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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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글은 헬-조선의 현실을 다룹니다. 전세계의 그 어느 장소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찾아봐도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는 뜨겁게 불타오르는 K-지옥불반도 헬조선만의 수우많은 자랑거리들!!! 이러한 헬조선의 암울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전세계와 우주가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이런 것들과 당신에게 탈조선을 권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야... |
소개[편집]
정식 명칭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지만, 반민특위가 입에 더 감긴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이 1948년 9월 22일에 제정됨에 따라 1949년 1월부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위원장은 독립운동가 출신이자 국회의원이었던 김상덕 씨.
내용[편집]
조사를 담당하는 특별조사위원회, 기소 및 송치 업무를 담당하는 특별검찰(특검), 재판을 담당하는 특별재판소 등을 국회에 별도로 설치했다.
취급한 조사 건수는 총 682건이었으며 이때 파악된 반민족행위자는 약 7천 명(그중에서 여성 매국노가 60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놈들 전부 다 잡은 것도 아니다. 전부 감방에 처넣기도 전에 해산되어버렸으니까.
검거자[편집]
최초 검거된 개새끼는 평안남도 용강군 출신 박흥식(1903) 씨. 뭐하던 씨발놈인지 궁금하다면 검색해봐라.
그 외 검거된 유명인으로 춘원 이광수(평안북도 정주군 출생), 육당 최남선(서울 출생), 여암 최린(함경남도 함흥시 출생)이 있다. 이 양반들을 짧게 소개하자면:
이광수는 상하이에서 지낼 적에 김규식과 호형호제 하던 사이였고 신채호 선생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며(처음에는 김규식이 가르쳤는데 워낙 규식 슨상님이 까칠해서 이광수로 갈아탐) 이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설립에 참여했고 활동을 지속하면서 임정의 대외 홍보 활동을 담당했다. 그 외에도 오산학교 활동, 신한청년당 활동, 2.8 독립선언문 기초안 작성 등 여러 독립운동에 투신하던 위인이었지만 1920년대에 들면서 임시정부 활동이 침체되고, 사람들에게 관심 못 받고 일제가 1차 세계 대전 이후 승승장구하자 순식간에 흑화했다.
최남선은 기미독립 선언서 기초안을 작성하고 문예활동을 통해서 민족지를 계속 출간하는 활동을 해왔던 작가였다. 20년대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논설위원을 지내면서 반일 논조의 칼럼도 여럿 투고하였지만... 마찬가지로 10년이 지나면서 흑화했다. 그는 일제의 식민사관 유포를 위해서 만든 단체 '조선사 편수위원회'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 칼럼 내용이 180도 바뀌었다.
최린은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까지 하던 양반이었지만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사후로 천도교는 내부 분열을 겪었는데, 덕분에 30년대에 들면서 '민족개량주의자'로 흑화했다.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매일신보에서 내선일체를 부르짖었으며 호남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국민의 자각'을 촉구해야 한다는 주제로 강연 활동을 했다.
그냥 한 마디로 독립운동 하다가 변절한 새끼도 전부 붙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직업도 상관 없었다. 악질 친일 경찰로 유명했던 노덕술도 검거했다.
682건 중에서 검찰 송치된 건은 총 559건인데 지역별로 중앙서울 282건, 경기 32건, 황해 26건, 충남 25건, 충북 26건, 전남 27건, 전북 35건, 경남 50건, 경북 34건, 강원 19건 등이었다.[1] 이거 보면서 반민족행위자가 어느 지역에서 많이 나왔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인간이 있다면 병신이니까 박제해주자. 말 그대로 해당 지역에서 송치한 건수를 기록한 것이지, 그들의 고향과 상관 없다. 이를테면 서울에서 태어난 반민족행위자가 충청도 지부 검찰로 송치되면 충청도 건수가 하나 늘어나는 식이다. 고향으로 카운트 했으면 이북 지방이 왜 없겠냐.
최후[편집]
친일파를 쓸어버릴 수 있었던, 어쩌면 마지막 기회였다. 국회 프락치 사건, 반민특위 습격 사건 등의 이승만 정부의 적극적인 방해로 해산됐다. 국회 프락치 사건이란 현역 국회의원들 중에서 10명 정도가 남로당과 내통하였다는 혐의로 검거된 사건이다. 이 덕분에 몇 개월 뒤 반민특위법을 개정하는 명분이 생기게 되었다.
프락치 사건이 터지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여성 공작원 정재한은 실존인물이다.
한편 반민특위는 일본 고등계 형사 출신으로 지내면서 매체 검열질하고 사상범 때려잡던 친일 경찰 최운하 씨를 검거했는데 경찰 측에서는 그에 대한 석방을 요구했으며 거부할 시에는 실력 행사에 들어갈 것이라고 위협하였고 결국 이들은 1949년 6월 6일에 반민특위를 습격, 그 이후로도 며칠간 전국 각지의 지부를 골고루 습격했다. 이것을 6.6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라고 한다. 이 일로 인해 사실상 활동을 멈췄으며 약 3달 뒤에는 반민특위법이 개정되면서 공소시효가 단축되었고 그에 따라 반민특위도 완전히 해체된다.
이듬해에는 전쟁 터지는 바람에 2심 기다리며 수감 중이던 반민특위 관계자들이 대부분 납북당했다.
ㄴ 납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승만 정부에 의해 학살되었다.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북한은 친일파 숙청을 잘 했는데 남한은 친일파가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이 됐다."는 편견이 좌우 가리지 않고 퍼지게 됐다. 근데 북한의 김뚱땡이 패밀리 측근 기준이 친일 여부가 아니라 지들을 향한 충성도가 우선이라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하여튼 헬조선 애북보수 수준 ㅉㅉ
여담[편집]
반민특위가 검거한 친일파 중에서 본적이 전라도인 놈이 2039명이라면서 출처 불명의 자료가 인터넷에 나돈 적이 있었다.[1] 당연하지만 전부 시뻘건 거짓부렁이이다. 1946년은 미군정 시절로, 오히려 친일파를 도로 앉힐 정도로 친일 청산에 관심 없던 시절이었다. 반민특위 활동도 1949년부터인데 웬 1946년?
각주
- ↑ 인용 - <바로보는 한국근현대 100년사> 제2권, 김송달, 1998.6, 거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