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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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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편집]

현대 사회주의 이념의 기본 토대가 되는 이념[1]

소위 말하는 계급론, 노동자, 생산수단, 분배와 같은 담론의 첫 시조격이기 때문에,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멸로 인해 집권한 사회민주주의마저도 마르크스의 이론을 차용할 수 밖에 없다[2]

칼 마르크스 본인은 본인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이론[편집]

마르크스주의 경제학[편집]

사실상 사회적으로 거론되는 좌파적 이념은 사실상 마르크스의 『자본Das Kapital』[3]에서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며, 좌파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세계관, 사회경제관을 제시한다. 즉 대부분의 좌파들의 입에서 나오는 사회경제적 용어나 태도, 이론은 사실상 『자본』의 내용을 읊조리거나 각색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노동가치론[편집]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알파이자 오메가. 영국 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적 기반을 자기가 180도 비틀어서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했다. 그러나 고전파 경제학에서도 노동가치론을 끝까지 전개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도 고전파 경제학의 노동가치론을 액면수용하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의 노동가치론은 한 산업 혹은 한 기업 내 한 노동자의 노동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4]을 의미한다. 아무리 단순노동으로 점철된 18,19세기라고 하더라도 비슷한 노동시간인데도 현격하게 그 가치가 다르게 평가받는 현상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특히 능력의 차이를 해석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사회 전체를 통으로 봄으로서 대략적으로 노동시간은 이렇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이 노동시간을 가지고 가치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5].

예를 들어서 가격이 동일한 두 재화(상품)은 어떻게 해서 나오는 것인가? 혹은 어떤 두 재화(상품)이 교환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각 재화(상품)을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각기 물리적, 화학적, 문화적으로는 상이하더라도 사과를 생산하는데 10시간의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이 소요되었고 배를 생산하는데도 마찬가지로 10시간의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이 소요되었다면 사과 = 10시간의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 = 배 이런 등식이 성립하므로 교환될 수 있다.

임금철칙설[편집]

가치가 만약 노동시간에서 나온다면 화폐로 측정된 가격은 어떻게 산출될 수 있을까? 노동을 10시간 했다고 했을 때 10시간의 노동에 걸맞는 임금이 얼마인가?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임금노동자는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따라서 임금은 그 다음날 노동력을 재생산 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을 받게 된다[6] 노동력 재생산이란 그 다음 날에 노동력을 재투자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는 일하지 않으면 굶어죽으므로 그 다음날 노동을 재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재투자는 그냥 이뤄지지 않는다. 각종 소비재를 구매하여 소비함으로서 그 다음날 노동력을 재투자할 수 있는 상태가 되야 한다. 이때 필요한 재화를 (노동력)재생산 재화라고 한다. 그런데 그 재화, 즉 재생산 재화의 가격을 정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재화의 가치를 알아야하는데, 마르크스주의는 기본적으로 노동가치론을 택하기 때문에 그 재화, 즉 노동력 재생산 재화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 다시 말해 그 다음날 노동력을 재투자 하는데 필요한 재화나 상품을 생산하는 요구되는 노동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재생산에 필요한 상품 가격의 합이 곧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쉽게 말해서 노동력a의 가치(임금) = 노동력a를 재투자하기 위해 필요한 재화b의 가격 = 재화b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력c 라고 할 수 있다[7]

잉여가치론[편집]

위에서 말한 임금은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 즉 브루주아가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노동자가 자기 노동을 판매하고 화폐이익을 얻는 경우의 임금을 말한다. 이런 자본주의적 체제에서 노동자는 노동력 재생산 노동과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 왜 더 많은 임금을 받지 못하는가? 자본가가 노동력에 걸맞는 임금을 '온전히' 주지 않기 때문이다[8]. 이때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미지급한 임금만큼의 노동(시간)을 마르크스는 잉여노동이라고 부르며, 그 금액을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자본가가 줬어야할 총 임금 액수는 얼마인지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

노동가치론에 의거하면 모든 생산물들에는 노동이 투여되며, 투여된 노동시간 만큼 생산물에서 가치가 발생한다. 따라서 어떤 상품이 판매되었다면 그 상품을 생산하는데 특정노동시간이 판매된 것이므로 그 노동시간만큼 노동자는 자기 몫을 받아야 한다. 만약 비용 100을 들여 120원의 매출이 발생하였다면 이 120원 전액이 노동자에게 귀속되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상품의 생산과정에는 그 상품 자체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품a를 만드는데는 노동력뿐만 아니라 원료, 도구 등 생산수단도 같이 요구된다. 따라서 상품a 그 자체를 만드는데 오로지 노동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노동 외적 요소에 대해서는 노동자 몫을 요구할 수 없다. 순수하게 노동의 산물에 대해서만 보상해야한다. 일전에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만큼 받으므로 노동자는 부분적으로 자기 몫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요구된다. 얼마만큼의 임금을 추가적으로 받아야 온전한 몫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바로 판매해서 얻은 모든 이윤 즉 순이익(혹은 차익 전부)을 노동자에게 줘야한다. 왜냐하면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상품 가격은 노동시간에 의해 정해지고, 상품이 특정 가격에 팔렸다면 그 가격의 원천이 되는 노동시간이 팔린 것이게 된다. 따라서 당연히 생산수단에 들어가는 비용을 제하고 남은 모든 화폐이익을 노동자가 가져야 한다. 만약 100원의 비용을 들여 120원에 팔았다면 분명 거기에는 20원에 해당하는 노동시간이 존재한다는 뜻이므로 20원을 노동자에게 보상해야한다.

