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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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世奉
프로필[편집]
- 출생 : 1896년 7월 15일 평안북도 철산군
- 사망 : 1934년 9월 20일 만주국 봉천성 환인현 대랍지구
- 호 : 벽해(碧海)
- 이명 : 양서봉(梁瑞鳳), 양세봉(梁世鳳), 양윤봉(梁允奉)
상세[편집]
똥수저 농가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요단강을 건너면서 이른 나이에 압록강 건너 중국인 지주 밑에서 노가다를 하면서 살았다가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삭주군과 의주군 경계에 있는 천마산에서 최시흥이 독립운동을 주도하자 이에 가담해 좆본군과 유격전을 벌였지만 좆본군의 통제를 이기지 못하고 천마산대가 만주로 런하자 같이 만주로 런하여 광복군 총영으로 들어갔다. 참고로 양세봉은 1909년 제너럴 안께서 좆토 좆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노릇노릇한 벌집핏자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자 제너럴 안을 존경했다고 한다.
1923년에는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가 창설되자 소대장이 되었다가 제3중대장으로 승진했고 1929년 만주에 있던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국민부로 스까되는 조짐을 보이자 국민부의 군대였던 조선혁명군의 제1중대장이 되었다. 당대 만주에선 공산주의가 확산되면서 빨갱이들의 활동이 매우 활발해지면서 만주의 수많은 무장 세력들이 좌우로 나뉘어 시빌워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조선혁명군 또한 1930년 8월, 군내의 좌우 세력이이 서로 시빌워를 벌이고 있었을 때 민족주의 애국보수였던 그는 우익을 지지했다. 이 시빌워는 2개월 만에 빨갱이들의 완패로 끝났다.
1931년 신빈사건이라고, 좆본군과 만주군의 지속된 공격으로 조선혁명군의 인재들이 여럿 갈려나간 사건을 겪은 뒤 양세봉은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이후 1932년 봉천성, 길림성 일대의 중국인 항일 무장 세력을 이끌던 중국의용군 총사령관 이춘윤(李春潤)과 동맹을 맺어서 한중연합군을 결성했다. 이 한중연합군은 신빈현 지역에서 영릉가, 흥경성, 쾌대모자, 노구대에서 좆본군을 참교육하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1934년 8월 밀정이었던 박창해의 밀고로 인해 환인현 소황구(小荒溝)에서 좆본군에게 포위되어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사후 김호석이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좆본군의 공격으로 지속적인 좆망 테크를 탔고 1935년 9월 반만(反滿) 항일군의 지도자 왕봉각(王鳳閣)과 중한항일동맹회를 만들어서 예토전생을 도모하려고 시도했지만 1936년 완전히 좆망해버렸다.
빨갱이가 아니었던 시절 혹부리우가가 그의 꼬붕으로 있었던 전력 때문에 유해는 평양 대성산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었고 유족들은 핵심 계층으로 편입하는 등 북괴에서 잘 대우해주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그의 가묘를 만드는 등 대우하고 있다. 또한 조선족 기업가들이 돈을 모아 생전에 그가 중국인 농민 단체 요녕농민자위단(遼寧農民自衛團)과 동맹을 맺었던 왕청문 앞에 그의 흉상을 세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