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산 - 영변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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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산 - 영변전투 | |||
날짜 | 1950년 10월 26일 ~ 1950년 11월 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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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평안북도 운산군, 영변군 | ||
결과 | 중공군의 승리, 멸공통일 좆망행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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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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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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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 |
중공군이라고?! 어림도 없다! 암! 아↗↗↗↗↗↗↗↗암!!!! |
” |
— 당시 머통령
|
멸공통일을 앞둔 상태에서 국군 + 미군이 처음으로 중공군에게 줘털리고 훗날 1.4 후퇴라는 눈물겨운 후퇴의 스타트를 알린 전투.
초기[편집]
복날 개패듯이 북괴군을 뚜까패고 평양 탈환을 한 우리의 한미연합군. 이중 미 제8군 좌익군단은 1950년 10월 24일 청천강을 넘어 갔으며 휘하에 미 제1군단, 제24사단(+영국군 제 27여단), 그리고 백선엽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을 휘하에 두었는데, 이중 1사단은 우측사단으로 안주군, 운산군을 넘어 삭주군의 수풍댐으로 진격, 미제1군단과 제 24사단은 박천군찍고 신의주시방면으로 진격하고 제 1기병사단을 평양에 잔류시켜놓은 상태였다.
짱깨 왔쪄염 뿌우[편집]
조재미 대령 휘하의 15연대는 상탄천따라 북서쪽으로 진격, 김점곤 대령 휘하의 12연대가 좌측에서 남면천따라 서쪽으로, 김동무 대령 휘하의 11연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둘의 후방을 맡고 있었다. 근데 15연대가 미 제6군전차대대 D중대따라 상탄천을 건너 운산군청 바로 북쪽에 있는 조양동으로 갔다. 이곳에서 알수없는 집단의 사격을 받았고 이에 대한 보복사격으로 맞받아쳤다.
40여분이 지난, 1950년 10월 25일 11시 44분, 조재미 대령은 뭔소린지 못알아먹을 말을 하는 포로한명을 생포했다.
국군 : 넌 누구니?
??? : 저 중국사람인데염?
국군 : 혹시 한국인인데 중국사는 조선족이니?
중공군 : ㄴㄴ 난 광동성출신 중공군인데염?
국군 : 엥? 중공군? 미8군은 북괴에 개입안할거라 했는데 왜왔냐? 하 시발 좆됬네... 암튼 중공군 얼마나 있냐?
중공군 : 운산하고 희천에 2만정도 있는데염?
오 시발. 미 8군은 중공군 개입없다고 해서 믿었는데 이리 많을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멘붕상태에 들어갔고 백선엽은 미국행님 좆됬습니다 하면서 이를 밀번 1군단장에게 보고했다. 근데 이후 행보를 보니 최종적으로 미 8군 맥아더는 씹은거같다.
오후에 15연대는 중공군 포로 3마리를 또 데리고 와서 평양으로 보냈다.
중공군의 공세와 맥아더의 트롤링[편집]
흐미 시발 중공군 제39군 예하 제 115, 116, 117사단이 운산주변 야산에 산불을 내 어그로를 끈 상태에서 기습, 국군 1사단에게 선빵을 날렸다. 이에 운산지역에 있던 모든 국군부대는 발이 묶이게 되었고 12연대는 진지 겨우 지키고 15연대는 중공군의 대공세에 좆되기 직전까지 갔으며 11연대가 증원군으로 이동중 용산동일대의 도로가 중공군에게 차단당해 포위당하는 불지옥 무스펠하임에 이르게 되었다. 10월 27일 아침에 10대의 C-119수송기가 탄약보급을 해줘서 11연대가 용산동을 수복하고 15, 12연대가 2~3km진격해서 숨고르기는 성공했다.
그런데도 우리의 인성쓰레기 맥아더는 24사단은 안주찍고 박천찍고 쭉쭉올라가는데 니들은 뭐하냐? 중공군도 북괴군 증원이니가 똥꼬털수준일꺼고 그거 얼른 제낀다음 16시부터 압록강까지 진격가즈아로 일관했다.
10월 28일, 운산정면에서 2명의 중공군을 생포했지만 1사단이 뒤지기 직전까지 갔던 것을 보고도 우리의 제8군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을 부정하고 행복회로 돌리면서 평양에 꼬라박았던 1기병사단을 수풍댐에 꼬라박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빨갱이잔당이나 반공청년단이 사고 안치나 관리만 하던 우리의 기병사단중 8기병연대가 10월 29일 운산에 도착, 다음날 제 5기병연대가 도착, 이중 8기병연대는 1사단 15연대의 전선을 인수하기 위해 전방으로 올라갔다.