그러나 자본가는 이윤을 축적하는 존재기 때문에 생산물의 모든 순이익 혹은 이윤 총액을 다 가져간다. 따라서 노동자가 재생산에 맞는 임금만 받고 자본가가 가져간 이윤을 돌려받지 못한다면 당연히 노동자는 무임금노동을 한셈이다. 이 무임금노동'만'을 바로 잉여노동이라고 하고 이 그 잉여노동에 해당하는 금액, 즉 자본가가가 벌어들인 판매 순이익 혹은 이윤을 잉여가치surplus value라고 한다. 단순히 임금만 놓고 봤을 경우 임금 그 자체는 재생산 비용과 일치하므로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 받게 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이 이금에 해당하는 노동시간을 필요노동시간이라고 한다. 이 잉여가치가 즉 무임금노동이 임금노동과 관련해서 어떤 관계를 가지며 그 정도가 얼마나 큰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잉여가치를 좀더 명확하게 알기 위해 이윤율과 비교해자. 자본가는 자본을 투입해서 이윤을 얻는다. 따라서 자본가는 자기들이 투입한 자본을 통해 이윤 즉 잉여가치를 늘릴려고 한다. 그런데 자본에는 2자기 요소가 있다. 바로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이다. 가변자본variable capital은 바로 노동을 말하고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은 생산수단(원료나 도구 혹은 기계)를 일컫는다. 원료와 기계를 불변자본이라고 하는 까닭은 원료나 기계로서는 이윤 즉 잉여가치를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가a가 원료와 기계를 자본가b로 부터 사올때 자본가 b는 자본가a에게 이미 잉여노동을 붙이고 판매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자본가b가 기계 없이 순수하게 원료를 생산하여 판매하려 하고 이때 임금을 70으로 주고 차익으로 30을 번다고 치자. 그럼 자본가b는 a에게 총 100에 판매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a가 생산과정에서 불변자본을 어떤식으로 쓰건 결국 100의 지출을 하는데 지출하고 나면 이제 가격에 +100이 될뿐 101이나 102가 되도록 할 수 없다. 과거에 이미 다 노동이 투여되고 나온 산물이기 때문에 더이상 자본가a가 어찌할 수 없는 '죽은 노동'인 셈이다. 반면 가변자본은 자본가가 노동시간을 연장하거나 감소시킴으로서 그 가치가 변동하므로 가변자본이라고 한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시간을 더 투입하면 노동가치론에 따라 가격이 올라가고 따라서 이윤이 늘어나며 결국 잉여가치가 늘어난다. 불변자본과 달리 과거에 투입되버리고 난 노동이 아니라 실제 생산에서 잉여가치를 좌우하는 '산(살아 있는) 노동'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을 자본의 가변부분 그리고 자본의 불변부분이라고 달리 부를 수 있다.

이윤율은 어떻게 계산하는가? 자본가는 자신이 지출한 총 자본과 자신이 벌어들인 이윤의 정도를 계산 할 것이다. 계산 식으로 보자면 이윤율잉여가치/(가변자본 + 불변자본)[9]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잉여가치율은 어떻게 계산할까? 노동자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지급받은 임금과 지급받지 못한 임금간의 관계지 원료나 기계와 같은 불변자본이 아니다. 그래서 잉여가치의 정도 즉 잉여가치율s이란 잉여가치/가변자본[10]이다. 이윤율과의 차이점은 바로 불변자본이 빠졌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자본가와 노동자는 본질적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잉여가치, 가변자본, 불변자본이 모두 고정되어있을 때 자본가의 이윤율 계산과 노동자의 잉여가치율 계산은 절대 같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생산하는데 있어 불변자본은 반드시 0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가 입장에서는 항상 잉여가치율보다 낮은 이윤율을 갖을 것이며 노동자는 항상 이윤율보다 높은 잉여가치율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본질적으로 사는 세계가 다르며 둘은 화해할 수 없다.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보면 이런 경제현상을 대표적으로 설명하던 정치경제학은 노동가치론에 기인하면서도 정작 자본가는 계약된 임금만을 주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하지 않는다. 결국 정치경제학은 자연스럽게 자본가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학문이게 된다.

