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조무위키
틀[편집]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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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은 서울대 교수가 아닌 매국노 개새끼, 친일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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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나라를 다시 국밥에 말아드실 분들 | |||||
일뽕 죄국주의 | |||||
서인전대 조무사레인저 초기맴버 윤서인 맛서인 좌서인 법서인 한서인 숲서인 신전사 글서인 윾서인 야서인 개서인 영서인 쮸서인 번외전사 프서인 역서인 군서인 평서인 기서인 틀서인 불서인 설서인 털서인 램서인 페서인 웹서인 근서인
반일주의를 비판하면서 가장 극단적인 반일주의자를 사랑하는 틀딱. 서울대 전 경제학 교수였으며 현재 국회의원 진출만 안 했을 뿐, 중증 정치병에 걸린 런승만 학당의 교주이다.
전형적인 뉴라이트 학파이다. 예전에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가 80년대에 전향했다. 사실 뉴라이트 중에는 이런 식으로 좌파에서 전향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옛날엔 학자로서 일리 있는 말 좀 많이 했다가 언제부터인지 정치에 흑화하며 추해질 대로 추해진 케이스이다. 한 마디로 학계의 최지룡이라 할 법하다.
원래 안 이랬다[편집]
자본주의 맹아론에 치명타를 준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후기 사회경제사, 근대 조선 수리조합연구,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등 명저를 저술하였으며, 이 저서들을 통해 국뽕에 사로잡혀 있던 기존의 역사학계의 통설을 깨고 통계학적 방법을 역사학에 도입한 공을 세웠다. 이때 이영훈이 이렇게 추해질 줄 누가 알았겠냐?
여기까지만 했어도 됐으나....
지랄병 시작[편집]
하지만 뉴라이트로서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과거 학자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정치 활동을 주업으로, 학술 활동을 부업으로 삼는 일종의 '정치교수'로 각성한다.
자본주의 맹아론 같은 국뽕이 싫다고, 극우가 되어서 지랄병 도지는 건 애초에 이 인간 그릇이 그것밖에 안된다는 것이고, 학자일 때는 숨겨뒀던 본성이 나왔을 뿐.
이하는 그의 주옺같은 주장들.
이승만 센세를 찬양해야 하무니다![편집]
위는 2011년에 기고한 글로, 이영훈 교수의 지극한 이승만 사랑이 잘 나타난다. 내용을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요약하면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이므로 이승만이 없으면 대한민국도 없다. 그러므로 이승만을 찬양하자능!!! 이승만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분열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능!!!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내용은 그냥 평범한 뉴데일리이지만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국가의 지도자와 가정의 아버지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여기가 무슨 북한도 아니고, 이승만 어버이 수령님을 무한히 찬양해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리고 국민들로부터 어버이 소리를 들으려면 어버이 역할을 제대로 해야 당연한 것 아닌가?
미국의 국부 워싱턴, 터키의 국부 아타튀르크, 핀란드의 국부 민네르하임이 적이 쳐들어온다고 부하고 뭐고 내팽개치고 도망 다니는 인간들이었다면 미국, 터키, 핀란드라는 나라는 지도 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은 군대의 지휘관도 아니고, 도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자국민을 보호하고, 어쩔 수 없이 수도를 버리고 피난을 가야 하더라도 기본적인 정부 조직을 보존하면서 피난을 가는 것이 정부의 수장으로써 최소한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런승만이 얼마나 스텔스 능력이 뛰어났는지,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신익희나 서울 시장마저 통수를 맞았다. 참고로 그 서울 시장은 피난도 못 가고 납북 당했다. 런승만이 모범을 보이자, 서울에 남겨진 국회의장 이하 고관들은 알아서 각자 생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안재홍, 조소앙 같은 국회의원들은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북한군에 납치를 당하고 말았다. 헬조선에서 전쟁 나면 높으신 분들은 다 도망간다고 욕하지만, 이때는 이승런의 스텔스 능력 덕분에 진짜로 높으신 분들조차도 도망도 못 갈 정도의 막장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은 반일감정 엄청나게 강했다. 전쟁 중에 일본군이 개입하면 북한군보다 일본군을 먼저 상대하겠다고 장담하던 양반이다.
국정 교과서 짜응 다이스키!![편집]
이영훈 교수는 국정교과서 논란에서 국정교과서 지지하는 세력이었다.
