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안승민

조무위키

요즘 몇몇 사람들이 제 조국을 헬조선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모를 겁니다. 나라없는 백성의 설움을.

 
— 문흥 안승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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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고 있는 인물은 MLB의 영웅입니다.
놀랍게도 미국에선 그/그녀를 보기 위한 인파로 교통이 마비되곤 합니다.
본 인물을 욕보일 시 많은 양키성님들의 저주로 제 명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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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일본에선 그/그녀를 보기 위한 인파로 교통이 마비되곤 합니다.
본 인물을 욕보일 시 많은 느프브 팬들의 저주로 제 명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파일:꼴데의 미래.png
이 문서의 인물은 시카고 컵스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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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리글리 필드에서는 그를 보기 위한 인파로 교통이 마비되곤 합니다.
본 인물을 욕보일 시 많은 컵빠들의 저주로 제 명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이 문서의 인물은 뉴욕 양키스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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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양키 스타디움에서는 그/그녀를 보기 위한 인파로 교통이 마비되곤 합니다.
본 인물을 욕보일 시 많은 양키들의 저주로 제 명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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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구단이 낡아빠진 퇴물 그자체가 되었다해도 한화 이글스와 KBO 리그의 새 역사를 새긴 성인들까지 모독하는 일은 금하도록 합시다.
이 문서의 대상은 전설 그 자체입니다.

이 사람은 전설 그 자체입니다.
이 사람의 팬들 앞에서 절대로 이분을 까지 마십시오.
정말로 잘못 까다가도 본인의 안전을 보장해 드리지 않습니다.
모두 레전드에게 예의를 갖춥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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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증대현.gif 이 문서는 대한민국 국가대표를 다룹니다.
잘할지 못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국제대회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궁내 체고의 씡카볼 투슌데... 자 오다 정~말 직각으로 하나 떨어져 주면 좋은데여! 자 투나씡!...뙇! 유★격★수! 아앜! 뜨블플레이! 뜨블플레이! 고엥민! 고엥민! 아아앜! 우승이에여! 증대혀어어언! 하아아아아앍앜
이 틀의 대상은 골든글러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틀의 대상은 시즌 MVP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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믈브느프브에 있기 마땅한 존재입니다. 크보크프브르 같은 건 그에게 너무 좁습니다.
이 캐릭터는 진짜 개씹사기라 게임을 노잼으로 만듭니다!
이 문서는 심하게 사기 포스를 풍기는 미친 캐릭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게임에서 이걸 골랐다면 다른 놈들까지 다 이걸 고르거나 너프를 먹거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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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따위가 이 인물에게 깝쳤다가는 강속구의 매운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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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앰생똥손들은 암만 노오오력해 봤자 손톱의 때만큼도 실력을 못 따라가는 금손을 가진 사람이니 그냥 열심히 후장이나 빠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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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영구결번
15 21 23 35 52 61 99
구대성 송진우 정민철 장종훈 김태균 안승민 류현진
(예정)
한화 이글스 삼대 원로
안승민 장민재 송창식
안승민

Seung-min "The Cubs Legend" An

한화 이글스 No. 61
(KBO 명예영구결번)

기본 정보
생년 월일 1891년 6월 21일
출생지 충청남도 청주시(당시 충청도 청주목)
국적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신장 183 cm
체중 88 kg
문흥
선수 정보
입단 1906년 시카고 컵스 자유계약
투타 우투우타
포지션 투수(선발)
기록 트리플 크라운(1907,1908,1909,1910,1912,1914,1917,1918,1919,1920~1933)
MLB 내셔널 리그 신인왕(1907)
MLB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1907,1908)
MLB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1921,1922,1923,1926,1927,1928,1932)
사이 영 상(1907,1908,1909,1910,1912,1914,1917,1918,1919,1920~1933)
이 외 다수
경력 시카고 컵스(1906~1915)
뉴욕 양키스(1916~1934)
니시테쓰 라이온즈(1951~ 1972)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1973~1976)
한큐 브레이브스(1977~1985)
빙그레 이글스(1986~1992)
한화 이글스(1993~2018)

개요[편집]

MLB, KBO, NPB의 레전드투수이자 전설 그 자체

1907년, 1908년 시카고 컵스의 우승멤버
1921년,1922년,1923년,1926년,1927년,1928년,1932년 뉴욕 양키스의 우승멤버
1956년,1957년,1958년,1963년 니시테쓰 라이온스 (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의 우승멤버
1977년 한큐 브레이브스 (현 오릭스 버팔로스)의 우승멤버
1999년 한화 이글스의 우승멤버

진정한 애국자 투수

안승민, 그는 누구인가 ?[편집]

국가대표로 선출되었던 안승민의 모습.

160 km/h~180 km/h 를 넘나드는 불꽃같은 속구를 던지는 탈인간급 우완 파이어볼러. 변화구의 낙차가 꽤 심하여 타자들은 손도 못대기가 일쑤고 심지어 제구도 칼같아서 자신이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1mm라도 벗어나는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죽하면 심판을 교육시키는데 안승민 옹이 꼭 들어간다고 한다. 1907년, 시카고 컵스에서 현역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그 해 그리고 다음 해 시카고 컵스를 월드시리즈 2연패를 이끈 제1의 장본인으로써 후에 그의 업적을 안 컵스팬들이 리글리필드 앞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참고로 채프먼이랑 구속대결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대결에서 180 km/h를 찍어버림으로써 채프먼이 그를 평생 스승으로 모신다고 한다.

MLB 명예의전당, NPB 명예의전당에 그의 이름이 등록되어있다.