잉여가치율 계산[편집]

노동가치론을 고려해 실제 잉여가치율을 한번 계산해보자. 먼저 용어를 깔끔하게 정리하면 불변자본은 원료와 생산수단을 말하고 가변자본은 생산에 투여된 노동을 말한다.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과 재화(상품)가격이 각각 10시간, 5만원, 불변자본이이 20시간, 10만원이며 가변자본이 10시간 일경우 금액으로 환산했을 경우 임금철칙설에 의해 재생산 노동시간에 비례하는 임금을 받아야 하므로 5만원이 된다. 만약 가변자본이 5시간일 경우 임금은 2.5만원이 된다. 10시간:5만원 = 5시간: x 이 비례식을 풀면 자연스럽게 답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을 모두 투자하여 생산한 생산물의 가격은 얼마인가? 가변자본이 10시간일 경우 가격은 총 자본의 합과 동일한 15만원[11]. 반면 가변자본이 5시간일 경우 가격은 총 자본의 합과 동일한 12.5만원이 된다[12]. 그렇다면 자본가의 이윤율은 얼마인가? 둘다 0이다. 왜냐하면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변자본 역시 노동시간에 비례해 가격이 산출되었고 그 가격만큼 지출되었으며 임금 역시 노동시간에 비례해 가격이 산출되었고 그 가격만큼 지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럴경우 자본가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대로 잉여노동을 시켜야 한다.

따라서 자본가는 노동시간을 연장하되 그 연장된 시간만큼의 보상을 하지 않고 자기가 가져감으로서 이윤을 축적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에게 20시간의 노동이 발생하였을 경우 잉여노동 시간은 10시간이다. 따라서 가격은 총자본의 합과 동일한 20만원[13]이며, 자본가는 10만원의 이윤 즉 잉여가치를 획득하였기에 10시간은 필요노동시간으로서 노동자는 재생산비용에 걸맞는 임금을 받는반면 나머지 10시간은 임금을 지급받지 못하는 잉여노동이 된다. 이때 조심해야할 점은 가변자본은 필요노동시간 즉 재생산비용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5시간만 보상하고 15시간을 잉여노동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생산이 지속될 수 없다. 계속 생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재생산비용은 온전히 주되 잉여노동을 발생시키는 방법을 써야한다. 잉여노동을 통해 가격상승, 잉여가치를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잉여가치율은 잉여가치/가변자본이다. 잉여가치와 가변자본 모두 10시간이므로 100%다. 즉 다음날 필요한 재생산비용을 모조리 자본가가 가져간 것이다. 잉여가치를 돌려주었다면 노동자는 다음날을 온전히 놀고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말이 길었지만 가변자본 = 사회적으로 필요한 '총' 노동시간 =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총' 노동력이고 잉여가치 = 판매 수익 이기 때문에 잉여가치율은 자연스럽게 순이익/임금이 된다. 특정 기업에서 노동자가 500만원을 벌고 기업 순익이 1000만원을 번다면 잉여가치율은 단순하게 200%로 계산하면 된다. 그렇다면 잉여가치율은 이윤율과 얼마나 차이가 날까? 현실에서 불변자본의 크기는 가변자본에 비해 무척 크다. 만약 불변자본이 62, 가변자본이 38 잉여가치가 38이라고 한다면 이윤율 = 잉여가치/총자본 = 38/(62+38) = 38%인 반면 잉여가치율은 잉여가치/가변자본 = 5/5 = 100%가 된다. 실로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가 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대게 잉여가치율은 4~50%라고 한다. 이때 이윤은 오로지 잉여노동에 의해서만 발생하기 때문에 잘나가는 기업은 산업의 선봉장, 국민을 먹여 살리는 존재가 아니라 노동자의 고혈을 쥐어짜는 잔혹한 착취자가 된다. 만약 잉여가치가 100 가변자본이 50일 경우 아무리 이윤율이 1%라고 하더라도 잉여가치율은 무려 200%이기 때문에 기업이 아무리 침체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본가가 탐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불변자본만 디립다 퍼붓는 바람에 생긴 현상일뿐 이며 여전히 잉여가치를 임금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받아먹는 세상에서 가장 잔혹학 아귀중 하나일뿐인 셈이다. 또한 노동자가 100억을 번다고 하더라도 기업이 200억의 순익을 번다면 노동자가 재벌같은 삶을 사느냐와 상관없이 기업은 노동자를 잔뜩 부려먹고 돈 많이 준 척 생색내는 탐욕스러운 자본가일뿐이다.

착취론[편집]

생산을 통해 판매하면 판매 차익 즉 이윤이 발생한다. 자본가가 생산하려는 까닭은 이윤을 벌기 위해서다. 만약 이윤이 0이라면 자본가는 생산하려 하지 않을테고 따라서 이윤을 노리지 못하므로 자본주의 체제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노동가치론에 의거하면 모든 이윤은 모조리 노동자에게 귀속되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가 이윤을 독차지한다. 결국 노동자는 자신에게 귀속되야할 금액을 부분만 받게 되는거다[14]. 즉 노동자는 부분적으로 임금도 받지 못한 채 노동을 투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자본가가 임금도 주지 않고 노동자를 부려먹은 것으로서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마르크스주의의 착취는 일반적으로 착취라고 부르는 것과 약간 다르다. 우리는 흔히 착취를 즉 일을 (왕창)시켰는데 임금을 조금 주거나 안주는 경우를 가리키지만,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자에게 정당하게 지급하지 않는 모든 화폐금액을 말한다. 그런데 그 금액이란 바로 '모든' 판매차익을 말한다. 즉 판매했을때 발생하는 모든 화폐이윤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는 영구적으로 착취체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가가 선심을 써서 자기가 벌어들인 대부분의 판매차익을 노동자에게 돌려준다고 하더라도 착취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모든' 판매차익은 노동자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선량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착취당한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일종의 기만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화폐차익을 전부 노동자에게 줄 경우 자본가는 사실상 수입이 0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가가 생산할리가 만무하다. 설령 자본가가 판매차익을 '모두' 돌려준다고 할 경우 이는 사실상 자선과 다를 바가 없으며, 이는 화폐이윤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라고 할 수 없는 체제다. 결국 자본가와 노동자는 본질적으로 화폐이윤을 가지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싸우는 대립구도에 처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는 어떤 의도와 마음씨를 가지건 상관없다. 자기가 어떤 계급에 속할 경우 상대 계급과 더 많은 이윤을 위해서 계급 투쟁을 벌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숙명과도 같다.