현 국사학계의 이념이 민중사관이라고 지적하면서, 국정교과서 논쟁을 자유사관과 민중사관의 투쟁이라고 규정했다. 그가 기존 국사학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대한민국 현대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명확하게 드러내는 글이다. 이 글에서 기존 교과서들이 4.19를 민족, 민주 혁명의 출발로 '미화'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승만 빠돌이인 이 인간 성향을 생각하면 4.19는 폭동이라고 주장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근데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발행하는 교과서들은 (심지어는 교학사 교과서도) 전부 4.19를 '미화'하고 있다.
현행 헌법 전문에서도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되어 있고, 교육부의 집필 기준도 당연히 여기에 맞춰져 있으므로 '미화'를 안 하고 싶어도 할 수밖에 없다.
얘가 원하는 대로 4.19를 '미화'하지 않는 국정교과서를 만들어 버린다면, 그거야말로 반헌법적인 교과서가 된다. 물론 이런 내용의 책을 이영훈 교수의 이름으로 출판하는 것 자체야 언론, 출판의 자유에 따라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4.19를 부정하는 내용을 국정교과서에 집어넣는 것은 국가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얘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하는데, 정상적인 자유주의자라고 하면 국정교과서에 당연히 반대해야 한다. 자유주의의 국가 미국에서는 인정제(민간에서 책을 발행하면, 정부가 이걸 교과서로 써도 된다고 인정하는 형식)를 채택하고 있는데, 거꾸로 선택권을 없애고 검정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돌려놓겠다는 것은 자유주의적 발상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놈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기존 교과서의 좌편향 문제가 심각하다고 해도 현행 검정 교과서 체제 하에서는 교육부가 이에 대해 수정 명령을 내릴 수도 있고, 수정 명령에 응하지 않는다면 검정을 취소할 수도 있다. 게다가 현행 교과서들은 이미 2013년에 교육부 지침에 따라 수정한 것들이다.
아니 씨발 당시 빨갱이 국가인 베트남도 국정 교과서 없애려고 했는데 이 새끼는 빨갱이 국가에서나 할 짓을 옹호하냐? 그때 정부는 교과서가 좌편향 될 때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나?
일본의 산림통제정책은 훌륭해![편집]
[https://www.youtube.com/watch?v=
이 역사 강연 동영상에서 이영훈의 주장에는 커다란 오류를 두 가지 찾을 수 있는데, 하나는 조선은 국가에 의한 산림벌채 금지령이라는 후진적 방법을 써서 산림 파괴를 막지 못했고, 일본은 산림에 소유권을 부여함으로써 산림을 보전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해당 주장은 이 그래프 하나로 반박할 수 있는데, 일본에서도 광범위한 산림 파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산림면적이 거의 50%선으로 떨어진다.) 에도 막부가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에 의한 산림 파괴는 막을 수가 없었고, 이러한 경향은 통제력이 약화되는 말기가 될수록 더 심해졌다. 게다가 일본의 산림통제정책은 조선보다도 더 강력해서 막부, 번(지방정부)에서 지정한 산에서 나무 한 그루를 베면 모가지 하나가 날아갈 정도였다. 오히려 조선이 금지령을 강력하게 하지 않은 탓에 조선의 삼림 파괴가 더 심각했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또한 한반도와 일본의 수목의 차이가 존재하고(조선에서 주로 자라는 수종은 단단하지만 생육 기간이 긴 종이고, 일본에선 조선보다 단단함은 떨어지지만 생육 기간이 더 짧은 종이라고 한다.) 해양성 기후 성격이 강한 일본과 달리 조선은 대륙성 기후의 영향도 있고 해서 훨씬 춥다. 이해가 안 된다면, 도코와 부산이 거의 같은 위도에 있고 서울은 바르셀로나나 아테네보다 남쪽에 있음을 생각해보라. 그 와중에 조선 후기는 그놈의 소빙하기까지 걸쳐서 어떻게든 연료를 때워서 추위를 극복할 수밖에 없었는데, 전근대 시절 가장 흔한 연료감은 어디 있겠는가?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삼림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삼림을 보존하기 위해 도끼가 아닌 조선 낫으로 삭정, 볏짚 같은 것들을 긁어모아 땔감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를 대체할 석탄이 있겠지만 한반도의 석탄은 땅속 깊숙이 박혀있는 무연탄이라는 거... 당시 기술로는 채굴 및 이용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반대로 일본은? 그 동네는 겨울 추위보다는 여름 더위와 습도에 더 신경 써야 할 판국이었다. 게다가 화산과 지진의 여파로 땔감없이 자동적으로 데워지는 온천이 조선보다 상대적으로 풍부했다.
