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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가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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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가쓰야(野村 克也/のむら かつや)

katuya "The Nomu" Nomura

기본 정보
생년 월일 1935년 6월 29일
사망일 2020년 2월 11일
출생지 교토
국적 일본
신장 175cm
체중 85kg
선수 정보
입단 1953년 난카이 호크스
투타 우투우타
포지션 포수
경력 난카이 호크스(1954~1977)
롯데 오리온스(1978)
세이부 라이온즈(1979~1980)
난카이 호크스 플레잉코치(1966~1970)
난카이 호크스 선수 겸 감독(1970~1977[1])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1990~1998)
한신 타이거즈 감독(1999~2001)
시닥스[2] 감독(2003~2005)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2006~2009)
수상 기록
수상 내역
  • 타격 부문 3관왕 : 1회(1965년)[3]
  • 수위타자 : 1회(1965년)
  • 홈런왕 : 9회(1957년, 1961년 ~ 1968년) [4]
  • 타점왕 : 7회(1962년 ~ 1967년, 1972년) [5]
  • 최다 안타(당시는 타이틀이 아님) : 1회(1965년)
  • MVP : 5회(1961년, 1963년, 1965년, 1966년, 1973년)
  • 베스트 나인 : 19회(1956년 ~ 1968년, 1970년 ~ 1973년, 1975년, 1976년) [6]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 1회(1973년)
  • 일본 시리즈 감투상 : 1회(1973년)
  • 올스타전 MVP : 2회(1972년 제 1차전, 1977년 제 2차전)
  • 쇼리키 마쓰타로상 : 1회(1993년)
  • 센트럴 리그 최우수 감독상 : 2회(1993년, 1997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1989년)
  • 교탄고 시 명예 시민(2009년)

일본과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 최강의 공격형 포수

개요[편집]

포수 통산 최다 홈런 세계기록 보유자이다.(통산 657홈런)

단일시즌 50홈런 이상을 기록한 세계 유일의 포수이다(1963년 52홈런)

일본야구 최초의 3000경기 출전 선수이자 종전 최다 출장기록을 가진 선수였다.[7][8]

한국에선 갓동님이 이 분과 비슷하다 보면 된다. 같은 공격형포수였고(물론 커리어는 노무라에 훨씬 못 미친다) 감독까지 해 본 공통점이 있으니...

왠진 몰라도 세이콘 따위를 이 분과 비교하는 미친 놈들이 있었다. 야 이놈들아 우승횟수는 그렇다쳐도 이분과는 달리 세이콘이 감독직 하면서 제대로 키워낸 선수가 몇이나 되냐? 그나마 키운 놈들도 알고봤더니 전임 감독이 다 키워놨던 거고 그나마 키워놔도 혹사로 다 갈아쳐먹는데 씨발

선수 시절[편집]

타격은 두말할 필요없이 퍼시픽리그 최강이었다. 포수라는 고된 포지션에서 4번타자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투수들을 공포에 떨게하였다.

그의 장기는 수비에서 드러난다. 그는 타석에 선 타자에게 잡담을 걸며 은근하게 타자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기술로 많은 타자들을 엿먹였다.[9] 하지만 노무라의 잡담기술도 나가시마 시게오한테는 씨알도 안먹힘. 그럼에도 1959년 일본시리즈에서 스기우라의 4연승 떡실신우승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

1966년 코치까지 겸임하며 플레잉코치 개념으로 선수생활을 하다가 1970년 사임한 전임감독의 후임으로 선수겸 감독이 된다.

지도자 시절[편집]

난카이 선수 겸 감독(1970~1977)[편집]

선수겸 감독을 맡은 그는 선수로써는 홈런, 타점을 마구 쓸어담았고 감독으로써는 1973시즌 팀의 리그우승을 이끌었다. 그런데 일본시리즈에선 요미우리한테 4대1로 털림

또한 노무라는 1976년엔 트레이드로 영입한 선발투수 에나쓰 유타카를 마무리투수로 보직을 변경하였고 이듬해 에나쓰가 최우수 구원투수상을 받게됨으로써 본격적인 투수보직 분업화에 도화선을 놓는다.

그러나 구단과의 불화로 1977년 시즌 종료 직전에 감독직을 물러났는데 그를 따르는 선수와 코칭스텝이 꽤 있었는지 그가 물러나자 그들도 난카이 호크스를 차례로 떠났다.[10]

1978년 롯데 오리온스로 간 그는 신격호 구단주에게서 감독직을 제안 받지만 거절했다. 이후 78년 시즌만 롯데에서 뛰고 세이부 라이온즈로 떠나 선수생활에 전념하다가 1980년에 은퇴한다.