이때 투쟁은 계급과 계급의 투쟁이지 특정 기업의 노동자들이 특정 기업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착취란 개별적인 자본가가 단순히 악랄해서 생기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착취는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구조적 산물이기 때문에 개별 자본가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착취를 근절할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가의 어떤 야망이나, 성심과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체제다. 착취라는 것 또한 자본가가 아무리 선량해도 (비도의도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특정 자본가에만 비난의 화살을 집중시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보지 못하고 한 인간만을 공격하는 아둔한 행태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특정 자본가의 선량함만을 근거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것 역시 기득권에 부역하는 행위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상태에서 특정 자본가의 선량함만을 근거로 자본주의를 옹호하거나 단순히 개선하자고 말하는 것 역시 사회구조 전체를 보지 못하는 행태기 때문이다.

혁명론[편집]

자본가는 아무리 선량해도 착취자라면 그리고 노동자가 자기 삶을 발전시키고 싶다면 먼저 착취구조를 끊어야 한다. 즉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해야 한다. 혁명만이 유일한 방법인 까닭은 소위 노조투쟁은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조활동을 하더라도 자본가의 착취를 근절할 수 없으며 자본가는 국가권력을 이용해 노조를 탄압하려하기 때문이다. 이런 국가를 통제하는 의회민주주의제도 역시 브르주아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기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은 자본-국가 체제를 동시에 절멸시켜야 한다. 이런 논리로 인해 브루주의 독재체제라 불리는 의회민주주의에 기대는 사민주의 역시 마르크스주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자본가에 투쟁할 수 있는 각종 수단이 제약된 상태에서 소규모적, 난잡한 투쟁은 노동자 운동의 힘을 소모시킬 뿐이며 이래서는 탐욕스러운 자본가 체제를 엎을 수 가 없다. 즉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바로 자본가들이 몰락할때 까지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는 본질적으로 자본가들이 몰락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 때문이다.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편집]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대망의 역사를 뽑자면 바로 역사발전론이다.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산주의 체제로의 이행이 대미를 장식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분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과도기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다시말해서 공산주의로 이행할려면 자본주의 체제는 이전의 역사단계처럼 스스로 자기 모순을 겪어야만하는데 자본주의에는 어떤 자기 모순이 존재하는가?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이윤을 추구하고 축적하는 체제다. 그런데 이런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의 이윤획득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사회적으로 이윤을 추가적으로 획득하기 어렵게 된다. 즉 개별적인 자본가들의 이윤추구가 결국 사회 전체의 이윤 추구를 저지하는 셈이다. 왜 그러한가? 바로 이윤율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윤율은 잉여가치/총자본(=가변자본+불변자본)이며 공식으로 쓰면 r=s/(c+v)다 이때 자본가는 더 많은 이윤을 벌기 위해 더 많은 불변자본에 투자한다. 가변자본을 늘려서는, 즉 착취만 해가지고는 대규모 이윤이 쌓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변자본만을 늘려서는 이윤율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15]. 그렇다면 왜 불변자본의 증대가 이윤율 증대에 더 획기적인 방법이 되는지 공식을 통해 알아보자. 이윤율은 s/(c+v)다 이때 분모 분자를 가변자본v로 나눠보자 그러면 이윤율은 (s/v)/(c/v+1)이 된다. 이때 c/v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생산이 노동집약적이냐 자본집약적이냐는 뜻이다. c가 클수록 혹은 v가 작을 수록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심화되었다고 말하며 이 경우 그 생산은 자본집약적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이윤율 공식은 잉여가치율/(1+자본의 유기적 구성)으로 풀어 쓸 수 있다. 생산에서 불변자본이 가변자본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자본이 구성이 유기적일수록 결국 이윤율은 낮아지는 경향이 나타날 것이다.