에도 시대가 끝나고 메이지 정부가 황폐화된 산림을 회복하기 위해 쓴 정책도 바로 벌채금지정책이었다.(사유림에서 나무를 베는 것도 관청의 허가가 필요했다.) 이영훈의 논리대로면 조선에서 실패한 금지령 정책을 메이지 정부도 똑같이 하고 있는 셈이다.
해당 강연에서는 조선 말기의 사진을 가져와서 조선의 삼림 파괴가 심각했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런 식이면 일본의 민둥산 사진들도 얼마든지 웹 상에서 구할 수 있다. 물론 민둥산 천지가 되도록 방치한 조선도 잘난 게 없지만, 조선의 삼림 파괴가 조선의 특수한 후진성 때문이라는 것은 에도 막부의 예로도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
조선은 찢어지게 가난했음![편집]
조선의 재정이 일본의 3~40분의 1이라고 주장하는데, 역사학자, 특히 경제사학자로써 전혀 공부가 안 된 모습을 보여준다.
일단 일본과 조선의 도량형을 비교해보면 조선의 1섬은 85.9리터, 일본의 1섬은 180.4리터에 해당한다. 대충 조선 2섬 = 일본 1섬으로 이해하면 된다.
얘는 일본의 석고제에 대해 완전히 잘못 이해했다. 석고제에서 몇만 석, 몇백만 석 하는 것은 재정 수입이 아니라 그 지역의 총 생산량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100만 석짜리 영지라고 한다면 100만 석의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영지라는 게 아니라, 그 지역의 생산량이 100만 석이라는 뜻이다. 만약 진짜로 100만 석의 세금을 걷어버린다면 그 날로 영지민들은 전부 다 굶어죽든지 아니면 봉기해서 영주의 목을 쳤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철저한 지방 분권 시스템이었다. 지방 영주들은 막부에게 군사력을 제공할 의무는 있었지만, 막부에 세금 바칠 의무는 없었다.(막부 살림이 어려워지자 임시로 징수한 적은 있다.) 에도 막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도쿠가와 직할령 + 하타모토 영지 총합 800만 석 뿐이었고, 이걸 다 세금으로 걷을 수 없으니 30%의 세율을 적용하면 240만 석이 된다.(일본 자료에서는 20~28%로 되어 있지만, 계산하기 편하게 30%로 계산했다.)
조선과 일본의 중앙정부끼리만 비교하면 100만 석 vs 240만 석으로, 이영훈 교수가 말하는 3~40배 격차는 어디에도 없다. 더군다나 조선의 중앙 정부에서도 단일하게 재정이 운용되지 않았고 오늘날 기획재정부를 담당한 호조 재정보다 대동법으로 거둔 대동미를 운용하는 선혜청이 그 규모가 컸다고 하고, 조선 왕실의 사유재산인 내장원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그 규모와 운용 방식이 다 밝혀진 것이 아니라고 하니, 이런 것들도 고려해야 할 건데, 보통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고 호조 재정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이런 점들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영훈은 조선의 중앙 정부가 일본의 소영주 수준이라고 말했지만, 50만 석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소영주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인 것은 빼놓고서라도, 임진왜란 이전 일본이 파악한 조선의 경제력이 1200만 석이라는(실제 선조 시기 쌀 생산량을 추정해 보면 1100~1200만 석이므로 어느 정도는 정확한 계산인 것으로 보인다)것을 고려해 보면 조선의 왕은 600만 석을 가진 영주와 동등한 경제력을 가진 셈이다.
일본의 영주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으며, 에도막부의 쇼군조차 하타모토들의 영지를 빼면 400만 석 정도다. 도대체 3~40배라는 것은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 수 있는 걸까? 혹시 석고 2000만 석을 재정 수입으로 착각했다면 이해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일본의 중, 근세 경제사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했다는 인증을 한 셈이다.
