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테레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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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초상화를 보면 상당한 파오후였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발부르가 아말리아 크리스티나 Maria Theresa Walburga Amalia Christina | |
생년월일 | 1717년 5월 13일(출생) 1780년 11월 29일(63세로 사망) |
---|---|
국적 | 오스트리아 대공국 |
출생지 | 빈 |
종교 | 로마 가톨릭 |
소속 | 합스부르크 가문 |
경력 | 신성 로마 제국 황후, 독일, 이탈리아의 왕비, 오스트리아 여대공 |
표방이념 | 보수주의 |
젊은 시절까지는 존나 예뻤다. 당대 유럽에서 엄청난 미인으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애 16명 낳고 스트레스를 처묵처묵하면서 풀어서 파오후로 진화함.
ㄴ 완전히 샬롯 링링 현실판이네.
ㄴㄴ 좆기를 16명이나 까면서 살이 안불어나면 그게 더 신기하긴 함
혼수로 신성로마 제국 제관을 해간 여자.
ㄴ 이외에도 독일왕, 이탈리아왕의 제관을 혼수로 해갔다.
실상은 남편이랑 아들 앞세워서 정치한 실세
국가 중대사를 논의할 때 남편이 커튼 뒤에서 자기 마음에 안드는 결정을 내리려하면 크흠크흠 거렸다고
잠시만 이거 완전 최순....
당신 누구야? 읍읍!! |
그러나 동양인들에겐 마리 앙투아네트 애미로 유명하다.
합스부르크 로트링겐 가문의 시조[편집]
이 여자 대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가 단절되고 남편인 프랑수아 에티엔 로렌 즉 프란츠 1세의 로트링겐 가문으로 왕조가 교체되어야 하겠지만.
문제는 로트링겐 가문은 듣보였다. 결국 반 데릴사위 처럼 되어버려서 합스부르크에게 먹힌셈...
이 남자와 이 여자의 아들은 오스트리아 제위를 받을게 뻔하고. 동시에 로렌(로트링겐)영토까지 상속받을수 있는데, 알자스 로렌은 1648년 30년 전쟁 종전으로 신롬에서 프랑스가 전리품으로 빼았아온 영토였다.알다시피 유럽 중근세사는 프랑스 동진(신롬침공)을 막기위해 나머지 유럽국가들이 미친듯이 개극딜하는 역사였기 때매 고생은 고생대로 했는데 결혼 한방으로 어렵게 얻은 영토가 날아가니 프랑스로서는 미칠지경.고로 이렇게 되면 다시 신롬에게 총알한방 안쏘고 반환되는 셈이고, 프랑스는 자국 영토에 철천지 원수인 합스부르크 본토랑 맞대는 동네가 하나 느는 셈이 된다.
이에 따라 마누라가 3국분할로 처묵해서 다스릴 나라가 날아가 버린 폴란드 왕에게 대신 로트링겐을 줬다가 폴란드 왕이 사망하면 다시 프랑스로 반납하기로 합의한다.고로 결혼대가로 고향까지 프랑스 왕한테 줘야했다. 안습. 그 대가로 처가한테 이탈리아 토스카나 대공국을 영지로 받긴했지만, 고향을 잃어버려서 많이 서운해 햇다고 한다.
그래도 저 옜날에 유럽왕족 치곤 특이하게도 연애결혼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먼저 썸을 느꼈고 양가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져 정식으로 결혼했다.
금술이 노무 좋아서 자식을 16명이나 낳았는데 그중 한명이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11녀) 걔가 프랑스에 시집가서 마리 앙뚜아네트가 되었다.
그녀는 시집간 딸들에게 남편을 공경하고 남편말을 잘 들어라는 그 시대에 당연한 상식을 가르쳤지만, 정작 그녀가 실천을 안했다.