공식에서 도출된 이윤율 저하를 사회현상 관점에서 바라보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심화되었을 때의 장점은 바로 대량 생산 즉 생산성의 압도적 증대에 있다. 이런 생산성 증대는 이윤의 대규모 획득을 가능케하기 때문에 자본가는 기를 쓰고 불변자본을 늘리려 한다. 그러나 불변자본의 증대는 많은 비용을 수반하며, 대부분의 노동자가 착취당하는 사회에서는 높은 이윤율을 이전만큼 확보할 수 없다. 그래서 이윤율이 낮아지지만, 자본가는 이 낮아진 이윤율을 만회하기 위해서 더 많은 불변자본을 늘리려 한다. 결국 악순환에 빠지게 됨으로서 이윤율은 0에 수렴하고 결국 자본주의체제는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때가 바로 혁명의 시작점이다. 이때를 위해 자본가와의 계급투쟁 속에서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할 것'을 그리고 각성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계몽된 노동자 조직의 단결력은 혁명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사회는 곧바로 찾아오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본가 역시 바보는 아니라서 이윤율 저하 경향을 저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하는 요인으로서 6가지를 드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요인이 바로 잉여가치 증대, 즉 무보수노동인 잉여노동시간의 증대 혹은 휴일 단축이다. 이런 요인으로 인해 자본가는 이윤을 늘리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쉽사리 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혁명의 길은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좌절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자본가가 늘리는 이윤은 이윤율이 아니라 이윤액이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이윤을 늘려도 새로 투자하기 이전의 이윤율로 돌아갈 수 없다. 새로 투자함으로서 낮아진 이윤율을 그나마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윤율 저하 경향은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기에 종국적으로는 이윤율이 0에 수렴하게 되어 자본주의 체제는 흔들릴 수 밖에 없다. 물론 이과정에서 자본가 계급은 이윤율을 늘리지 못할망정 이윤액이라도 늘리려는 시도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노동시간 연장, 임금감소, 휴일 단축, 해고 같은 착취에 더 고통받고 신음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망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데 더 적극적으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역사발전론[편집]

  • 불평등한 봉건주의 무너뜨리고 귀족없는 평-등한 자본주의 사회 건설!
  • 불평등한 자본주의 무너뜨리고 과도기단계인 사회주의 건설!!
  •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를 무너트리고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 건설!!!

정확히는 발전 양상이다. 인류는 당연하게

원시사회-봉건사회-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로 이어지는 역사를 겪는다는 소리임.

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은,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이 생산 시설을 국유화하고 독재하는 시대를 일컫고, 공산주의는 무정부 + 생산 시설의 완전 국유화 시대를 일컫는다.

즉 봉건주의-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이렇게 로드맵을 제시한것이다.

그러나 레닌새끼는 쌩까고 봉건주의에서 바로 사회주의를 하는바람에 사회주의마져 제대로 실현하지못하고 좆망하였다...

자본주의가 막장을 달리던 시절 (극심한 빈부격차 노동권 무시 심지어는 아동노동 등) 자본주의의 위협이자 마이신으로 작용해 오늘날의 수정자본주의를 이끌어냈다.

사적 유물론[편집]

위에 역사 발전론에서 말했듯 마르크스는 역사가 원시사회-봉건사회-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순서대로 변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들이 변하는 핵심적인 조건과 원리 바로 <상부구조> 와 <하부구조> 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주장했다.

우선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사회는 상부 하부로 구성되었다고 이야기 하는건데

1) 상부구조: 정치, 행정, 문화, 입법, 사법 등등의 정신적 요소 이고

2) 하부구조: 경제, 기술 등을 말한다.

그러니까 상, 하 라는 말을 들으면 알 수 있듯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지탱하는 거라 볼 수 있다.

물론 사회를 경제 원툴로 설명하려는 털보새끼답게 상부구조는 그냥 장식이고 하부구조가 가장 중요한데 이 하부구조가 흔들리거나 변화하면 상부구조는 무너지고 기존 체제라고 볼 수 있는 (왕정, 민주정 과 같은) 사회체계가 무너지고 시대가 전환된다는 거라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 기술을 담당하는 하부구조를 마르크스는 <생산력> 과 <생산 관계> 로 나눠서 설명하는데 일단

생산력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기술, 자원" 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고 생산관계는 이런 기술의 소유자가 노동자와 맺는 관계 구도라 볼 수 있다.

예로 중세 때는 영주와 농노였고, 산업사회에서는 사장과 노동자로 볼 수 있다.

이런 노예와 주인의 구도의 패러다임이 변하는 때가 오는데 바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불일치가 일어 날 때다.

이 개소리가 존나 중요한 이유는 기술(생산력)은 지속적으로(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데 생산관계는 천천히 발전하기 때문인데, 이들 간의 마찰을 누적이 점차 새로운 생산관계를 요구하게 되고 여기서 이 전체적인 구도를 통제하는 위에 정치, 입법, 문화 등이 자연스럽게 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로 프랑스 혁명을 들면 간단한데 기존의 상공업자들이 사회의 생산을 차지하는 기술과 수단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 노동자(생산관계) 는 기존의 상부구조(귀족) 의 신분제로 자리잡혀 있으므로 -> 이에 의해 기술을 둘러싼 생산관계가 지체 되었고 -> 이 마찰에 힘입어 투표권을 요구하는 혁명이 발생했고 정치 체제같은 상부구조도 변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털보는 이런 방식으로 자본주의가 고도화 되며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생산관계의 콘텐츠가 소진되고 이 법칙에 의해 사회주의가 필연적이게 올거라고 말 한 것이다.

문제는 그 시절처럼 공장주-노동자 라는 관계 하나로 자본주의 구도가 설명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원화된 업종이 있고, 그 나름의 자정능력 및 축척체제를 가지고 있다는 거지만 옛날 놈이어서 그런지 병신이라 그런 건지는 알아서 판단하자

비판[편집]

착취론 비판[편집]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착취'의 관계라고 볼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시간선호'라는 개념을 아에 무시하는 큰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 반박을 설명하려면 '시간선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시간선호란, 각 개인이 '미래재'보다 '현재재'를 더 선호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1년 뒤에 1000만원을 받는 것과, 지금 당장 1000만원을 받는 것을 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고를 것인가?