일본으로 건너가서도 그의 활약은 이어졌는데 당대 최고의 투수들이었던 가네다 마사이치와 이나오 가즈히사 조차도 그의 투구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고한다. 포크볼의 전설로 불리우던 스기시타 시게루는 "내 포크볼도 안승민의 불꽃직구 앞에선 한낱 배팅볼"이라며 그의 투구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니시테츠에 있었을 당시 퍼시픽리그의 타자들은 그가 선발로 등판하면 전혀 맥을 못 쓰며 삼진으로 물러나기 일쑤였다. 노무라 가쓰야, 장훈 등의 강타자들도 그의 패스트볼 앞에선 힘없이 헛스윙을 연발했다고 하니 그가 일본에서도 얼마나 위대한 투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그는 MLB명예의전당에 이어 일본야구 명예의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리고 명구회 회원으로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한미일 주요 레전드들에게 안승민은...[편집]

체육계[편집]

축구[편집]

중국에서 야구는 인기가 없다. 하지만 그런 중국인들도 시카고 컵스의 마지막 우승을 이끈 레전드 안승민은 알고 있다.

 

그로 인해 야구라는 스포츠를 알았고,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알게 되었다.

 

야구의 전설인 그가 나를 가르쳐준다면 지금이라도 축구를 그만두고 야구를 배울 수 있다.

 

야구[편집]

승리를 통해서는 작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안승민의 삶을 통해서라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 크리스티 매튜슨

그가 왼손으로 던졌어도 나보단 잘 던졌을 것이다.

 
— 워렌 스판

나는 선수생활동안 겨우 780여 차례의 완투만 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안승민은 1000번 이상의 완투완봉승을 기록한 대투수이다.

 
— 사이 영

날보고 백인 최고의 투수라 한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투수는 동양인이다. 안승민.

 
— 월터 존슨

다른 투수들을 상대로는 안타를 잘 쳤지만 그의 공은 배트에 스치지도 못 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257개 이상의 안타를 때려내었을것.

 
— 조지 시슬러

그의 공을 보고 출루하는것은 하늘의 별 따기이고, 그의 공을 쳐서 출루를 한다는것은 신에게 대항하는것과 같다.

 
— 타이 콥

그가 좌완이었다면 내가 최고의 좌완투수라는 소리는 못 들어 봤겠지.

 
— 레프티 그로브

안승민 선배님과 같은 팀에서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뛰게 되어 영광이었다. 사실 양키스에 와서 그를 보고 나는 더 이상 투수를 하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 베이브 루스

오늘 난 지구상에서 가장 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존경하는 안승민 선배가 참석해 주신 이 자리에서 야구를 은퇴할 수 있으니까요.(Today I consider myself the luckiest man on the face of the earth. Because I can retire baseball here with appearance of Seungmin Ahn whom I respect as much as I can.)

 
— 루 게릭

저기 안승민이 걸어간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투수가, 고고히 지나갔다.(There goes Seungmin Ahn, the greatest pitcher, who ever lived in the world, went aloofly"

 
— 테드 윌리엄스

나도 인종차별을 겪었지만 그도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을 겪었을것이다. 그런 역경에도 놀라운 활약을 한 그는 위대한 선수다

 
— 재키 로빈슨

안승민의 꾸준함을 주목하였고 그 꾸준함을 조금이나마 실천했기에 700개가 넘는 홈런을 때려 낼 수 있었던것 같다.

 
— 행크 애런

안승민 선배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승민 could do everything)

 
— 윌리 메이스

그 누구도 야구는 미키 맨틀의 반만큼도 못 한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안승민은 내 100명분보다 야구를 잘 한다.

 
— 미키 맨틀

끝날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고? 그래 내가 그렇게 말했지. 근데 그건 안승민 선생이 등판하지 않은 날에만 해당하는 말이었을 뿐이야.

 
— 요기 베라

안승민의 불꽃 패스트볼을 벤치마킹 한 것이 내 강속구이다. 나는 그의 패스트볼을 존경한다.

 
— 놀런 라이언

부상으로 힘들었을 때 나는 일본으로 날아가 큰 부상 경험이 있으시던 안승민 선생을 만났어. 그는 희망의 말을 해주셨는데, 내게 12년만 재활을 하면 다시 투수로 활동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 그래서 그냥 은퇴했어.

 
— 샌디 쿠팩스

입단하자마자 큰 활약을 펼친 그가 부럽다. 나도 입단이후부터 잘 했더라면 더 좋은 투수로 거듭났을것.

 
— 랜디 존슨

모든 걸 이룬 나도 그가 있기에 이룰 수 없던 꿈이 있었다. 나는 한국야구가 일본야구를 30년간 이길 수 없게 했을 것이다. 안승민 선생만 없었다면.

 
— 스즈키 이치로

그는 니시테쓰 시절 오른쪽 어깨를 아끼지 않았던 최고의 투수였다. 나 역시 그와 뜻을 함께해 오른어깨를 팀에게 바쳤다.

 
— 이나오 가즈히사

그의 투구를 지켜보면 나는 더욱 힘이 났다. 그가 등판한 날만큼은 반드시 타점을 내고 싶었다.

 
— 나카니시 후토시

안승민이 없었다면 니시테쓰의 황금기는 오지 않았을 것.

 
— 히가시오 오사무

그는 수비실책을 저질러도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위해 나 역시 부족한 수비실력이지만 최선을 다해 수비에 집중했다.

 
— 도요다 야스미토

그는 진정한 애국자이다. 독립투사였던 그와 투타 승부를 한다는것은 내게 있어서 영광이다.

 
— 장훈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경기는 두 경기이다.노무라 가쓰야가 상대 포수인 경기, 안승민이 선발투수로 나온 경기.

 
— 왕정치

그가 선발로 나서는 경기는 ON포가 쉬는날이다.

 
— 나가시마 시게오

그의 투구를 보면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버렸다. 그와 맞상대를 펼치는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 호리우치 쓰네오

내가 선수생활 내내 쌓은 400승을 그는 10년만에 쌓을만큼 엄청난 선수이다.

 
— 가네다 마사이치

안승민과 한큐에서 같이 뛰던 시절 나는 루상에 나가 어떻게든 득점을 하여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를 위해 시도한 그린라이트는 셀 수 없이 많았다.

 
— 후쿠모토 유타카

그와는 좋은 인연이 닿지 못해 선수생활 내내 상대팀 투수로만 만났지만 나는 그와 배터리 호흡을 단 한번이라도 맞춰보고 싶었다.

 
— 노무라 가쓰야

안승민 옹과 같이 뛰지 못한 게 후회된다. 빙그레 시절 그의 투구는 완벽했다. 특히 그의 팔각도가 인상적이었다.