8기병연대 2,3대대는 국군 1사단 12연대가 점령한 고지를 무난하게 인수받았지만 1대대는 영좋지 않은 상황으로 인해 기존 15연대 2대대가 점령한 고지의 후방에 있는 진지를 점령, 16시에 1대대 15연대가 1대대가 점령한 진지를 통과해 철수하면서 진지교대가 완료되었다.
결과적으로 운산의 서부는 천조국 8기병연대 3개대대, 동부는 국군 15연대 1,3대대가 배치되었고 12연대는 입석으로 철수한후 재편성에 들어갔으며 사단예비인 11연대는 동으로가 8사단과 연결을 시도했지만 실패. 하지만 바로다음날 11월 1일 미 제 5개병연대와 1개대대다 구장동에 이르는 도로의 중간지점까지 진출해서 커버. 한편 신의주까지 30km를 남겼던 미24사단은 안주시를 노리는 중공군 제 38군, 제 40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1월 1일 오후, 운산과 후방간 연결통로중 운산 -용산간 도로가 중공군에게 털리고 퇴로가 운산 - 영변간 도로만 남는 상황에 이른다.
좆망[편집]
흐미 씨발 퇴로가 하나밖에 없던 상황에서 천조국 1군단장은 11월 1일 20시, 안주에서 사단장들을 모아 운산 국군 15연대와 미군 제 8기병연대는 용산동, 영변도로로 철수해 청천강에서 교두보를 확보, 쭉쭉 올라가던 24사단은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일단 철수는 해야지?하면서 8기병연대는 당일 23시에 철수명령을 받고 자정이후 새벽에 2,1,3대대순으로 철수를 했는데, 망할 남단의 3대대를 뺀 모든 대대가 철수명령들어오기 2시간 전부터 중공군과 대판 싸우고 있었다. 결국 1대대는 운산에서 흩어져 입석으로 철수, 2대대와 지원포병 1개포대, 전차 1개소대는 중공군의 매복공격을 받았으나 입석까지 철수했다.
이랬더니 3대대가 중공군에게 포위되는 엠창같은 상황에 이르렀다. 운산남쪽 3km에 있던 3대대 본부옆 도로에는 11월 2일 3시 대대모든 차량이 남으로 늘어선채, 전방에서부터 철수중인 소총중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무렵 상초동에서 교량을 경비하던 M중대 2개분대와 미 70전차대대소속의 1개 전차소대는 국군으로 보이는 1개 중대규모의 부대가 그들 옆에서 북상하는 것을 목격했고 이들은 '에이뭐... 국군이니 괜찮겠지' 하면서 보고를 안하고 그냥 넘어갔다.[1]. 근데 뭥미? 이새끼들 중공군이었다. 한마디로 그냥 보고를 안하고 넘어간것이 큰 실수가 됬다는 것이다.
결국 3대대는 기습공격을 받고 1시간반뒤 소총중대가 철수할 때까지 불지옥 무스펠하임을 방불케하는 공방전이 이어졌다. 여기에 3개대대가 존나 갈려나가 부상병 170명, 남은병력 200명, 전차 3대만 남았고.... 미 제1기병사단은 7기병연대 1개대대를 제5기병연대에 배속, 3대대를 구하라고 했는데 포위망을 못뚫어서 GG쳤다. 이날 오후 늦게 1군단장은 1기병사단장에게 '구출이고 뭐고 제끼고 청천강 남쪽으로 철수'를 지시했다.
위에 불쌍한 3대대 병력은 중공군의 포위속에서 2일을 더 버텼지만 80명이 더 갈려나가고 포위망을 뚫지 못하는 눈물겨운 싸움이 되었고 11월 4일 오후, 부상병의 간호사를 자청한 군의관과 250명의 부상병을 남긴채 200여명의 장병들만 야간에 중공군의 포위망을 겨우 벗어나 탈출했다. 결과적으로 이 8기병연대 3대대는 이 중공군의 포위에서 600명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장교 10명을 포함한 210명만이 살아남았다.
이후[편집]
한미연합군은 11월 2일 ~ 3일간 청천강으로 철수하고 청천강에 새로운 전선을 점령했다. 이후 중공군도 질수없뜸!하고 제38군, 제39군, 제40군을 군우리, 박천지구에 꼴아박았지만 GG치면서 11월 5일,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윾럽전선새끼들 꿀만 빨다왔음 ㅇㅇ이지랄 떨면서 갓커센세 따시키던 맥아더는 후빨러가 담당하는 전선에 몰빵때려줌에 따라 지원이 개판되고 중공군의 게릴라전이 대박을 터뜨림에 따라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한달만에 평양까지 고속 삭제당하고 12월에는 38선근처까지 내려가게 되었다.
- ↑ 꼭두새벽에 지칠대로 지쳤다보니 동양인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