인플레이션 혹은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화폐의 가치의 변동이 아에 없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미래에 얻을 수 있는 것 보다 현재에 얻는 것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개념을 확장시켜 보자. 당신이 현재 1000만원을 얻거나, 1달 뒤에 1500만원을 받는 것 중 선택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러한 경우에서는 각 개인이 얼마나 시간선호율이 낮은지에 따라서 결정된다.

시간선호율이 낮으면 낮을 수록 미래재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경우는 후자를 선택 할 것이다. 반대의 경우에서는 전자를 선택 할 것이다. 이러한 '시간선호율'의 차이를 통해서 저축, 혹은 대출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노동으로 만든 상품 혹은 서비스는 대체적으로 '미래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노동으로 만든 상품 혹은 서비스는 시장에서 팔거나, 혹은 자신이 직접 사용하려면, 더 오랜 기간이 있어야 그 가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장주에게 월급, 혹은 시급을 받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경우, 노동으로 만든 상품 혹은 서비스가 온전한 가치를 주기 보다 더 '빠르게' 가치를 지급받는다.

즉, '미래재'를 '현재재'로 바꿔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환의 원인은 미래재와 현재재를 선호하는 정도의 차이, 즉 시간선호의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자본가는 주로 시간선호율이 낮은 경향을 보이고, 노동자는 주로 시간선호율이 높은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위에서 설명한 '4시간 정도의 이윤'을 가져가는 것은, 그 만큼의 이윤을 '착취'하는 것이 아닌, 그 가치를 온전히 지급받는 시간의 차이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노동착취론은 정당한 이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은 자본주의 문서에도 적어놨다.

더 자세한 내용은 뵘-바베르크의 노동착취론 비판 참고하길 바란다.

이 노동착취론 비판을 근거로 한스-헤르만 호페오스트리아학파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을 재구성하기도 했다. 착취는 '자본가'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닌, 국가의 경제 개입으로 인해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계급투쟁 오스트리아학파의 재구성

고대와 중세[편집]

사실 마르크스가 주장한 '당연한' 저 원시공산제-고대노예제-중세봉건제-근대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란 테크트리는 말 그대로 '지만의 주장'일 뿐이다.

딱히 근거랄것도 없다.

원시사회도 마냥 공산주의는 아니었다는 증거들이 나오지만 마르크스 시절에는 너무 인류학적, 고고학적 사료가 없었으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고대에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 정도로 엄청난 수의 노오오오예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집트도 사실 시민들이 피라미드 만든 거였고, 다른 고대 사회의 노예의 인구 비중도 얼마 되지도 않았다. 고대 그리스가 이상한 거지.

우리나라의 경우도 지금의 인구통계 격인 신라의 민정문서가 발견되고 노비의 수가 좆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마르크스주의역사나 빨던 역사학자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더구나 봉건제가 와야 중세라는 개소리는 열등감을 지니게 된 똥양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맹아론을 낳았고 문화대혁명에서는 지들 문화관광자원을 알아서 다 부숴주는 업적을 낳았다.

이 논리에 따르면 청나라 때까지도 중국은 고대였다는 것이다. 중국 빨갱이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공자나 기타 전통 사상이 중세 봉건제로의 이행을 막았다고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 문화대혁명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봉건제는 머나먼 주나라적 얘기고 유럽에선 예수가 태어나니 뭐니 했을 시절부터 더 효율적인 군현제를 시행했다. 머가리가 있다면 어느 쪽이 나은 줄 알겠지?


때문에 아시아적 중세니 서구중심적이니 뭐니 해서 논란이 여러 번 일어나서 아직도 마르크스를 빠는 사람들은 은근슬쩍 봉건주의-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로 퉁친다.

(이 문서와 카를 마르크스 문서에서도 과거에 그랬는데 누가 고쳤다.)

하지만 모델을 수정하는 바람에 고대랑 중세랑 합쳐져 한국 기준으로도 봉건주의만 2000년 넘게 계속되었는데(이집트나 중국같은 나라가면 더 늘어난다), 이 수정은 뒤의 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도 충분히 수정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대체 언제 공산주의 사회가 됨?[편집]

주의. 이 문서는 좆문가가 작성했거나 그 자체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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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자본주의엔 이러이러한 단점이 있으니 당연히 망할것이고 그 끝에는 사회주의이후 공산주의가 올것이야!'하는 예언서 수준에 불과하다.

생산력이 극대화되면 된다는데 그게 언젠지 당연히 마르크스도 몰랐다. 그렇지만 마르크스 신봉자들은 마치 예수 신봉자들마냥 유토피아가 언제 올 지 알고 있는 듯하다.

한편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열등감에 휩쌓인 중국 빨갱이답게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가 없어도 농민이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면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기준이 좆도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서의 '심판의 날'이 '생산력이 극대화되는 날'로 바뀐 현대판 성경이다.