 
— 선동렬

1984년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전, 감독님은 혹사로 지친 내게 등판을 권유하며 말씀하셨다. "마 동원아 우짜노. 이까지 왔는데... 일본서 이까지 안승민 쌤이 니 보러 오싰는데. . ."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안승민 쌤이예? ...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 그렇게 그의 앞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고, 보란 듯이 우리는 우승했다.

 
— 최동원

안승민을 만난 것이 나에겐 크나큰 영예이다

 
— 장민재, 1923년 뉴욕 양키스에서

안승민 옹은 나의 우상이다. 그의 활약이 있었기에 내가 메이저리그에 진출 할 수 있었다.

 
— 박찬호
 
— 이종범

안승민...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답다..

 
— 가네바야시 세이콘

안승민 덕분에 내가 야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 송창식

이 분이 진짜 야구 그 자체이다.

 

야구의 신은 내가 아니라 이 분이다.그 분의 정신력을 본받아 선수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 김성근

[1]

안승민 옹 에게서 배운 그 투혼..잊지 않겠습니다.

 
— 류현진

동렬이가 없고, 종범이가 없어도 안승민 옹만 있으면 커버가 가능하다

 
— 김응룡

제가 가장 존경하는 야구선수요.. 안승민 옹이죠 같이 골프 치고 싶네요..

 
— 백인천

그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 양상문

야구로 승부하자. 허나 안승민 옹은 야구 그자체이다.

 
— 이종운

가르시아만한 국내 타자는 많다. 하지만 안승민 옹만한 투수는 없다.

 
— 양승호

야구 모른다. 그러나 마운드에 안승민 옹이 있다면 누구든 결과는 뻔히 안다.

 

E스포츠[편집]

페이커는 롤의 안승민이다

 
— 뱅

정치권[편집]

야구를 대국적으로 하신 분.

 
— 김재규

법은 목욕탕. 공은 안승민.

 
— 박근혜

안승민 옹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국부(國父)이다. 그런데 일부 좌파들은 안승민 옹을 날조하여 모욕하고 있다.

 
— 김무성

그는 사람사는 세상을 꿈꾼 사람이다.

 
— 문재인

어린시절[편집]

1891년 6월 21일, 별이 하나 이 땅에 떠오른다. 그 별의 이름은 안.승.민

대한 제국의 그 누구도 야구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

심지어 일본조차도 야구라는 스포츠는 몇몇의 매니아층만이 알고 있었을 그 때에. 신의 계시로 혼자서 야구를 터득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소학교인 교동소학교 시절의 안승민.

1905년 겨울, 선교를 위해 대한 제국에 온 미국의 한 신부는 어떤 소년이 돌팔매질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리고 돌팔매질을 하는 소년에게 다가가 제의를 하는데..

"Don't you want to run for the Chicago Cubs? (시카고 컵스에서 뛰어볼 생각이 없는가?)"

1906년 가을. 일본에 의해 짓밟힌 조국을 뒤로 한채, 그는 고향을 떠나 말도, 문화도, 인종도 다른 낯선 미국 땅에 도착한다.

시카고 컵스 생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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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컵스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첫 해, 1907년 그는 입단 첫 해 만에 시카고 컵스를 대표하는 선수이자, 레전드였다.

시카고 컵스를 월드 시리즈 2연패를 견인하는 제1선발투수로 그는 아직까지도 시카고 컵스 팬들의 가슴 속에 전설로 남아있다.

그의 공은 빠르지만 느리고, 단순하지만 복잡한 공이었다.

1907년 기록 32승 0패 280이닝 477탈삼진 0.65평균자책점 17완봉승 12완투승 1노히트 노런

1908년 기록

그에게 2년차 징크스? 없었다.

오히려 더욱 더 훨씬 발전된 모습으로 그 당시 MLB를 완벽히 씹어먹으며 팀의 월드시리즈 2연패에 정점을 찍어버렸다.

36승 0패 304이닝 506탈삼진 0.17평균자책점 19완봉승 14완투승 3노히트노런

특히 1908년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보여준 9이닝 무실점 무피안타 1사사구 25탈삼진 노히트노런은 MLB 역사상 다시는 깨지지 못할 기록으로 남을것이다.


시카고 컵스의 2연패 우승을 안겨주고 우승멤버들과 함께 찍은 사진(맨 앞줄 왼쪽에서 여섯번째가 안승민)

1909년

1909년 성적은 35승 0패 301이닝 500탈삼진 0.15평균자책점 18완봉승 15완투승 2노히트노런

당시 커리어하이를 찍고있던 백인선수 '크리스티 매튜슨' 과의 대결에서 9이닝 무피안타 완봉승을 거둔 일화는 유명하다. 그 경기 이후로 매튜슨은 그를 볼때마다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한다고 한다.

1910년
시즌 초반에는 혹사에 의한 피로도 때문인지 구속이 안올라와서 고생을 많이 한 승민옹이였다.

하지만 6월에 노히트노런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부활의 준비를 하더니, 그해 7월 사고를 쳐버린다! 3경기 연속 퍼펙트게임 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며 당시 모든 신문에서 그의 활약상을 대서특필하였다.

이 해는 일제강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 된 해이기도 한데, 당시 안승민의 인터뷰에서 안승민은 이런말을 하였다.

"나는 조국을 위하여 공을 던진다. 내가 던지는 공에는 우리 조국민들의 눈물과 나의 눈물이 묻어있다." 이 인터뷰 내용이 한국으로 알려지자, 당시 실의에 빠져있던 국민들은 안승민옹의 활약상과 인터뷰 내용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1910년 시즌 기록은 30승 0패 201이닝 354탈삼진 0.98평균자책점 12완봉승 10완투승 1노히트노런 3퍼펙트게임

1911년
팔꿈치 부상으로 한 시즌을 날렸다.

1912년
팔꿈치 부상에서 돌아온 안승민옹.

