다
하나회와 유사한 사조직들[편집]
각주
- ↑ 사실 이들은 제2공화국 시절 대한민국이 진짜로 공산화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던 것이었고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된 60년대 중후반(?)부터는 반인반신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 ↑ 보직도 ROTC 훈육장교가 바로 대대장이 되었다.
- ↑ 이로 인해 이후락은 박정희의 눈밖에 나서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켰다.
- ↑ 당시 국방부 장관도 김영삼의 철통 같은 보안 유지 덕분에 숙청이 시작되는 날까지 아무것도 모를 정도였다. 심지어 하나회와 관계없는 사람이었고 하나회에 뿌리 깊은 적대감을 안고 있는, 명백한 아군이었는데.
- ↑ 당시 무신의 난을 들먹이며 사실상 협박을 하는 하나회의 반응을 접한 김영삼이 남긴 말이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 불도저 같았던 김영삼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발언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