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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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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기(李正己)
이명 본명 이회옥(李懷玉)
출생 732년 하북도 영주(營州)
사망 781년
국적 당나라

고구려유민출신 당나라군벌.

고선지마냥 대륙에서 활동한 고구려인의 기상!이러면서 빨아주지만 유민의식같은거 없던 당나라판 조선족이다.

암튼 이새끼는 26살이 되었을 때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라고 당나라발해, 거란, 를 견제하기 위해 설치한 군정조직의 대장 왕현지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을 죽이고 고종사촌 희일(希逸)[1]을 절도사로 내세웠다. 이후 산동성 청주로 가 군공을 세우고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762년 안녹산의 난을 진압한 뒤 안녹산의 사조의(史朝義)를 토벌할 때 정주로 갔다. 이때 그는 위덕절도사 이보신(李寶臣)과 짝짜꿍하고 제대로된 정치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치군인이 되길 꺼려했던 희일이 빤쓰런하고 안사의 난이후 당나라가 지방 군벌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꼴이 된것을 지켜본 이회옥는 평로절도사가 되었고 청주일대인 황하하구해안지역을 점령했다.[2] 당 조정으로부터 평로치청절도관찰사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 검교공부상서 어사대부 청주자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檢校工部尙書御史大夫靑州刺史)라는 관직과 '정기(正己)'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여기서 '압신라발해양번사'는 발해, 신라의 사신과 교류를 관장하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신라, 발해와의 해상교통까지 독점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산동에서 생산되었던 소금으로 또 엄청난 돈을 벌었다.

뒤에 조정으로부터 또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서우복야(檢校司空同中書門下平章事尙書右僕射)라는 관직을 얻고 요양군왕(饒陽郡王)으로 봉해지면서 안녹산의 난 이후 당나라 최강의 지방 군벌로 뜨억상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조정의 중앙정치에까지 개입하게 되었다. 대력연간(766~779)중 설숭이 뒈짖하고 이영요(李靈曜)가 욷높을 일으키자 각지의 여러군벌과 중앙군이 땅끄로 밀어버리고자 했는데, 이때 숟가락을 얹어서 조주(曹州, 산동성 정도현), 복주(濮州, 산동성 견성현), 서주(徐州, 강소성 서주시), 연주(兗州, 산동성 연주구), 운주(鄆州, 산동성 동평현)등 15개주를 쳐묵쳐묵했다. 그리고 청주에서운주로 자기 집을 옮겨오고 아들 이납(李納)과 심복 장사(將士)에게 그 땅을 나눠 다스리게 했다.

아마 낙양 바로 쳐먹을려고 운주로 옮긴것 같은데, 조정의 인실좆을 당하기 딱좋은 위치였던건 전혀 생각못했던것 같다. 그래서 변주성(汴州城, 카이펑)을 쌓은 당의 감시를 받았고, 본인역시 군머를 제음으로 옮겨 당중앙군을 견제했다가 시발 이렇게 통제받을빠에 그냥 작살내버리자 하고 욷높을 일으켰다. 이정기는 진압군으로 투입된 당군 9만2천을 족치고 낙양을 쳐먹을려고 했지만 781년 49세나이가 되었을 때 악성종양으로 뒤지고 말았다.

그가 죽은 뒤 아들 이납은 그의 죽음을 숨겼다가 나중에 당에 그의 죽음을 알리고 평로절도사와 치청절도사직을 세습하게 해달라고 당 덕종에게 요구했다. 작은 산동과 하남일부를 쳐먹은 거대왕국을 제대로 족치는데 리스크가 크다고 판단한 당나라는 그냥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이정기는 태위(太尉)로 증직되었으며 이납은 평로군절도치청주관찰사(平盧軍節度淄靑州觀察使)가 되었다.

이납으로 이어진 이정기일가의 산동 소왕국은 이정기포함 4대 60년동안 유지되었다.

  1. 희일의 어머니가 그의 고모였다.
  2. 청주(靑州, 산동성 청주시), 치주(淄州, 산동성 치박시), 제주(齊州, 산동성 제남시), 래주(萊州, 산동성 래주시), 기주(沂州, 산동성 임기시), 밀주(密州, 산동성 고밀시), 덕주(德州, 산동성 덕주시), 체주(棣州, 산동성 혜민현 동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