하지만 팔꿈치 부상을 당했던 선수라고는 도무지 믿기 힘든 구속을 선보이며, 스플리터라는 구질을 독학하며 당시 스플리터로 최고 구속인 168 km/h를 찍고야 만다! 위에서 아래로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스플리터의 위력에 므르브 백형들은 맥을 못 맞추고 승민옹의 스플리터쇼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만다.

1912년 시즌 기록 : 20승 1패 211이닝 178탈삼진 1.02평균자책점 1완투승

1913년
고국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에 걸려, 1913년은 안승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시즌기록을 보여주었다.

당시 시카고 컵스 팬들은, 안승민의 조국인 대한민국의 상황을 알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위로하여 준다. 그리고 당시 한 컵스 팬이 일본을 저격하여 쓴 글이 큰 이슈를 일으킨다.

1913년 시즌 기록 : 2승 3패 48이닝 15탈삼진 5.87평균자책점

1914년
날이 가면 갈수록 심각해지는 조국의 상황에, 승민옹은 마음을 다잡고 짧은 글귀 하나를 자신의 일기장에 쓴다.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나의 조국 동포 형제들을 실망시키는 것이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내 한몸 불사리겠노라.. 이 공으로.."

이 글은 광복 후, 승민옹이 직접 공개한 글귀로 이 글귀를 본 국민들은 안승민옹을 안중근 의사의 피를 이어받았다며 '안승중민근' 이라 칭한다.

조국을 위한다면 한 몸 불사르겠다고 굳게 다짐한 승민옹은, 그해 미쳤다. 시카고 컵스 투수진의 승리의 95%를 승민옹이 홀로 책임짐으로써 시카고 컵스의 영원한 1선발 칭호를 팬들로부터 받는다.

그 해, 진짜 한 몸을 불살려서 불꽃이 된 승민옹은 한 시즌 최다 523탈삼진과 30완봉승을 기록함으로써 탈삼진과 완봉승의 새로운 기록을 세운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종전의 메이저리그 역대 단일 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은 1886년 맷 킬로이(당시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수립한 513탈삼진이다. 맷 킬로이의 탈삼진 기록 갱신한것이였다.

그가 그 해 세운 37승중, 30승이 완봉승이니.. 정말 대단한 기록이자 인물이다.

시즌 기록은 37승 0패 324이닝 523탈삼진 0.09평균자책점 30완봉승 2완투승 5노히트노런

모 게임에서는 그의 업적을 찬양해, 그의 선수카드를 개씹사기로 만들어 한 때, 그의 선수카드가 현금가 11억에 팔리기도 하였다..

1915년
팔꿈치 부상이 재발하여 한 시즌을 날렸다.

그리고 이 해가 컵스에서의 마지막 해라, 팬들은 1915년 팔꿈치 부상이 재발한 것에 대하여 매우 아쉬워하였다.

그 후, 그는 뉴욕 양키즈로 트레이드되었다.

그 후 시카고 컵스는 월드시리즈를 챙기지 못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안승민의 저주"라 불렀다

뉴욕 양키스 생활[편집]

( 당시 카메라의 잔고장으로 노이즈가 낀 모습이 눈에 띈다. )

1916년 - 1918년[편집]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 된 이후 그는 부상을 이겨내고 커리어하이를 찍기 시작한다.

1916년에 부상에서 재활치료를 끝내고 복귀한 다음해 1917년부터 서서히 경기력을 올리기 시작한다.

1917년 기록 27승 2패 275이닝 255탈삼진 13완투승 10완투승 1.87평균자책점

1918년 기록 26승 1패 264이닝 249탈삼진 15완봉승 9완투승 1.58평균자책점

1919년[편집]

3월 1일, 개막 하루 전, 그가 양키스 집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카메라에 찍혔다.

이에 일본 당국은 미국에 안승민 추방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정치범 추방 금지 조항 때문에 거절하였다.

이 해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많은 나라들이 독립해 나갔다. 이에 안승민옹은 조국이 독립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졌으나 그러질 못하였다. 민족자결주의의 실상은 1차대전 패전국에만 해당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안승민옹은 분노가 치밀었고 그 해 5월, 윌슨 대통령이 직관을 오자 그 앞에서 삼진 26개 퍼펙트 피칭을 보여준다. 이 중 삼구삼진은 20개였고 볼은 단 2개만 나온 분노의 피칭이었다.

1920~1929년[편집]


전설로 등장해 신으로 기억될 뉴욕양키스 시절(사진 맨 아랫줄 앞 가운데가 안승민)

이 기간동안 미국 현지에선 "그가 나오면 양키스는 무조건 이긴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안승민의 위엄은 엄청났다. 무려 10년 연속 선발 투수로 30승 이상에 15승 이상의 완봉완투승과 평균자책점 0점대 라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며 양키스의 진정한 에이스로 확고히 입지를 굳혔다. 그리고 10년간 통산 15노히트 노런4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며 당시 팀 내 에이스였던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과 1923년,1927년에 월드시리즈를 우승시키며 양키스의 팬들로 부터 전설을 넘어 신의 경지에 올라선 사나이라는 평가를 받게된다.

1923년 월드시리즈 3차전과 1927년 월드시리즈 최종전에서 보여준 퍼펙트게임은 이전에 있던 불멸의 노히트노런 기록을 갱신하며 그 당시 MLB를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로 빠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1925년에는 6경기 연속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며 한 시즌 최다 노히트노런 신기록을 갱신하였다.

1923년, 그의 애국심[편집]

트레이드 7년뒤 메이저리그 올스타팀 이름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는 간도 대참변 때문에 도쿄의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대를 위하여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았고 20여년 후 그는 마침내 해내고야 말았다.

대를 위하여 분노를 참은 그는 이 때 올스타팀의 포수 '모버그'를 만나게 된다.

모버그.. 그는 야구선수이면서 국제스파이인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투수리드에는 소질이 있던 그였지만,

타격에는 젬병이였던 그가 올스타팀의 선수로 활동할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일본의 정보를 빼오려 했던것..

그의 행동을 눈치챈 안승민은 모버그와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버그는 자신이 국제스파이인 것을 안승민 옹에게 전하였으며,

안승민 옹은 자신의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쓸수가 없다고 한숨을 쉬며 털어놓게 된다.