왜냐하면 혼수로 신성로마제국 제관을 해갔기 때문이다...심지어 왕위계승 전쟁때 남편이 딱 한번 정치전면에 나서서 강화회담에 임했는데, 이 여잔 커튼 뒤에 몰래 숨어있다가 자기 마음에 쪼금이라도 협상내용이 맘에 안들면 엣헴엣헴 거리면서 남편을 압박했다. 그럴거면 왜 숨어..???
그러나 이후부터는 물론 프란츠 1세는 마누라 하자는대로 다 해야 하는 신세로 되돌아가서 평생 정치에 손을 안 댔다... 별수있나 듣본데...
그래도 합스부르크 뒤에 로트링겐을 적을수 있게되어 존재감을 오늘날까지 알리게는 되었지만 너무 길어서 그냥 합스부르크로 써버리고 만다. 특히 머한. 안습2
치세[편집]
외치[편집]
제위 초반에 전쟁만 했다하면 영토를 날려먹는등 실패만 일삼은것은 본래 그녀는 왕위계승권과 거리가 멀어서 당대 공주님들이 받을 신부수업이나 받았지 제왕학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본래 게르만권은 프랑크-신성로마제국 이래로 살리카법때문에 남자에게만 제위가 가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이고 그때문에 뒤에 설명하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터지는것이다.거기다가 본래 물려받을 남자형제가 있었다.그런데 위로 오빠두명은 일찍 요절했지만 부왕 카를6세는 마리아가 장성했어도 아들낳기를 포기하지는 않았는데 그래서 뒤로 남동생 두명이 계승권을 가졌으나 둘다 요절하면서 덜컥 나라를 물려받게 되면서 문제가 시작된것이다.
그렇다고 왕위에 오른뒤 곧바로 임신+출산의 반복 크리라 제왕학을 속성으로라도 배울 시간은 그녀에게 없었고 어렸을적엔 조신한 공주님으로 궁궐에서만 자랐고 성인이 된후엔 임신+출산머신이 되어 또 궁궐에만 갖혀살다 보니 그덕에 경험도 태부족이었다. 그래서 나선게 남편이었고 이때 남편이 어떻게든 오스트리아가 유리하게 협상하려 노오력했지만 그때마다 이여자가 참견했고 그리고 망했다. 이후 질렸는지 남편인 프란츠 황제도 정치에 관심끊고 남들 정계입문할 나이에 일찌감치 은퇴생활이나 즐기면서 꿀빨게된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편집]
이 여자 시절에 전쟁도 꽤 치르게 된다. 굵직한거만 보자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과 18세기의 제1차세대전 이라는 7년전쟁이다.
즉위초, 아직 왕으로선 뉴비였던 시절, 이때가 이여자 23살때 였다. 거기다 임신중이었고..마리아 테레지아 즉위이전 부왕인 카를 6세의 말년의 군사적 실패때문에 세르비아와 왈라키아를 오스만에게 상실하는등의 이유로 오스트리아를 만만하게 보는 기류가 국제적으로 생겼다. 거기다가 갑자기 즉위한 어린 여자애라고 다들 깔봐서 일어난것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다.
배경은 합스부르크 가의 직계 계승자가 될 아들은 위에서 설명한대로 일찌감치 죽어버려서 큰딸인 이 여자만 남았기 때문에, 이제 합스부르크 왕가는 단절되게 되며 가까운 친척가문이 상속받게된다. 이를 막고자 부왕이 국사조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신롬과 독일왕작외엔(여계 승계를 금한 구 프랑크 제국령 국가들이 따르는 살리카법 때문이다.) 오스트리아대공위와 헝가리 왕위등을 이 여자가 계승하여 합스부르크 왕실의 영토가 다른가문에 상속되는것을 막으려 했으며, 부왕의 생전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이 여자가 즉위하고 나자 사방에서 테클을 걸기 시작한다. 그 중 한사람이 마리아와 혼담도 오갔다던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이다.
