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모가미 요시아키

조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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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미의 11대 당주이자 야마가타 번의 초대 번주. 군담에서는 '데와의 여우'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아버지였던 모가미 요시모리는 다테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세력의 확장도 시도했지만 성과가 생각보다 시원찮은 편이었다. 요시아키는 이런 요시모리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문의 확대라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지게 되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요시아키는 고작 5세의 나이에 12세 정도로 보일 만큼 삭아보이는 외모, 거대한 몸집, 그리고 무지막지한 괴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과장이 많이 섞인게 보이지만 여하튼 요시아키의 발육이 빠르긴 했던듯 하다. 성인이 되어서는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이름을 받아 요시아키로 이름을 개명했다. 아명은 하쿠주마루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약 4년 뒤에는 여동생인 요시히메가 다테가로 시집을 갔다. 요시히메가 다테로 간 사건은 나름 대형 사건으로 볼 수 있는데 이유는 훗날 다테 마사무네를 낳게 되는게 요시히메이기 때문이다.

요시아키는 힘이 졸라 쎄고 튼튼하며 듬직했지만 아빠인 요시모리와 사이가 나빴다. 심지어는 차남인 요시토키를 훨씬 이뻐하며 장남 대신 가독을 물려주려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한다. 요시아키는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맞섰고 결국은 우지이에 사다나오(중신)가 나서서 중재를 하며 일을 마무리시켰다. 그렇게 승계 문제는 끝나는가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지이에 사다나오가 사망하는 바람에 상속전이 다시 발발했다. 가신단은 분열했고 요시모리의 이름을 내건 다테 테루무네의 군대가 모가미로 출격, 요시아키는 그야말로 불리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전알못 병신이 아니었던 요시아키는 다테를 필두로 한 적의 공격을 죄다 튕겨내버렸고 다테는 무력이 안 먹힌다는걸 깨닫고서야 화해와 평화라는 발상을 떠올리게 되었다. 모가미가 완벽히 독립을 이룬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요시모리와 요시아키는 분쟁을 끝내고 화해했지만 이 와중 후계 싸움의 장본인이었던 요시토키는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끊임없이 주변을 공격하며 세력권을 넓혀갔다. 머리가 똑똑했던 덕분에 책략을 많이 사용했다. 내통을 시도, 속여서 유인, 공격해서 자살 유도, 회유 등의 방법을 쓴 게 자주 확인된다. 각종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쇼나이에까지 진출한 요시아키지만 모든 일이 다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혼조(우에스기 가신)군을 공격했다가 대패하고 모처럼 지배한 성들도 적들에게 빼앗겨버리면서 쇼나이를 내주게 됐으니 순탄하긴 커녕 제대로 꼬인 것. 이 당시 천하는 히데요시의 손에 들어가있었는데 쇼나이의 지배를 둘러싸고 요시아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통해 교섭하고 우에스기는 이시다 미츠나리를 통해 교섭을 시도했다. 그런데 졷같게도 쇼나이 지방은 우에스기의 소유로 공인되어버렸다. 요시아키는 입장에선 씨발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마무리된걸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요시아키는 히데요시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 원숭이 새끼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식들을 팔아먹었는데 3남인 모가미 요시치카를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보냈고 히데요시의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에게는 딸인 코마히메를 시집보냈다. 사실, 히데츠구가 코마히메의 외모에 반해 마누라로 데려가고 싶다는 제안을 했을때 요시아키는 존나 반대했었다. 하지만 히데츠구가 몇번이고 요구를 거듭했고 상대가 그 히데요시 일가이니 도저히 거부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다못해 코마히메가 아직 어리니 다 성장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빌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1959년,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모반 혐의를 받아 할복 자살을 하자 코마히메는 아직 정식 측실이 아님에도 히데츠구의 측실이라는 이유만으로 목이 잘리게 되었다. 요시아키는 코마히메가 정식 측실도 아니고, 죄도 없고, 여자를 죽이는 것은 관례도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탄원 활동을 했으나 기어이 딸의 죽음을 막을 순 없었다. 코마히메가 처형당한 후 요시아키는 비탄에 빠져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불합리한 피해를 당한건 요시아키였지만 히데요시는 요시아키에게 히데츠구 모반 가담의 의혹을 적용하며 근신 처분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 사건 이후 요시아키는 완전히 친이에야스파로 돌아서게 됐으며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다과회에 초대되자 자발적으로 달려가 경호를 맡았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뒤진 후 이에야스의 야욕이 표면화 되자 요시아키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토벌에 참여했다. 아이즈 정벌이 본격화되려던 참에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하며 서쪽에서 전란의 Boom이 일자 이에야스는 정벌을 중지하고 에도로 돌아갔다. 대신 요시아키, 다테 마사무네, 유키 히데야스가 우에스기에 대한 견제 역할을 맡았다. 물론 우에스기는 상당히 거대했기 때문에 요시아키 입장에서는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이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요시아키는 우에스기와 화해를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씨발 이렇게 된거 걍 싸우자라는 심정으로 맞붙었다. 본래 모가미군은 7천 정도 되었으나 오노데라 요시미치를 견제하기 위해 4천을 빼낸터라 운용 가능한 병력은 사실상 3천명. 이에 반해 우에스기측은 나오에 카네츠구가 이끄는 약 2만의 병력이 있었는데 막상 붙고보니 모가미가 의외로 잘싸워냈다.

막상 세키가하라 전투가 동군의 승리로 끝나자 우에스기는 황급히 요네자와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요시아키는 이 씨발새끼들 지금까지의 치욕을 갚아줄 차례다 하고 존나 추격했다가 투구에 총알을 맞고 바닥을 굴렀다. 비록 카네츠구의 모가지를 따진 못했지만 쇼나이 지방, 유리 군, 요코테 성을 함락시긴건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이에야스는 요시아키의 공로를 인정하여 57만석의 영지를 인정해주었고 이로써 데와 야마가타 번이 탄생하게 되었다. 요시아키는 염원하던 쇼나이를 손에 넣었으니 이제 마음껏 훈제 연어를 먹을 수 있게 됐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내정에 상당히 신경을 써 많은 정책을 펼쳤으며 영민들에게는 관대한 정치를 베풀었다. 가신을 과도하게 후대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요시아키는 지배자로써 상당히 이상적인 인물이었던듯 하다.

1603년에는 장남이었던 요시야스가 암살 당함에 따라 후계자 자리가 다음 아들인 이에치카에게로 건네졌다. 그런데 나중에 이에치카가 일찍 죽었다는걸 생각하면 요시아키는 참 자식 복이 없는 인간이던듯. 11년 뒤 요시아키는 야마가타 성에 드러누우며 죽음을 맞이했다. 향년 6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