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토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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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비주류"에 대해 다룹니다. 힙스터는 아닌데 주류에게 왕따당해 밀려난 아웃사이더에 대해 다룹니다. |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이 존나 불쌍합니다...ㅠㅠ 광광 우럭따 8ㅅ8 |
ㄴ북괴군에게 학살당해서 머릿수가 많이 줄어든 상황에 경제성장시기 들어온 외지인들에게 2차로 털려서 상당수가 고향에서 쫓겨났다.
서울에서 3대이상 살아온 서울의 원주민들을 의미한다.
조선에서 한양천도이후 종로일대에 살던 원주민들을 성저십리로 쫓아낸뒤 조금씩 조금씩 외지인들이 들어와서 털리긴 했지만 조선시대, 일제강점기[1] 때까진 서울토박이들이 서울 거주민의 상당한 비율을 차지했다.
이들이 서울에서 차지하는 파이가 급격히 줄어드는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한국전쟁과 한강의 기적이다. 일단 한국전쟁부터 보자.
런승만이 서울시장이랑 거물급 국회의원들도 속아넘어갈 정도로 스케일 크게 구라치고 몰래 탈주한 뒤[2] 북괴군이 들어와서 피난갈라하는데 한강다리를 끊어놔서 운좋은 소수가 피난을 가고 나머지는 북괴군의 학살, 학대, 납북에 시달려야했다. 참고로 여기서 운좋았던 소수는 '도강파', 피난못가고 북괴군에게 시달려야했던 나머지 상당수는 '잔류파'로 불렸다고 한다.
이 잔류파들은 고립된 서울속에서 북괴군의 극심한 학살, 학대, 그리고 납치를 겪어야했다.[3] 이때문에 서울토박이의 숫자가 졸라게 줄어들게 되었고 나중에 외지인들에게 본진을 털리는 원인까지 제공되었다.
그리고 9월 28일 서울이 국군에 의해 수복되었을땐 런승만이 지금 서울에 남은 사람은 모두 빨갱이라면서 국군에게 2차학대를 당하고 도강파와 잔류파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바람에 서울 토박이 사회는 개작살이 나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한강의 기적때 물밀듯이 들어온 외지인들에게 본진을 뺏기고 구성남, 군포, 영등포, 분당일대등 경기도 외곽지역으로 쫓겨났고 1963년 서울에 편입된 지역의 원주민들도 비슷한 테크를 타게 된 결과 현재 서울에서 3대이상 서울에 터잡고 살아온 토박이비율은 강남, 강북막론하고 모두 10%될까말까할 수준이다.
반인반신초기 1963년에 서울로 편입된 구 광주군, 시흥군, 김포군[4], 양주군에 살던 원주민들의 경우 서울 토박이 향우회가 어거지로[5] 서울토박이 취급해서 그렇지 자신들을 서울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한다. 관악구출신이지만 본인은 시흥출신이라고 생각하는 손학규가 대표적이다.
고위관료출신이나 부자들이 많은 수도특성상 전쟁이전까진 매우 보수적인 지역이었지만 런승만의 개짓거리의 직접적인 피해자다 보니 보수적이어도 런승만은 엄청 싫어했다. 아예 자유당이 시민들의 욕+죽창+돌폭격때문에 서울에선 유세를 못할 지경이란 말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대표적인 서울토박이들[편집]
사대문안+성저십리[편집]
- 장세준: 무려 6대조부터 서울에서 살아온 토박이 끝판왕. 덕분에 서울사투리가 너무 강해서 성우일을 할때 고생많이 하셨다고 한다.
- 손석희: 어머니 쪽은 3대째, 아버지 쪽은 5대째 서울 토박이이며 고향도 사대문안+성저십리 근처인 중구.
- 박찬욱
- 공지영
- 조세호
- 최재성: 강북구 출신.
- 한석규
- 윾갈비
- 하정우
- 킬러조: 종로출신
- 양희은
- 백남준
- 서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