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식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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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식렴(王式廉) | |
출생 | 미상 |
본관 | 개성 왕씨 |
사망 | 949년 |
시호 | 위정공(威靜公), 호기위 태사 삼중대광 개국공(虎騎尉 太師 三重大匡 開國公, 추증) |
경력 | 군부서사, 좌승, 광국익찬공신, 대승, 호기위태사삼중대광개국공 |
국적 | 신라, 고려 |
가족 | 아버지 삼중대광 왕평달, 사촌형 왕건, 아들 왕함윤, 왕함순 |
후삼국시대에 활동한 고려의 군인. 평양개척만 해왔다보니 후삼국전쟁사에서 비중이 별로없다.
군부서사(軍部書史)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는데, 고구려멸망이후 300년가까이 황폐화되었다가 금용의 투항으로 수복하게 된 평양을 복구하기 위해 그를 평양으로 보냈다.
평양에 부임했던 그는 평양의 재건을 위해 황해도지역의 주민들을 사민시키고, 안수진(安水鎭), 흥덕진(興德鎭)등의 성을 쌓았으며 여러가지 공로를 인정받아 이래저래 관직을 옮기다 좌승이 되었다. 왕식렴의 오랫동안 평양을 통치했는데, 사직을 지키고 땅을 넓히는 것을 자신의 모토로 삼고 묵묵히 할 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왕규의 난이 일어나자 평양에 있던 자신의 군대를 거느려 왕규의 반란군을 깨강정을 내버렸고 혜종은 광광울면서 그를 광국익찬공신(匡國翊贊功臣)의 호를 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