대왕은 자기 부왕이 생전에 승인했던 국사조칙 승인을 거부하면서, 그 대가로 슐레지엔을 내놓을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꿀땅인 슐레지엔을 오스트리아가 놔줄정도로 호구는 아니었으므로 전쟁이 발발, 여기에 신롬과 오스트리아 제위를 요구하는 바이에른, 프러시아 동맹인 스웨덴, 프랑스, 덩달아 프랑스 친척인 스페인과 나폴리까지 이탈리아 전선으로 참전한다. 이때 오스트리아의 동맹은 러시아와 전통의 동맹 영국이 참전한다.
이때 그녀는 헝가리 왕국의 사도왕을 겸임하는 중이었는데(동군연합) 헝가리 왕국은 비록 수백년간 오스만과의 대결로 황폐화 되었지만 그래도 지도 펴보면 본토(?)인 오스트리아보다 크기는 더 크단걸 알수있다.아닌게 아니라 이 헝가리를 오스만으로부터 탈취함으로서 국토면적에서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프랑스와 맞먹게 되었다. 이때문에 헝가리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야만 하였다. 그래서 아들을 낳자마자 헝가리 귀족들한테 달려가서 따끈따끈한(?) 아들을 들이밀며 지지를 호소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림으로도 남겨져 있는데 신혼(?)때 아직 안 뚱뚱한 마리아 테레지아를 볼수있다.
그러나 결과는 물이오를대로 오른 머왕이 오스트리아 군을 보이는 족족 다 쳐바르며 승리하여 공업지역 슐레지엔을 냠냠. 이 여자에게는 세수의 22퍼인 꿀땅이 날아가서 오지게 속이 타들어 갔을것이다.
7년전쟁[편집]
이에 빡친 마리아 테레지아는 복수를 결심한다. 지난전쟁에서 식민지 방어 때문에 머륙에서 전투에 소극적이었던 영국대신 복수전을 위해서 머륙 전통의 강호이자 원수지간인 브르봉 가문의 프랑스에 접근하였고 (동맹의 역전) 이를 위해 프랑스 왕세자빈으로 11째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로 알려진 걔를 시집보냈다.
그렇게 준비를 단단히 하고 머왕과 한판 더 붙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7년전쟁이다. 이때 프랑스의 마담 퐁피두르(후궁)와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 와 3부인 동맹맺고 프러시아는 3면에서 포위되는 형세에 놓았으며 프리드리히 머왕을 자살직전까지 극딜하나 엘리자베타 여왕이 급사하고 왠 독빠 표트르 3세가 즉위하면서 나가리 되었다.
폴란드 분할(1차)[편집]
그녀의 업적중 하나가 바로 폴란드 분할이다. 폴란드는 국왕이 있었지만 선출제로, 사실상 귀족 공화제 국가로 운영되는 나라였다. 중세의 강호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마리아 테레지아 연간쯤 되면 나라가 망해가는 중이었고, 이걸 어떻게든 타계하고자 국왕이 개혁작업에 착수한다. 하지만 폴란드 귀족들은 나라가 멸망해도 자기자신만 잘먹고 잘살면 된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러시아를 끌여들어 간신히 제압한다.
문젠 엄격 진지 근엄한 성격의 도덕 주의자였던 터라 까였다. 프리드리히 머왕은 저여잔 팡팡 울면서도 먹을껀 다 먹는 여자라고 평했다.
하지만 이로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강해졌다. 이렇게 된다면 다음 선거에서 러시아 제국의 여제인 예카테리나 황제가 폴란드 국왕에 즉위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이를 위협으로 느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머왕의 주제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머왕이 합의하여 3국이 폴란드를 분할한다. 이로서 폴란드는 레알 병신국가로 추락했고 이후 나라를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시도는 귀족들의 반란과 이들을 등에 엎은 외세에 의해 좌절되고 이후 2차 분할을 거쳐 3차분할로 완전히 멸망해 사라진다. 안습.