그리고 조선은 기근 등을 대비해서 18세기 기준으로 1천만 석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환곡을 저장해 두었다. 일본 석 단위로 환산하면 500만 석인 셈인데, 이영훈 교수 말대로 조선이 일본의 30~40 분의 1 수준의 재정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식량을 저장할 수 있었단 말인가? 사실 18세기까지 갈 것도 없이 15세기 중반부터 이미 기근 등을 대비해서 엄청난 양의 식량을 비축해두었던 게 조선이다. 세종 28년 때의 구휼 기록에 따르면 전년도에 흉년이 들어 의창에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준 식량이 273만 8천여 석이고 이렇게 나누어준 뒤 남은 미곡이 591만 2천여 석이었다. 즉 15세기 중반부터 이미 8~900만 석의 식량을 기근 등을 대비해 비축해두고 있었다는 얘기다. 일본의 30~40분의 1 수준의 재정이었으면 가능했을 리가 없다.
위안부는 공창이지 성노예가 아니무니다!![편집]
이 인간이 가장 유명한 업적이 바로 이 주장인데 토론회에 나와서 이 말 했다가 연구실에 계란 세례가 날아들어 직원들과 다함께 통째로 계란후라이 될 뻔하고 사과했다.
사실 오마이에서 왜곡한 거고 자기는 공창이라고 생각한 적 없고 위안부 할머니들은 피해자임을 인지하고 있다고 한다....고 했는데
이후 내는 저서에서 다시 토론회에서 한 것으로 알려진 주장과 정확히 똑같은 내용을 집필하여 위안부 공창론을 들이댄 것을 보면 그 토론회에서 분위기가 어땠든지 본인 본심은 그게 맞았던 건 확실하다.
화랑세기 옹호[편집]
이제 이덕일 선생과 무 슨차 이?
세종대왕 비판[편집]
세종대왕이 성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웃기는 건 이 책은 한글로 썼다.
당연히 개지랄이고 설령 나라를 흔들었더라도 한글 창제한 업적 하나로 전세계의 군주 다 쳐바른다.
세종이 조선의 인구의 절반을 노비로 만들었다고 깐다. 이건 상식적으로 진짜 말이 안 되는 거다. 조선 인구 절반이 노비면 조선은 일본에 먹히기 전에 자멸했다. 팩트는 이영훈 본인이 노비와 노예는 다른 거라고 했다.
사실 이영훈이 세종 시대의 노비 비율을 계산한 방식을 자세히 보면 통계적으로 오류가 심각한 계산이다. 자신의 책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서 15~16세기 한양 양반 관료는 아무리 미관말직이라 하더라도 노비를 100인 정도는 거느렸다고 주장하며 이 주장을 근거로 비율을 계산했다. 17세기 초반 단성호적을 보면 이 주장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06년의 단성호적을 보면 종8품 훈련봉사 권설은 노비 5인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다른 하급 관리들도 많아야 수십인 수준이었다. 참고로 이 지역은 전란 때문에 노비 비율이 크게 높아졌던 17세기 조선에서도 노비 비율이 심하게 높게 나오던 지역이다. 다른 지역보다 노비 비율이 심하게 높던 단성에서도 미관말직의 양반관료가 100인씩 노비를 거느리고 다니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데 15~16세기엔 미관말직의 양반관료도 100인씩 노비를 거느리고 다녔다는 주장을 전제로 비율 계산을 한 것은 심각한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품계가 올라갈수록 노비 수도 많아졌다고 주장하는데 같은 품계여도 가문, 출신 계층에 따라 경제적 사정이 천차만별일 수 있음을 간과한 주장이다. 당시 세종 때의 과거 합격자 분포를 보면 1/3이 비양반 계층 출신이었다. 양반이 아닌 평민 출신의 관료가 상속 받는 재산과 대대로 양반이었던 양반 출신의 관료가 상속 받는 재산이 같겠는가? 당연히 다르다.