그리고 승민옹은 이야기 한다.

"내가 직접 나서겠다."

다음날.

도쿄시내의 세인트 루크 병원을 찾은 버그와 안승민은

안내 데스크에 세실 부른여사를 만나러 왔다며 병실을 향한다.

그리고 버그는 병실로.. 안승민은 병실로 가지 않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가방에서 영사기를 꺼낸 그는 도쿄 시내를 주의 깊게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가 촬영한 필름은, 1942년 도쿄 대 공습때 폭격 정보로 사용됐다.

1934년 올스타팀과 안승민의 방일은 일본프로야구를 낳았고,

도쿄 폭격까지 낳았던 것이다..."


당시 그가 촬영하였던 도쿄 시내의 일부분

- 이범석, 대한민국 독립운동사(下편) 中

장민재와의 인연[편집]

이 팀에서 또다른 선수를 만나게 되는데, YMCA 야구단 출신인 장민재였다.

뉴욕 양키스에서는 장민재와 백투백으로 승수를 안겨주었다.

훗날, 그들은 한화 이글스라는 팀에서 다시 만나게 되며, 다시 만난 그날 서로 껴안고 오열하였다고 한다. 그의 동료애(愛)를 엿볼수 있는 장면이다.

1930년[편집]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갑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며 4.2이닝만에 조기 강판되었다. 당시 그는 퍼펙트 오브 퍼펙트게임을 진행중이었기에 아쉬움은 더욱 컸었고, 이 경기가 30승이 걸린 경기여서 더더욱 아쉬움은 배가되었다. 결국 이 불의의 복통으로 그의 연속기록 행진은 중단되었다.

1931~1933년[편집]

3년연속 30승을 거두며 다시 연속기록 행진을 재개하였다.

1934년, 뜻하지 않은 큰 부상[편집]

시즌초반까지 여전한 클래스를 보여주며 모든 부문에서 1위를 질주했으나 이 시즌에 그는 충격적이게도 큰 부상을 당하고 만다. 브루클린 전에서 선발등판한 그는 3회 투구도중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마운드에 주저 앉고 만다. 검진 결과 너무나 무리했던 나머지 팔꿈치와 어깨가 심각하게 파손되었다고... 당시 의술로는 치료법이 없어 선수생활이 끝날수도 있다는 진단결과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야구에 대한 열정이 너무나 강해 재기가 불가능 하다는것을 알고도 언재 끝날지 모르는 치료를 하기고 굳게 결심을 한다. 그는 오랫동안 해야 할 치료를 위해 은퇴를 선언하며 그라운드를 떠나기로 하고 그해 여름 은퇴식을 거쳐 정든 그라운드를 떠났다.

컵스 시절 이미 한차례 팔꿈치 부상 경력이 있었던 안승민이었기에 이번 팔꿈치 부상은 저번보다 더더욱 심각했다. 거기다가 이번엔 어깨와 손목 등 오른팔 전체가 심하게 망가졌던 것이었다. 모든 병원에서는 그가 다시 선수생활을 하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정말 기적이 있지 않는 한 오른팔로 공을 던지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안승민은 "의사들의 말에 내 몸으로 반박해 보이겠다."며 곧바로 재활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그날 밤 플로리다로 떠났다.

팬 여러분, 저는 은퇴를 하는것이 아닙니다. 저는 잠시동안 길고 긴 재기를 위해 야구를 쉬는것입니다. 저의 오른팔은 비록 심하게 망가졌지만, 제가 늘 뿌려대던 불꽃직구처럼 저의 열정은 아직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 열정을 가지고 저는 불가능한 재기를 위해 제 몸을 불사를것이고, 재기에 성공하여 반드시 마운드에 오를것입니다. 먼 훗날 그라운드에 복귀한다면 그게 어떤 팀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큼은 제 마음속에 영원합니다. 제 마음 한켠에는 언제나 당신들, 뉴욕 양키스 팬 여러분들이 있다는것은...

 
— 뉴욕 양키스 No.21 안승민/은퇴사 中

재활 기간[편집]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당시 의술로는 그의 부상을 완치하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각 병원의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재차 수술을 요구했고, 그가 자신들의 병원을 찾아오면 마지못해 안승민의 오른팔 상태를 봐 주고 수술을 해 주었다. 안승민은 여러차례 수술을 받은 이후에는 억척같이 재활훈련에 매달렸다.

그는 "수 년, 수십 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그라운드에 복귀할 것"이라며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 할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매일같이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그의 이러한 간절함이 하늘에 통한걸까. 놀랍게도 그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닳아 없어졌던 팔꿈치 인대가 다시금 복구되기 시작했고, 망가졌던 어깨도 점차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1941년, 그는 은퇴를 선언한 지 장장 8년만에 다시금 공을 잡고 불펜투구에 들어갔다. 그 당시 기록된 그의 구속은 133 km/h. 선수시절 구속에 훨씬 못 미치는 구속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더욱 열심히 재활에 돌입했다.

당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여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은 자원입대를 하게 되었고 미국과 세계의 관심이 2차대전에 쏠리며 미국에서 야구 등의 스포츠는 관심이 없어지게 되었다. 어찌 보면 안승민옹의 기가막힌 타이밍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일본의 무차별 징용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전쟁터에서 죽어나가는걸 알고 있던 안승민옹인지라 이 때 경기에 나갔다면 분명 타자들한테 난타당할거라는건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1945년 8월, 그는 150km를 던지며 기적을 완성해갔고,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던 15일에는 185 km라는 그의 어깨상태에선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구속이 찍혔다. 그는 당시"내 조국을 되찾아서 그런지 알 수 없는 힘이 났었다. 조국을 되찾아 너무 감격스럽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안승민이 185km를 뿌렸다는 소식이 의학계에 알려지자 의학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불과 11년 전만 하더라도 오른팔을 제대로 쓸 지도 모르는 상태였던 그가 엄청난 광속구를 뿌렸다는 사실에 의학계는 "신이 지구상 최고의 투수에게 축복을 내려주셨다. 그는 완벽한 오른팔을 되찾았다."고 발표했다. 안승민의 재활은 기적처럼 성공한 것이었다.