내정[편집]
어째 전쟁만 하면 털리는거 같지만, 상대가 나폴레옹과 히틀러 마저도 존경을 표하는 프리드리히 머왕이 이끄는 역시 나폴레옹이 말한 대포알에서 태어난 국가라는 군국주의 머장 프러시아란게 운이 없었다.(+ 희대의 병신 표트르 3세도 잊지말자.)
그녀는 전후 피해를 수습하며 엄격 근엄 진지한 도덕주의자 답게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옆나라 프랑스의 루이 15세, 16세가 병신짓만 일삼다가 나라를 말아먹고 급기야 자기 가족까지 단두대로 이승에서 하직시키고 더불어 왕조를 멸망시킨것과는 대조적으로 나름 나라를 잘 굴렸다.
- 유럽에선 가장 빠르게 의무교육제도를 법제화 하고 전국에 초등학교를 설립한다. 그리고 통일된 교과서를 배포하였다.
이후 의무교육을 아예 헌법에 박은건 나폴레옹 법전 부터라고. - 엄근진한 도덕주의자 답게 창녀와 포주들을 잡아 족치고 성매매또한 금지시켰다. 잡혀들간 사람들은 쳐맞고 강제 노동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사스가 히틀러가 태어난 나라의 여왕님 답다. - 그녀 자신은 수꼴이지만, 밑에 신하들이 계몽주의자들이 늘어나자 이에 따랐으므로 진보적 정책을 펼쳤다. 헬반도의 어떤 공주님관 다른 모습이다.
남편이 40대에 죽자 황제 물려받은 아들을 갈궈댔다. 근데 엄마가 유산을 다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까라면 까야지. 근데 아들은 엄마와 달리 계몽주의자였다.아마 이집구석도 아침마다 밥먹다 정치이야기 튀어나오면 분위기 작살났을듯 싶다... 실재로 서로 퇴위,실각 시키겠다고 협박한거 보면 가족끼리 정치이념 다르면 정치로 대화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 알수있다.
여기에 그녀의 남편이 재정적으로는 환상적인 능력자인 덕도 있었다. 7년 전쟁을 하면서 오스트리아는 11년치 국가 수입을 다 때려박았다. 거기에 승리도 못했으니 얻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재정적 수환을 발휘해서 이걸 다 덮어내고 오스트리아는 왕실 예산을 편성하지 않음에도 후손들이 이 때 벌어들인 돈의 이자만 써도 될 정도였다고 한다.
성격[편집]
으래 저런 여자들이 그렇듯 당찬 성격이다. 남편의 기를 억누르고 나이먹어서도 황제인 아들앞에 주눅따윈 들지 않았고 오히려 퇴위시킨다고 협박했다. 물론 아들도 실각 시킬것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물론 둘다 결국 안했지만.
젊을적엔 예쁘고 날씬하고 무엇보다 집안빨이 쩔기때문에 인기있는 공주였다. 성격도 쾌활하고 윾쾌하기도 했고. 소시적엔 밤세도록 술마시고 노는것도 즐겼다고 한다. 남편이랑 썸타고 연애할때 별 시시콜콜한걸 시녀들에게 다 말한거 보면 털털한 성격이었듯하다. 단 전근대 서양왕실의 시녀들은 왕족을 지근거리에서 수행해야 해서 고위귀족 여식들 중에서 뽑았기 때문에 또래의 비슷한 수저그룹들과 수다떠느라 그런거라 그닥 이상한일인건 아니다. 애초에 서양 전근대 귀족들의 칭호, 관직명은 이런 시종직에서 유래했다.(파티에서 이름 불러주는 사람에서 근위대 명칭이 유래했다던가 왕실 마구간 지기에서 기병총사령관 명이 유래했다는 식이다)
그러나 40대에 얘16명을 낳은후 살이 불기 시작했고 남편마저 일찍 사망하면서 거기에 격무까지 더해져 스트레스를 폭식으로 풀면서 파오후로 진화, 다시는 처녀적의 쩔어주는 몸매로 회귀하지 못했다.
