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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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흔히 기와집을 연상하지만 조선시대 때 일반 서민들은 초가집이라는 아프리카 토인들이나 살 곳에서 살았다.
원삼국시대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고려중기이전까지 모든 전통건축물들은 우구데이 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 때려부숴버리고 일본 제국과 김일성이 그 흔적까지 없애버렸기 때문에 자료가 없다시피하며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한옥은 일러야 여말선초, 대부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한옥들이다.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청나라에는 벽돌집이 있고 에도에는 2, 3층 집이 수두룩 했으나 조선(후기)에선 온리 1층짜리 건물밖에 없었다. 기후가 엄청 추웠기 때문이다. 특히 소빙하기 이후 이런 현상을 부채질하였다. 그렇게 빨아대는 온돌 보급화로 바닥이 무거워져 2층에서 생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2층을 지으면 공간 낭비 + 자원 낭비. 그리고 동아시아는 전통적으로 2층을 선호하지 않았다. 가끔 권위 살린다고 2층 넘게 올리는 경우나 상가, 탑, 성 같은 구조물이 있을 뿐, 2층 건물은 드물다.
ㄴ 경북 봉화 석천리 영풍루
ㄴ 경북 안동 북촌댁 중문간에서 안채를 바라본 모습
ㄴ 월산대군 사저에 있던 석어당으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구했다.
ㄴ 강릉 최씨 동원군 저택
ㄴ 경주 옥산서원
ㄴ서울 창덕궁 경훈각
ㄴ덕수궁 구여당
궁궐 같은 좀 화려한 곳을 보면 2층 건물이 있기는 있었다. 특히 고려나 조선 전기만 해도 궁궐에 2층 이상은 흔한 편이었다고 한다. 가끔 휜 목재나 나무 둥치까지 건축재로 쓰는 것을 도랑주라고 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하였다고 개소리 정신승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저 곧은 목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옥 난방 한다고 주변 산이 민둥산됐다.
https://www.youtube.com/watch?v=kKq1phEDRHo
그나마 기와집이 특유의 독창적인 형태와 안정적인 중채도로 2000년도 이후 현대화에 성공한 케이스다. 화려한 장식 대신 재료 자체의 절제된 미 덕분에 한옥마을부터 상가, 관공서, 문화시설, 호텔 등 도시에서 그 범위를 넓혀나가는 중이다. 유교 선비 1승. 그래서 한옥에서 살고 싶어하는 씹선비들이 있는데, 한옥은 주제에 안 맞게 창렬한 가격이다.
특히 오리엔탈리즘에 뿅가는 외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도시 한옥지구들은 어느 정도 관광 효과를 보고 볼 것도 없고 돈이나 털어가는 명동 같은 곳보다 평도 상당히 좋은 편이다. 더군다나 이런 인기는 눈이 썩어버리는 제관 양식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있다.
여몽전쟁, 임진왜란, 일제강점기를 용케 넘긴 전통건축물들을 다떼려부순주제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비단옷을 입고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날을 안겨준다고 헛소리하고 주민들에겐 쏘오련 스타일 칙칙한 벙커 같은 아파트만 만들어준 혹부리는 무슨 생각을 하려나 모르겠다.
지나가는 1인의 뇌피셜[편집]
한옥이 비싼 이유는 바로 복잡하고 힘든 작업공정 때문인데 (대부분 못을 안쓴다)
요즘에는 작업공정을 간소화하고 현대화한 개량한옥(전통한옥 개조),양한옥 복합으로 내부를 중대형 아파트처럼 꾸미고 밖에 마당이 있는 구조로 짓거나 미국 중산층 목조주택 구조에 한국 기와랑 전통 흑벽돌 건축방식 첨가한 양옥 한옥 복합체 버전으로 지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나중에 북괴김돼지정권이 붕괴되었을때, 빨갱이스타일 벙커아파트가 가득한 평양과 개성등 도시지역에 심시티를 할때 중심지는 5~6층 양한옥 복합으로 짓고 외곽주거지는 중산층, 상류층들이 살 마당있는 개량한옥으로 짓고 교외는 서민들이 살 마당있는 양한옥 복합 주택으로 존나 뿌려대보자.