야쿠르트 갓동(1990~1998)[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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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야인이었던 그는 1990년에 야쿠르트의 감독직을 맡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야쿠르트 역사에 길이 남을 "동님"이 된다. 부임 첫해 그는 일명 "ID야구"를 내세우며 철저한 데이터, 분석야구를 하겠다는 팀 방침을 내세운다. 첫해에는 시행착오가 좀 있긴했지만 그가 갓동으로 부임하는동안 야쿠르트는 황금기를 맞이했다. 노무라는 야쿠르트 갓동님이었던 8년간 4차례의 리그 우승, 3차례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야쿠르트의 황금기를 열었던 명장이었다.[11]


한신 감독(1999~2001)[편집]

야쿠르트 시절의 탁월한 지도력을 보고 부랄을 탁! 치며 옳다구나하면서 1999년 한신은 그를 한신의 감독으로 부임시킨다.[12] 1985년 이후 좆병신팀이 된 한신을 구원해줄 명장을 영입했다고 좋아했지만...


이 팀은 솔직히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안 됩니다
제가 정말 99도 아니고 100으로 장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단도 애미없고 선수도 애미가 없는데 뭐 하자는 겁니까. 솔직히 너무 애미가 없습니다 그냥.
그리고 일단 좆크보 라는 리그 구조상 해먹던 애들만 좆크보가 망할 때까지 해먹게 되어있습니다. 안 되는 애들은 30년 지나도 똑같습니다.
정말 제가 태어나서 이렇게 자신 있고 확신 있게 말한 적은 처음인 거 같습니다.
제 말이 틀린다면 저의 불알털을 다 밀겠습니다. 꼭 캡쳐해놓으십시오. 그 정도로 자신 있으니.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안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분명히. 좆크보가 망하거나

태생이 좆병신인 팀은 뭘 해도 안된다. 노무라의 한신은 3시즌 연속 꼴찌로 꼬라박으며 멸망했다. 그러나 노무라는 이 암흑기에도 팀의 미래를 책임질 자원들을 어느 정도 키워 리빌딩을 하고 떠났다.[13] 그리고 이걸 후임인 호시노 센이치가 맛있게 잡순다.


시닥스 감독(2003~2005)[편집]

사회인야구팀 시닥스의 감독이 되어 약체였던 시닥스를 해설위원시절 쌓은 인맥으로 부른 선수들과 쿠바 흑형들의 영입 등으로 단숨에 준우승팀으로 만들어낸다. 약체 사회인팀도 준우승시키는 감독인데 한신은 팀이 문제인거다.


라쿠텐 감독(2006~2009)[편집]

창단된 지 얼마 안된 라쿠텐은 당시 팀을 제대로 만들어보겠다는 일념으로 노무라를 감독으로 부임시켰다. 워낙 팀이 개막장이라 부임첫해에는 꼴찌를 기록했지만 차츰 탈꼴찌를 하기 시작했고 부임 마지막해 정규시즌 2위를 차지하며 명장 클라스 어디 안간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한신은 안될팀이라는것도 다시 한 번 증명해보였다.하지만 그는 이 시즌을 끝으로 퇴임하며 감독인생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결론[편집]

데이터를 중시하고 상황에 따라 기록과 데이터를 통해 선수를 기용하는 스타일의 지도력을 가진 감독으로 여러번의 우승 경험 등을 견주어 보면 좋은 감독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한신은 안될팀이다.[14]

은퇴 후[편집]

선수 은퇴 후 해설위원을 했다. 그리고 야구 평론가도 했다
감독 은퇴 후 해설위원만 했다. 2020년 2월 11일에 자택욕조에서 허혈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각주

  1. 시즌 도중 최후반부에 사임.
  2. 사회인야구 팀
  3. 종전후 최초의 타격 삼관왕
  4. 9차례 획득, 8년 연속 타이틀 석권은 모두 퍼시픽 리그 기록.
  5. 7차례 획득, 6년 연속 타이틀 석권은 모두 퍼시픽 리그 기록.
  6. 통산 19회 수상은 일본야구 최다 수상 기록.
  7. 2015년 주니치의 다니시게 모토노부가 경신했다.
  8. 더구나 노무라의 포지션은 가장 체력소모가 큰 포수였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기록의 가치가 더 높아진다.
  9. 실제로 오 사다하루는 노무라가 포수로 출전한 경기에서 27타수 1안타라는 처참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10. 대표적으로 그가 마무리투수로 육성한 에나쓰 유타카는 그가 떠나자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했다.
  11. 명포수가 명포수를 낳는다고 그가 감독으로 있는동안 후루타 아쓰야는 노무라의 전폭적인 지원아래에서 꾸준히 기회를 부여 받았고 일본의 명포수로 등극한다.
  12. 노무라를 감독으로 부임시키려고 프런트들이 비위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13. 퇴임한 것도 아내가 탈세혐의로 체포된 게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14. 그가 감독을 맡은 팀 중 유일하게 우승혹은 가을야구를 못해본 팀이 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