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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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편집]
- 이름 : 현봉학(玄鳳學)
- 출생 : 1922년 6월 23일 함경북도 성진시
- 사망 : 2007년 11월 25일 뉴저지
- 학력 : 펜실베니아대학교 대학원 의학석박사(1956,1959)
- 가족 : 현원국(父)[1], 신애균(母)[2]
개요[편집]
흥남 철수를 기획하여 10만여 명의 함경도 주민들을 구한 영웅.
함흥고보,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했으며 8.15 광복 이후 소련군정이 설립됨에 따라 월남했다. 1947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일하다가 이화여대 영어강사였던 윌리엄스 부인의 주선으로 버지니아주립 의과대학에 2년 간 유학을 하고 왔다.
1950년 3월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다가 6.25 전쟁이 터지니까 해병대의 문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소속부대가 고성군으로 북진함에 따라 그곳에 머물다가 에드워드 알몬드 10군단장을 만나 그의 민사부고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버지니아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마스터한 사투리 덕분에 버지니아 출신인 알몬드랑은 엄청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중공군의 개입 이후 알몬드가 군머와 무기를 들고 철수를 하려다가 머국적인 흥남 철수를 실행한 것에는 이분의 공덕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분이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인 레너드 P. 라루선장과 알몬드를 포함한 미군의 높으신 분들에게 "빨갱이들이 여기 점령할 때 저 피난민들은 100% 죽을 텐데 꼭 데리고 가게 해달라."라면서 빌었고 같이 있던 국군 장교들은 "그래, 현봉학성님 말이 맞다. 피난민들 데리고 가자. 안 데려갈 거면 ㅅㅂ 우리가 걸어서라도 피난민 데리고 철수할 거다."라고 현봉학 성님을 지지하면서 흥남 철수가 시행됐다.
미군은 여기서 원래 자기네들의 차량을 싣고 후퇴하기로 했지만 현봉학 박사님이 제발 피난민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그런 현봉학 박사님의 말을 인용해서 피난민들부터 배에 꾸역꾸역 쑤셔 넣어서 모든 선박을 정원초과로 만들었고 이후 원래 싣고가기로 했던 차량들을 원산항에 가지런히 모아 놓은 뒤 함포사격으로 다 때려 부셔버렸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게, 피난민들을 살리기 위해서 저 장비들을 싣고 가지 못하는데 만에 하나 저 장비들을 중공군이 노획할 경우 저것들이 적의 장비로 사용되어 미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함포사격으로 전부 부셔버린 것이다. 피난민들을 살리려고 차량들을 깡그리 박살낸 거다.
휴전 이후 상기한 펜실베니아대 대학원에 진학, 석박사학위를 따고 1961~1962년 동안 뉴저지 플레인필드 뮐렌버그 메디컬센터 병리전문의, 1962년~1987년 동안 뮐렌버그 메디컬센터 연구소장으로 재직했으며 여러 의학대학에서 병리학, 혈액학 교수로 재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