망한지가 20년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돼지새끼빨갱이들이 고래등같은 기와집을 지어준다고 생각했던 북한인민들은 자유민주주의로 무장한 머한민국이 지어준 한옥을 보면 존나 이불킥 해댈것이다. 이미 남한물을 빨면서 북괴<<<<<넘사벽<<<<<대한민국인걸 알아챈 북한주민들은 쌍수들고 환영하겠지.
회칠마감(아구토)의 폐단[편집]
회혼례첩-회혼례도/ 미상 / 18세기 / 국립중앙박물관
회칠이 전혀 되지 않은 깔끔한 모습을 보여준다.
평안감사향연도 중 일부 / 김홍도 / 1785년(정조 9년) 추정 / 국립중앙박물관
처마 끝에만 회칠이 되어있고 지붕마루는 깔끔하게 마감되었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를 보면 1655년경본, 18세기 모사본은 회칠이 없다가 19세기 모사본부터 처마 끝에 회칠이 등장한다. 물론 지붕마루 회칠은 없다.
후대로 가면서 한옥의 예술성은 무시되고 편의성만 추구하게 되면서 막새기와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게 된 것일까? 미적 감각이 점점 퇴보하는데 이걸 전통이라고 하는 게 민망할 수준이다.
2018 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 본상 수상작(링크). 역시나 지붕마루와 처마 끝에 회칠이 되어있는게 눈에 보일 것이다. 장담하건대 이 회칠 짓거리만 안 하면 지금보다 전통건축의 품격이 대폭 상승할 것임을 확신한다. 빼먹었는데 현판마저 한자로 써놨다. 과거 문화재 복원도 아니고 현대건축을 짓는데 있어서 한글을 배제하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를 그대로 옮기는게 전통은 아니다. 근데 회칠마감을 왕실건물에서 보기 힘든 것을 보면 돈아낄려고 시작한 병맛스런 악습인데 이를 전통으로 채택한게 문제다.
지붕마루와 처마 끝은 눈에 매우 띄기 쉬운 곳이다. 중국 건축, 일본 건축, 싱가포르 건축 등 동아시아 전통 건축 그 어느 곳을 보아도 이렇게 대충 마감하는 경우는 없다. 유독 한국 전통 건축에서만 덕지덕지 처바르는 회칠을 한다. 때라도 타면 뭐같음은 배가 된다.
지붕마루의 경우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에 양성바름을, 처마 끝에는 막새기와로 처리해주면 반듯하고 깔끔하게 처리되므로 문제가 없다. 하지만 양성바름은 궁궐 건축 일부에 한정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다. 제멋대로 휘어진 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하면 제법 운치있는 것과 다르게, 이런 회칠은 규칙성도, 규격도, 멋도 없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천박함과 동시에 건축에 정성을 다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준다.
왜 전통과자를 만들 때 다식틀에 찍어 내어 이쁘게 모양을 내겠는가? 보기 좋으라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처마 끝에 막새기와를 필수로 사용하고, 지붕마루에 회칠을 하지 않도록(최소한 드러나지 않도록) 마루막새기와의 마감에 신경써야만이 현대적 전통이라는 미학적 기준을 충족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문화재들도 기와 보수 시 회칠을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게 과연 지켜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전통인가를 진지하게 고찰해야 할 때다.
한옥마을[편집]
오리지널
- 개성한옥마을: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300채가 넘는 한옥이 보존되어있어 가치가 높다. 마이클 페일린(Michael Palin)의 북한 여행 다큐 프로그램에서 잠깐 엿볼 수 있다.
- 하회마을, 양동마을 : 유네스코 세계유산
- 낙안읍성 : 성곽안에 실제 거주중인 초가집 마을이 있다.
- 외암마을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곳
- 북촌한옥마을 : 원래는 사대부들의 대저택이 있던 곳이었지만 일제시대에 이런것들 전부 허물고 개량형 한옥들을 보급한 곳
- 남산골한옥마을 : 고관 대직들이 살던 북촌과 다르게 갓수 양반들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옛 한옥 몇채 옮겨서 만든 사람 하나 안사는 마을
- 전주한옥마을 : 그냥 한옥 모양의 번화가다. 그런 주제에 2조원대의 적은 예산으로 제대로 뽕 뽑아낸 사례
- 은평구 한옥마을 : 작정하고 주거용 현대 한옥들로 조성된 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