여기에 성종 15년에 한명회가 도망 노비의 수가 많다고 주장하며 도망 노비의 수가 100만이라고 말한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후 공노비의 도망률과 당시 추정인구, 그리고 도망 노비가 100만이었다는 발언을 근거로 세조 때의 노비 비율이 전체 인구의 40%였으며 이렇게 노비 비율이 폭증한 원인이 세종의 정책이라는 주장도 했다. 얼핏 들으면 일리 있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당대의 정치적 발언에서 등장하는 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당시의 인구 구성을 추정하는 근거로 삼는 건 매우 잘못된 접근법이다. 왜냐면 당대 신료들은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수를 부풀려서 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종 10년 11월 29일 기사엔 장령 벼슬을 가진 구치곤이 승려의 수가 많아 군사력이 약화되는 것을 지적하며 호패를 받은 승려의 수가 40여만 명이라는 발언을 했으며 성종 3년엔 병조에서 백정의 수가 많은 것을 지적하며 백정의 수가 보통 백성의 수의 1/3~1/4에 이른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 예종 1년 6월 29일 예조판서 공성지가 조선의 군사가 백만이라고 발언하는 기록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발언들에서 나오는 수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성종 재위 기간의 조선은 15세 이상 남성 승려의 수만 40만에 이르는 불교 국가였으며 전체 인구의 최소 20%가 백정인 도축업에 특화된 국가였고 동시에 백만의 대군을 보유한 병영 국가였다는, 병신 같은 결론이 나온다. 참고로 백정의 수의 경우 성종 3년의 군축 기사에서 수를 어느 정도 추측해볼 수 있는데 이 기사에 따르면 하삼도 군적에 있던 보인에서 전정, 백정, 재인, 장인들을 빼자 정군의 수가 9천 7백이 줄어들었다. 당시 정군 한 명당 붙던 보인들의 수를 감안해보면 저기서 빠진 수가 다 백정이라고 가정하더라도 하삼도의 15~60세 남성 백정의 수는 3만 수준이다. 한 마디로 병조에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과장을 한 것이다. 승려 수의 경우 세조 때의 도첩 발급 기록을 보면 당시 호적에 등재되어 있던 승려의 수는 대략 8만 정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신료들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하는 발언에선 수를 과장해서 말하는게 일반적이였으며 이런 발언들에서 나오는 수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심각한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 안 하고 과장된 수를 근거로 계산을 하면 당연히 과장된 비율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종 재위 기간에 고려 시대에 비해 노비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고 주장하며 노비종모법의 시행과 양천교혼의 방임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는데, 우선 노비종모법의 경우 애초에 고려 초기부터 유지되던 법이었고, 세종이 노비종부법에서 노비종모법으로 바꿀 때 노비종모법 시행 이전에 결혼해서 낳은 아이들은 모두 노비종부법을 적용해서 이는 고려시대에 비해 노비가 늘어나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없다. 양천교혼의 경우 노비종부법을 통해 양인 수를 늘리고자 할 때만 허용했고 노비종모법으로 제도를 바꾼 후 바로 불법화시켜서 이 역시 노비 수가 증가하는 원인이 된다고 보기엔 어렵다. 무엇보다도 세종 재위 기간에 노비 수가 줄어들었다는 기록은 많아도 사노비가 늘어나고 양민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식의 기록은 아예 없다. 얘 주장대로 세종 재위 기간에 노비가 늘어났다면 왜 당시 기록엔 노비가 늘어났다는 기록이 없고 반대로 노비수가 줄어들어서 신료들이 불만을 나타내는 기록들만 나오는지 의문이다.
슬슬 얘한테서도 그 코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진다. 덕분에 일뽕들은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 특히 최근에 노비 이슈로 세종대왕의 과오라며 나대는 새끼는 백퍼 이영훈 책을 무슨 마오쩌둥 어록마냥 신성시하는 식귀병, 식근탈레반이라 보면 된다.
이 글 읽고 팩폭맞고 풀발한 일뽕새끼들의 찬란한 쪽들거림과 함께 반박의 탈을 쓴 온갖 개지랄이 달리겠지만 걸쭉한 뻐큐와 함께 박제해버리도록 하자.
반일 종족주의 출간[편집]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도 이 책에 대해서 회의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1]
기타[편집]
[2]사실 이영훈 교수에게는 아베 같은 거물급 팬이 있다고 하기도 한다.
김부겸의 아내 이유미 씨의 친오빠가 바로 이영훈이다.[1]
각주
- ↑ "김부겸 아내 "친오빠 이영훈 때문에 남편 곤혹, 눈물 흐른다"[전문]", 《조선일보》, 2020년 8월 4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