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스기 카게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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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를 이끌었던 대형 다이묘이자 요네자와 번의 초대 번주.
모친은 그 유명한 우에스기 겐신의 누나였고 부친은 에치고 사카도 성의 성주인 나가오 마사카게였다. 본래는 그냥 마사카게의 자식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나 뜬금없이 부친이 급사해버린 관계로, 외숙부인 우에스기 겐신이 양자로써 거둬들였다.
겐신에게는 카게카츠 외에도 우에스기 가게토라라는 호조 출신의 양자가 있었다. 카게카츠에게 가게토라는 가독 상속의 라이벌이었는데 1578년에 겐신이 아무 후계자 지목도 없이 뒤져버리자 결국 카게카츠 VS 가게토라의 후계 상속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세간에서는 이를 흔히들 오다테의 난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겐신이 누굴 후계자로 지목하려고 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일각에서는 카게카츠를 지목하려고 했다는 소리를 하고 있고 반대쪽에서는 가게토라가 훨씬 유력하다는 설을 내놓고 있다. 카게카츠 유력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겐신이 카게카츠에게 자기 생전의 관직인 단조쇼히츠를 물려준 것, 가신들이 겐신과 유사한 호칭으로 카게카츠를 불렀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는데, 하여튼, 어느 쪽이든 분명 확실한건 겐신이 아무 소리 안 하고 죽어버렸다는 것뿐이다.
가독 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하자 우에스기의 가신들은 카게카츠 파, 가게토라 파로 나뉘어 싸우기 시작했다. 일단 초중반 쯤에는 가게토라가 카게카츠보다 우세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등 뒤에 다케다와 호조를 업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카게카츠가 카스가야마의 혼마루를 점거하고 있어 오다테에 주둔하는 가게토라보다 유리했던건 사실이지만 진짜 문제는 가게토라를 지원하는 다케다 가츠요리의 원군이었다. 카게카츠는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한가지 계책을 냈다. 다케다가 가게토라의 편에 서서 불리하다면 다케다를 가게토라로부터 떼어내면 되지 않는가 하는 부분. 카스가야마의 황금으로 가츠요리를 매수하는 각. 황금도 받고 영토 할양까지 약속받은 가츠요리는 철수하는 각 ㅇㅈ?
사실 가츠요리는 이것 저것 다 받고도 최대한 양쪽 모두를 진정시키려 노력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꾸 깐족거리는 바람에 철군할 수 밖에 없었다. 가츠요리가 떠나간 가게토라의 포지션은 매우 위태해졌고 카게카츠를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호조가 에치고에 난입해오기 전에 어떻게든 이 사건을 끝내야했던 것이다. 외세가 떠나간 Only 카게카츠 VS 가게토라의 싸움은 카게카츠의 승리로 끝났다.
내전이 끝난 후 우에스기는 병신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가신들의 분열과 더불어 내부에서의 반란, 오다한테 쳐맞음, 호조한테 쳐맞음이 겹치며 우에스기는 더욱 약해져만 갔다. 다행히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에서 살아돌아오지 못하며 위기를 넘기게 되지만 다음 권력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한테는 도저히 개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카게카츠는 이럴 바에야 차라리 히데요시의 가랑이 사이를 기자고 생각했고 아예 오사카까지 가서 복종을 맹세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매우 옳은 결정이었다.
카게카츠는 히데요시가 죽고 새로운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평범하게 잘 살았다. 호조 정벌에도 나섰고 히데요시 정권의 높은 위치인 대로의 자리에까지도 올랐다. 에치고에서 아이즈로 강제 이주를 당하기도 했지만 영지는 90만에서 120만석으로 증가되기도 했다. 그렇게 살던 카게카츠였는데 어느 날 히데요시가 뒤져서 지옥으로 꺼지고 이에야스가 새 권력자로 떠오르더니만 갑자기 이런 요구가 들어왔다. 시발아 왜 성 쌓음? 빨리 상경해서 해명해라.
하지만 카게카츠는 해명하러 갈 계획이 전혀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나오에 카네츠구를 시켜 나오에 장이라는 도발 문서를 쓰게 하고 도쿠가와에 전달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매우 잘못된 결정이었다. 이에야스는 워낙 거대 다이묘인지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차 그 앞에서는 깨갱 하면서 꼬리를 내렸던 인물이고 진짜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항복시키기 위해서 정말 온갖 똥꼬쇼를 해야만 했다. 엄마 바치고 딴데 시집간 여동생 강제로 이혼시켜다가 바치는 등 눈물겨운 대똥꼬쇼를 해서야 굴복시킨 상대가 이에야스인데 도저히 개길 엄두가 나지 않는 상대가 온갖 똥꼬쇼를 한 상대에게 개겼다는 건 앞과 뒤를 전혀 못맞춘 행동이다. 월드컵으로 따지자면 엘살바도르가 미국도 못이기면서 아르헨티나에게 개기는 꼴이다. 덕분에 나오에 장을 읽은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씨발새끼를 외치며 아이즈 정벌군을 출동시켰다. 하지만 진군하는 도중에 중앙에서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도쿠가와에 반기를 들으며 거병했고 이에야스는 하는 수 없이 미츠나리 정벌을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물론 이에야스가 공격을 안 했다고 해서 카게카츠의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동부의 다테 마사무네와 모가미 요시아키는 이에야스의 지시에 따라 우에스기를 공격했고 카게카츠는 이들의 협공에 맞서 전면적인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병신 같은 이시다 미츠나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쳐발리는 바람에 우에스기의 미래는 좆망으로 결정되었다. 서군의 패전 소식을 들은 우에스기는 이에야스에게 항복의사를 전달, 결과적으로는 이에야스를 찾아가 공식 사죄를 하게 되었고 지배 영토는 아이즈에서 아이즈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요네자와로 추방당하면서 120만에서 30만으로 감축되었다. 그러나 감축을 당하고서도 가신단을 정리하지 않아 훗날 우에스기에 재정난을 불러왔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거물 다이묘가 아닌 일반 다이묘로 살았다. 도쿠가와에서 시키는대로 이것저것 다 하고 이에야스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도 섬기면서 살다가 1623년 요네자와에서 생을 마감했다.
전국 다이묘로서의 삶은 불행했지만, 대중적으로는 능력을 저평가받은 것에 비해 인망은 있었던 듯.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영지를 대폭 삭감당했는데도 대부분의 가신들이 카게카츠 밑에 남았고, 어쩔 수 없이 떠난 가신들은 자기 가산을 "꾸어준다"는 명목으로 헌상한 뒤 차용증을 없애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