얘들이 워낙 많았고 바빠서 죽을 지경이라 거진 방목하듯 키웠다. 그래도 몇몇 자식들만 총애하고 나머진 방치플레이를 시전해서 그거때매 평생 한 품은 자식들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조선의 영조머왕 급은 아니라서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기는 시전하지 않았다.
비록 목장주마냥 방목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최중요 동맹국인 프랑스로 시집가자 짧게나마 맨투맨으로 직접 가르쳤다고 하며 시집간 후에도 편지로 계속 갈궜다. 일례로 남편 루이 16세가 ㅂㅅ이라고 까자 남편한테 그럼 못쓴다고 한마디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성격도 나이 먹을수록 엄근진한 수꼴로 퇴화하였고 우울해졌다. 그러니 여기서 얻는 교훈은 파오후들은 쫌 나가서 운동해라.
보유작위[편집]
여제인줄 헷갈릴수도 있지만 이양반은 한번도 황제 먹은적이 없다. 게르만권은 살리카 법을 따르기 때문에 여왕, 여제가 즉위할수 없기때문.
황후/왕비[편집]
- 신성로마제국 황후/황태후
- 독일의 왕비/왕태후
- 이탈리아 왕비/왕태후
왕위(여왕)[편집]
- 헝가리
- 보헤미아
- 달마티아
- 크로아티아
- 슬라보니아
- 갈라치아
- 로도메리아
대공(여대공)[편집]
- 오스트리아
- 트란실바니아
공작(여공)[편집]
- 부르고뉴
- 슈타이어마르크
- 케른텐
- 카르니올라
- 브라반트와 림부르크
- 룩셈부르크
- 겔데른
- 뷔르템베르크
- 상하 슐레지엔
- 밀라노
- 만투아
- 파르마
- 피아첸차
- 구아스텔라
- 아우슈비츠
- 자토르
공작부인/미망인(공비)[편집]
- 로트링겐과 바르 공작의 공작부인/미망인,
- 투스카나 대공작의 공작부인/미망인
변경백[편집]
- 모라비아
- 부르가우
- 상하 라우시츠
백작(여백작)[편집]
- 합스부르크
- 플랑드르
- 티롤
- 헨네가우
- 키부르크
- 고리치아그라티스카
- 나무르
여영주[편집]
- 웬디쉬마크와 메클린
다쓰고 나니 존나게 많다는걸 알수있다. 이거시 유럽 머륙 대귀족 가문의 기상...왕관만 다 써도 목 뿌러질듯.
저 중에 상실한 영토도 있고 실질 영토없이 이름뿐인 작위도 있을수 있다.
기타[편집]
유로파갤에서 여신취급받는다
유로파4에서 오스트리아 잡으면 여군주 이름으로 랜덤하게 등장한다.
저 초상화는 지금으로 치면 11살무렵인 초딩때 그린그림이다. 즉 로린이때 그림보고 마리짱 하앍하앍 거렸다는거다. 물론 저당시엔 대체로 15살부터 성인이나 준 성인 대우를 해줄정도로 조혼도 일반적이고 이게다 평균수명이 짧은 시대여서 그랬다.
하지만 아직 살이붙기전 젊은시절에 그린 엄근진한 초상화도 있는데 나름 군주답게 근업하게 그려졌지만 그래도 어렸을적 얼굴이 남아있어 당대 윾럽인들이 좋아할만한 미인으로 성장했다. 물론 40대를 넘어가면 백인 특유와 무엇보다 다산의 상징으로서의 급노화와 폭식때매 그없
사치에 열중하던 철딱서니 없던 마리앙뚜아네트에게 영국 명예혁명을 언급하면서 느그집도 폭동(혁명) 일어나면 클난다 정신차려라 이거사 라고 갈궜지만 씹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사망한 뒤 딸 부부에게 닥친 결과는...
애를 16명 낳았고 그 중 2명(료제프 2세, 레오폴드 2세)이 왕됐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아줌마의 막내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