까놓고 말해 마르크스 신봉자들도 그저 이 주장을 맹신하여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는 몰락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사회주의지! 마지막엔 공산주의야!'라고 개소리 씨부리는게 역사적으로 숱하게 있어왔으며 자기 사상 및 정치적 야욕에 끼워맞추기 식으로 별 근거랄것도 없이 무작정 밀어붙이기만 해왔다.

그리고 2015년 현재까지도 자본주의는 별다른 문제없이 잘만 돌아가고 있다.

원래 경제란 사이클이 있어서 호황 ~ 불황을 어느정도 반복하게 되어있다.

무엇보다 그 굵직한 공황에서도 자본주의가 망할 조짐은 눈 코딱지 만큼도 보이지 않는데?

참고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자본주의 구조적 모순으로 실패라기보단 후순위채를 리스크 생각안하고 멋대로 증권화한다음 파생상품으로 돌리기까지 한 좆병신 윌스트리트 여피족의 실패이며 이를 커버처줄 수 밖에 없었던 로비스트와 돈에 의해 돌아가는 미국 정치의 실패에 가깝다.

비판에 대한 반박[편집]

위 문단에서는 '대체 언제 공산주의 사회가 됨?' 이 지랄 하고 있는데, 저 개소리는 좀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몰락한다'는 주장이 실제 세워진 공산주의 정권 독재자들에 의해 물빨핥되어 남용 악용되기는 했으나, 저 주장은 넋 놓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저절로 공산주의가 온다는 소리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몰락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무수한 저항과 셀수없이 많은 실패로 점철된, 공산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노오오오오력이 있어야 한다.

현대 철학과 사회학에서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드리우고 있는 마르크스는 무슨 종말론 신봉자 수준의 병신이 아니다.

애초에 마르크스는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공산주의 사회가 올거라는 식의 예언을 한 일 자체가 없다.

좀 더 근본적인 층위에서 설명하자면, 이 점이 마르크스의 흔히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불리는 것과 기계론적 유물론을 변별하는 차이가 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세계는 결정론적인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활동을 통해 스스로 바꾸어 나가는 세계이다.

위 문단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은 무슨 현대판 성경이네 요한계시록이네 운운하는 내용은 좆문가가 싸지른 인상비평에 불과하니 걍 걸러라.

비판에 대한 반박에 대한 재반박[편집]

마르크스주의를 종말론이라고 비판하는 건 인상비평이니 뭐니 되도 않는 헛소리 싸질러놨는데 그냥 흔하디 흔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말장난, 논점 회피일 뿐이다.

노오력 타령으로 말돌리는 것자체가 역겨운 게 마르크스 본인 부터가 이윤율 저하로 말미암은 만성적인 공황으로 자본주의가 결코 스스로의 체제를 유지하지 못할 거라고 기대했다가 좌절하고 입장을 바꾼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한계'는 필연적으로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이상적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당위를 제공하는 근거로서 사용된다. 곧 자본주의가 종말에 부닥치고 모두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꿀테니 모두 이에 대비하고 미래의 공산사회를 만들기 위해 준비하자!가 마르크스의 주된 구호였다.

그래서 영국의 장기불황이 시작됐을 때 마르크스는 이제 드디어 자본주의의 종말이 왔다고 들떴고, 그 추종자들도 이제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시작될 거라고 망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온갖 설레발 호들갑만 떨다가 말았던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체제 종말의 신호라고 생각했던 공황 상태에서 체제는 굳건히 유지되었고, 노동자들은 단결해서 체제를 끝장내기는 커녕 비현실적인 혁명론에 휩쓸리지 않고 그냥 자기 살기에 바빴다.

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현상을 가지고 노동자들이 체제와 순응 내지 타협하면서 노동계급의 이해를 배신했네 뭐네 하거나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의 방법론을 수용함으로써 수정 자본주의가 시작됐네 뭐네 이상한 헛소리로 정신승리를 하지만

현실은 그냥 마르크스의 진단과 현실인식 자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례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종말론을 위시해서 마르크스가 극렬하게 주장해왔던 역사주의적 발전도상론은 마르크스가 주창한 정치적 구호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로 전제돼 있는 것이지 언젠간 노오력으로 성취해야 할 목표 따위의 설정놀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마르크스가 처음 주장한 역사주의발전도상론이 상당부분 허구로 드러나자 많은 마르크스 지지자들은 물론 마르크스 본인부터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상당부분 등을 돌렸다.

괜히 말년의 마르크스가 지가 신나게 씨부려놓은 역사발전 단계론 대신에 농민공동체로의 회귀를 주장한 체르니셰프스키를 지지한다고 말한 게 아니다. 애당초 이 시점에 이르면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 전제가 완전히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자. 여기서 저 위에 인상비평 타령하는 놈이 한 헛소리를 다시 살펴보자. 저 양반의 주장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애당초 자본주의가 스스로 종말할 거라 생각한 적이 없고, 자본주의 종말 이후 사회주의 이상사회로의 전개가 필연적이라고 주장한 적조차도 없다고 한다.