1945년 8월 27일, 사흘에 걸쳐 한국에 귀국한 안승민옹은 고향 땅을 밟자마자 눈물을 흘리셨다. 그 모습을 본 수많은 한국의 안승민옹 팬들 역시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나라를 잃었던 설움과 나라를 되찾은 기쁨이 혼합되어 나온 염도 1%의 눈물이었다. 이윽고 그는 고향 청주로 내려가 동네사람들한테 야구에 대해 말하고 야구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야구팀이 없었기에 조국에서 야구를 하고 싶다는 그의 염원을 이루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결국 그는 한국에 제대로 된 리그가 생길때까지 개인훈련에만 돌입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당시 서울에서 개인훈련을 하던 안승민은 급히 부산으로 피란을 온다. 여기서도 개인훈련을 이어갔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을 눈뜨고 보기 어려웠던 애국자인 그는 도저히 한국땅에서 훈련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이듬해 겨울. 그는 니시테쓰 라이온즈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들여 큰맘먹고 일본행 배에 오르게 된다.

니시테쓰, 다이헤이요 라이온즈 생활[편집]

일본땅을 밟은 그는 메이저시절 모아뒀던 돈으로 인근에 작은 집을 사고 그곳에서 훈련에 매진했다.

하지만 벌어둔 돈만으로 살 수는 없었기에 그는 선수로써 복귀를 하기위해 한국을 떠나기 전 사전에 약속했던 니시테쓰 라이온즈의 입단 테스트를 받게된다. 입단 테스트에서 그는 놀라운 피칭을 선보이며 단숨에 니시테쓰에 입단한다. 최고구속은 177km내외였고, 변화구의 무브먼트는 산천초목이 뒤틀리는듯 했다고 한다.

니시테쓰에서 그는 이나오 가즈히사와 같이 최강의 원투펀치를 이루며 퍼시픽리그를 폭격했다. 타선에서는 나카니시 후토시, 도요다 야스미토 등이 활약하였다.

1951년[편집]

장장 17년동안 재활에 매진하던 그가 니시테쓰의 투수로 복귀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미국 전 지역에 알려졌고, 주요 타임지의 1면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했다.

그는 메이저리거의 클라스를 보여주며 첫해 35승 0패 방어율 0.23을 기록하며 자신의 화려한 복귀를 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에 많은 일본인들은 그를 비난했다.

1952~1960년[편집]

9년 연속 30승, 0점대 평자를 찍으며 일본 프로야구를 지배했다. 이 기간동안 그의 엄청난 피칭을 본 일본인들도 그의 위대함에 절로 고개를 숙였다. 이때부터 그를 향한 비난과 야유는 일본내에서 사라졌다.

1953년[편집]

휴전으로 인해 나라가 둘로 갈라졌다. 안승민옹은 독립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10년도 안 되어서 나라가 둘로 갈라진 거에 충격을 받았다. 충격받고 1주일간 결장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잡고 공을 던졌다. 하지만 이 해에 whip이 전에 비해 엄청 올라갔었다.

1956년[편집]

나라가 갈라졌다는 충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제구력 난조를 보여 시즌 평자가 0.86이 넘었다. 타선의 도움을 받아 30승 2패를 거두었다.


허나 일본시리즈에서 전성기 시절의 칼날 제구력을 앞세워 우승을 안겨주었다.

1957년[편집]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의 2년 연속 우승을 안겼다.

이 기간에 안승민 옹은 세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없는 불멸의 기록을 세우셨다!

연속 퍼팩트 피칭을 6번이나 했다! 이는 안승민 옹이 메이저 리그에서 기록한 종전 3번을 새로 갱신한 셈이다.

왕정치(오 사다하루)가 기록한 통산 최다 홈런 868개를 인정하지 않는 메이저리그에서 이레적으로 인정하였다.

36승 0패 평균 자책점 0.00

이 기록도 6개 퍼팩트 게임에 가려졌지만, 이 기록도 안승민 같은 대투수가 나오지 않는 이상 절대로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1958년[편집]

올해도 리그를 씹어드셨다.

그러나 타선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아슬아슬하게 30승을 밣았다.

30승 4패 평균 자책점 0.98

일본 시리즈를 3년 연속 우승을 만든 주역이 된다.

1961년[편집]

초반 난조를 보이며 살짝 부진한 이 시즌에도 0점대 평자로 마무리 할 수 있었으나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장훈에게 솔리런을 허용하며 0점대 평자가 깨졌다. 시즌 최종 방어율은 1.00

1962~1965년[편집]

10년연속 무패행진을 이어가며 고군분투했다. 이 기간동안 쌓은 승수는 무려 403승.

1963년[편집]

오랜만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안겨주셨다.

1965년 ~ 1973년[편집]

이 때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폭투, 패전투수가 되었다. 그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선발투수는 송창식이었는데, 비록 송창식이 60년 후배지만, 송창식의 콩라인으로 전락하였다.

1973년[편집]

1972년 11월 롯데 오리온즈의 구단주가 니시테쓰 구단을 매입하여 "후쿠오카 야구 주식회사"로 상호 변경하였다.. 또한 다이헤이요 클럽과 제휴하여 구단 이름이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로 바뀌어진다.

팀명이 다이헤이요로 바뀐것에 적응을 하지못하고,구단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개막전 등판에서 부진하면 10년만에 첫 패배를 기록한다. 시즌 최종 성적은 33승 1패 1.02

1974~1976년[편집]

3년간 리그를 여전히 씹어먹으며 세계 최고 투수임을 입증. 그러나 노쇠화로 인해 그의 방어율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1974년 시즌 성적 19승 5패 평자 1.99

1975년 시즌 성적 20승 7패 평자 2.08

1976년 시즌 성적 14승 10패 평자 3.55

이를 본 다이헤이요 팬들은 충격을 받았다. 팀의 상징이자, 무적이던 안승민이 부진의 늪에 빠진다는 것에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팬들은 구단의 사정을 보고 안승민이 저리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보고 말았다.

1976년 노쇠화된 안승민의 나이를 본 경영진은 결국 안승민을 트레이드를 하고 만다.

이를 극구반대한 에토 신이치 감독은 해임당했다.

그 여파로 다이헤이요 라이온즈의 팬들은 3년연속 우승을 기여한 안승민을 트레이드 소식을 보고 경영진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었다.

다이헤이요 팬들은 안승민 트레이드 거부운동으로 야구장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 결과로 팀 순위는 최하위로 떨어지고, 관객 수도 전년 대비 43%나 떨어졌다.

결국 다이헤이요 클럽은 경영난의 핑계로 물려나고 만다.

그 후,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는 팀명을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로 2년단 바뀌었다가 세이부 라이온스로 바뀐다.

안승민 옹은 이를 보고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한국인이라고 차별받는 일본에서도 유일하게 감싸준 구단이였으니 당연할 수 밖에 없다.

한큐 브레이브스 생활[편집]

노쇠화의 기미를 눈치챈 다이헤이요는 그를 한큐로 트레이드 시켰다. 그리고 그는 한큐의 에이스가된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생긴것도 이 때였다. 안승민옹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좋아하였다.

이 날 안승민옹은 자신의 라이벌 송창식과 한 팀이 되었다.

1977년[편집]

다시 0점대 평자를 찍으며 노쇠화니뭐니 했던 다이헤이요의 경영진을 엿먹였다.

그리고 트레이드 첫 해 일본 시리즈의 우승을 견인했다.

그러나 이 해가 안승민 옹이 가져다 준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이였다.

1978~1984년[편집]

이나오 가즈히사 이후로 단일시즌 40승을 두 차례나 달성하며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물론 평자는 7시즌동안 모두 0점대.

1985년[편집]

그러나 그는 어찌 할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이 시즌 그는 컵스 시절 한차례 앓았던 향수병을 다시 심하게 앓으며 제대로 된 투구를 하지 못했고, 결국 그는 시즌 종료 후 팀을 스스로 퇴단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5승 5패 6.03으로 선수생활 이후 처음으로 6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한큐 브레이브스 팬들은 그런 안승민 옹을 보고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빙그레, 한화 이글스 생활[편집]

1985년 늦가을. 스스로 구단을 나온 뒤 그는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무려 34년만에 조국 대한민국의 땅을 밟았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대한민국이 듫끓었으며, 전두환 당시 대통령도 그에게 환영사를 전했다.

이듬해 그는 고향팀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플레잉코치를 자처하며 갓 신생팀이 된 빙그레에 힘을 실어주었다.

1985년[편집]

꿈에도 그리던 한국프로야구 첫 시즌. 그는 보직을 원포인트 릴리프로 바꾸어서 주로 강타자들을 상대했다. 원포인트 만으로도 충분히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성공적인 조국에서의 첫 시즌을 마쳤다. 또한 이 해에 그는 또다른 역사적인 투수 장민재, 송창식과 한 팀에서 만나게된다.

이 때 안승민 옹은 자기 등번호 No.21번을 후배에게 맡긴다는 이유로 다른 등번호를 선택했다. No.15

후일, 송진우는 안승민 옹의 No.21번을 골라 영구결번을 드셨다.

이에 안승민 옹은 자기 등번호를 물려받은 선수가 영구결번을 받은 것에 대하여 매우 기뻐하셨다.

1986~1989년[편집]

해태의 4년연속 우승을 멀리서 지켜봐야했지만, 그는 이 기간동안 중간계투로써 4년 통산 0.05라는 경이적인 방어율로 빙그레의 핵심 불펜투수로 거듭났다. 선동열, 최동원도 그의 투구를 보고 많이 배웠다고한다.

1990~1991년[편집]

2년연속 무실점을 하며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강의 철벽계투가 되셨다. 한때는 그가 몸을 풀면 타팀팬들이 경기도중 집단으로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웃지못할 일도 종종 벌어졌다고 한다. 그의 엄청난 공은 그 누구도 쳐 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1992년[편집]

마무리 투수 보직을 맡으며 25세이브를 달성하셨다.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 낼 기회였으나 그는 안타깝게도 시즌 막바지에 불의의 안전사고를 당하며 다리에 부상을 입고만다. 결국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지 못했고 롯데의 우승을 씁쓸히 지켜봐야만했다. 이 시즌 중간계투로의 성적은 3승 0패 10홀드 25세이브 평균자책점 0.85

1993~1998년[편집]

93년도에 팀명이 한화로 바뀌었다. 다리쪽의 부상여파가 컸는지 그는 매 시즌 많은 이닝을 소화하지 못했다. 그러나 확실하게 막을 이닝은 확실히 막아주며 여전히 팀에겐 소금같은 존재였다.

1999년[편집]

이 시즌 그는 구대성 앞에 등판하는 필승조로 한화의 허리를 맡으며 35홀드를 달성하는 등 대활약하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고 한국시리즈에서 롯데를 상대로 92년도의 아픔을 그대로 갚아주면서 한국프로야구 시리즈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1999 시즌 최종 성적은 7승 0패 35홀드 평균자책점 0.79

"자랑스러운 내 조국의 프로리그에서 우승을 하니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우승 당시 인터뷰 中

2000~2005년[편집]

이 기간 동안 그는 선수로는 거의 뛰지 않았고 코치로써의 역할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조국에서 우승을 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이제는 내가 직접 뛰는것보다 후배들에게 내 경험을 전수하면서 그 후배들이 왕조를 세우게 할 것." -2002년 당시 인터뷰 中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멘토링으로 송진우는 한화의 선발투수들 중 가장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2006년[편집]

한화가 한국시리즈까지 올라오자, 이제껏 어깨를 아끼고 있었던 안승민이 직접 나서서 등판하는 등 투혼을 불살렸지만 삼성에게 아쉽게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친다.

2007년[편집]

니시테쓰 시절 가장 친했던 투수인 이나오 가즈히사가 지병을 앓다 세상을 떴다는 비보에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만다. 국적을 초월한 절친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그는 한 시즌을 통째로 쉬게된다.

2008~2009년[편집]

정신적 충격을 극복하고, 2008시즌에 복귀한 안승민 옹은 2군 투수육성 코치로써 역할하며 한화의 투수들을 키워낸다.

2010년[편집]

2010년, 한대화감독이 새로 부임하자, 그는 다시 1군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다. 한대화 감독은 안승민 옹을 다시 선발투수로 쓰겠다고 밝혔고, 안승민 옹도 선발투수 자원이 타 팀에 비하여 부족한 한화의 현실에 수긍하고 2군 투수육성 코치 생활을 접고 온전한 선수로 다시 돌아와 한화의 선발투수로 뛰게된다. 그는 엄청난 노쇠화로 이제 전성기 때의 구속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지만, 이제껏 쌓아 온 100년의 관록이 묻어나는 노련한 피칭으로 한국 프로야구 타자들을 상대했다. 그의 노련함에 특히 롯데 자이언츠 타선이 힘을 못 썼다고 한다.

2010년 시즌 최종 성적은 9승 3패 평균자책점 3.01

2011년[편집]

한화에서의 첫 선발투수 풀타임 시즌을 맞이했으나 세월은 그를 거스룰 수 없었다. 특히 한화의 타선과 수비가 안승민 옹을 도와주지 못함으로서 그는 7승 9패 평균자책점 5.89으로 2011 시즌을 마무리하셨다.

2012년[편집]

시즌 초반에는 선발등판을 하였으나 너무 노쇠화가 진행된 몸에 무리가 와 평균 5이닝 이상을 던지지 못하였다. 이런 그를 본 한대화 감독은 안승민 옹의 보직을 마무리투수로 변경하였다. 결국 그는 한화의 마무리투수가 되어 수호신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때 그는 팀 동료 박찬호에게 좋은 대선배였다고 한다.

2012년 시즌 최종 성적은 2승 5패 22세이브 평균자책점 1.55

2013년[편집]

너무 노쇠화가 진행되었는지 시즌을 정상적으로 소화하시지 못하셨다. 옛 눈에 상처가 있어 백내장을 앎은 사실이 드러나서, 수술을 두 차례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더욱 강인한 몸을 만들어 노쇠화를 극복하겠다며 시즌 종료 후 군입대를 하셨다. 그는 구한 말 대한제국군 이후 무려 110여 년 만에 재입대를 하셨다.

2014년 기준, 고손자뻘인 동기들과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들 중 한 명은 자신의 고조할아버지가 안승민옹을 보고 일본 앞잡이질을 그만두고 독립운동가가 되어 순국하셨다고... 이것만 봐도 안승민옹은 한국 근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위인임이 분명하다.

2014년~2018년[편집]

군복무를 마친 안승민옹은 다시 고향팀 한화로 복귀하여 그동안의 관록으로 퓨처스리그에서 후배들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015년 2차 1라운드로 한화에 입단하여 데뷔 7년차에 14승을 거둔 한화의 토종 에이스 김민우가 안승민옹이 키운 대표적인 선수이다.

이후 2018년, 데뷔 113년차가 된 안승민옹. 그는 이제 자신이 야구로 해볼 수 있는 일은 다 한것 같다는 입장을 밝히며 마침내 프로야구 은퇴를 선언하셨다. 그의 등번호 61번은 한화뿐만 아니라 KBO 명예영구결번이 되었으며 그가 은퇴하는 날, 150만 대전시민이 환호하며 그의 마지막 길을 밝혔다.

여담으로 안승민 옹의 은퇴식 1시간전, 갑자기 대전구장에 예정에 없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승민 옹은 내리는 비를 보며 감정에 젖었는지 눈물을 글썽이었다.

근현대사와 한국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인만큼 그의 은퇴는 KBS, MBC, SBS 3사 9시 메인뉴스로 보도하였으며 그의 은퇴식을 프로야구 최초로 실시간 공중파 3사 중계하였다.

특히 그의 은퇴식에는 프로야구 인사와, 여러 정재계 인사를 포함한 대한민국 1%가 다 모여서 안승민 옹을 격려하였다.

은퇴 이후[편집]

그러나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멈출 줄을 몰랐다. 리틀야구 꿈나무들을 위하여 대전 관저동에 야구연습장을 차려서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진짜 근황[편집]

이 문서는 범죄에 관한 것을 다룹니다.
이 문서는 살인, 강간, 폭행, 절도 등 범죄류에 관한 것을 다룹니다.
착한 어린이는 절대 따라하지 마십시오. 다만 나쁜 어린이는 따라하셔도 좋습니다.
주의! 이 글이 다루는 대상은 존나 미스터리합니다.
씨ㅡ발 뭐가 뭔지 몰?루겟소요. 무섭습니다. ㅠㅠ

안승민을 포함해서 일당 10명이 사기,사기방조,공인중개사법 위반 혐의로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하여 체포되었다고 한다. 큰일은 꼴칰이 한다 ㅋㅋㅋ

어록[편집]

나는 대한제국의 신민으로서 우리 제국을 세상에 알리려 왔다.

 
— 시카고 컵스 입단 인터뷰 때

오늘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은 날입니다.[2]

 
— 1908년 우승 때

당장 간도로 건너가 내 불꽃패스트볼로 왜놈들의 머리통을 박살 내고 올 것이다.[3]

 
— 간도 참변 소식을 듣고 원통해하며

나 혼자서 잘 벌고 잘 사는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조국을 위해서라면 나는 아낌없이 임시정부를 지원 할 것이다.

 
— 자신의 연봉 중 절반을 임시정부에 지원할 때

컵스, 내 고향의 우승을 또 보니 이제 내 마음 속의 상처가 아물었습니다.

 
— 2016년 우승을 본 소감

각주

  1. 허나 이것은 안승민 옹이였기에 가능하였고, 안승민 옹전용이었다. 나머지 선수들에게 적용하려 하였으나 선수들은 안승민 옹만큼의 절박함과 한낱 인간의 몸으로 버티기엔 무리였다. 결국 그 결과는 살려조로 이어졌다.
  2. 첫번째 날은 조국에 광복이 찾아오는 날이다.
  3. 그는 이 당시 굉장히 분노했었고 정말 간도로 갈 준비를 했지만 구단의 강한 제지로 겨우 구단에 잔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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