그럼 도대체 자본주의를 왜 포기해야 하며, 이렇게 자본주의를 박살내고 굳이 공산주의 사회로 전환하도록 노오력을 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다시 말해 애써 굳이 '노오오오력'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망하지 않을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그냥저냥 적당히 잘 살고 있는 노동자가, 자기 생업 다 때려치고 굳이 체제에 저항하고 세상을 개판으로 만들면서 공산혁명을 일으켜야 하는 당위가 뭐가 있을까?

요컨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종말론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 같으면, 굳이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정치적 구호를 따라야 하는 근본적인 당위 자체가 사라지는 거나 다름없다.

저 병신 주장대로라면 마르크스는 그냥 '아몰랑 암튼 자본주의 나쁘고 공산주의 좋으니까 공산주의 한 입 쳐먹어봐' 라고 주장하는 상병신에 불과해지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마르크스주의는 병신 사상이기는 해도 그런 단순한 느낌적인 느낌에 근거한 떼쓰기는 아니었다. 그냥 현실 인식능력 떨어지는 책상물림이 검증 안 된 자기 망상만 잔뜩 써놨다가 결국 그 망상에 현실에 적용 안 된다는 거 깨닫고 스스로 실망하고 반쯤 포기한 헛소리일 뿐이었지.

물론 그런 헛소리를 가지고 어떻게든 마르크스는 틀리지 않았어! 라고 우겨대며 마르크스가 가장 중요하게 전제한 역사발전 법칙론까지 부정해대며 암튼 왜 그래야 하는진 모르지만 공산주의 사회로 가는 게 옳다!라고 씨부려대는 마르크스주의 종교인들의 독실한 신앙심에는 존경을 표할 수밖에 없긴 하다.

아직까지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 놈들에게 첨언[편집]

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현실검증력도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고, 왜 구태여 자본주의가 망해야 하는지, 왜 사회주의 이상사회가 왜야 하는지 하나도 설득하지 못하면서 애써 마르크스의 오류들만 이런저런 어드 혹을 붙여 변호하면서 정신승리하기 바쁘다. '아 그거 마르크스가 몰라서 그렇게 생각한 게 아냐!' '사실 마르크스도 이렇게 생각했었어!' 이런 식이다. 이런 놈들은 이론이란 걸 받아들이고 신뢰하기 위해서는 일단 현실에 대한 예측능력이 입증돼야 한다는 사실부터 깨닫는게 순서가 아닌가싶다. 아무런 현실 검증능력이 없지만 암튼 마르크스가 100% 틀렸음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으니 마르크스를 따르겠다는 건 종교인의 태도와 도대체 뭐가 다를까. 굳이 안 믿겠다는데 한 번 마르크스 읽어봐 하면서 츄라이 츄라이 하는 것도 극렬한 종교인의 태도와 쏙 닮았다.

그런 양반들은 어릴 때 자본론이나 포이어바흐 테제 내지 공산당 선언 읽고 마르크스뽕 한창 빨고있던 시절에서 못 벗어나는 건 이해한다만 그렇다고 마르크스가 현대 자본주의를 만든거나 다름없다느니, 현대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의 세례를 받았다느니, 마르크스가 처음으로 사회복지 분배담론을 만들고 복지시스템을 퍼뜨렸다느니 뭔 말도 안되는 구라까지 섞어가면서 어떻게든 마르크스주의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꼴은 안타깝긴 하다. 애당초 마르크스는 그와 같은 제도적인 제언은 거의 한 게 없고, 딱히 마르크스가 그런 본격적인 사회개혁 운동에 투신해서 활약한 것조차도 아니다.

주로 폭력혁명론을 포기한 사회민주주의 계열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 사실 마르크스의 주장은 현대 복지국가의 이념과 같다는 식으로, 그래서 아직도 마르크스가 필요하다는 헛소리를 한다. 하지만 제발 부탁인데 마르크스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망상은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본론, 포이어바흐의 테제, 공산당 선언만 읽지 말고 19세기 무수한 경제학자, 사회사상가, 개혁가들의 글귀를 읽고나면 이미 마르크스가 말한 것 대부분이 이전 사람들이 말했고, 또 인지도도 마르크스에 전혀 뒤지지 않는 사람들도 이미 거론한 문제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자유주의 전통에서는 초창기부터 방임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이 계속해서 오갔고, 노동자의 권리신장이나 비스마르크로 대변되는 사회복지제도 역시 그러한 끝없는 사색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결과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를 오로지 방임주의로만 동일시하고, 방임주의에 대한 보완 내지 비판을 모조리 마르크스의 영향이라고 주장하는 건 사실 관계부터 전혀 틀렸다.[16]

그러니 니들이 마르크스뽕에 너무 빠진 나머지 '암튼 마르크스 참 좋은데, 뭐라 설명할 수가 없네'라는 생각에 사방팔방에 암튼 마르크스 한 입만 쳐먹어보세요 이런 개지랄 떨기 전에 객관적으로 '마르크스는 절대 옳다'는 독트린에서 벗어나 마르크스주의를 그렇게 말도 안되는 구라와 어드혹까지 붙여가면서 생명연장시켜 줄 가치가 있는지 가만히 반성해보자. 그와 동시에 니들이 가졌던 문제의식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난 다른 담론을 통해서는 과연 성립할 수 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 담론에서 오히려 더 생산적인 해결방안이 나오는 것은 아닌지도 고민해보자. 그렇게 된다면 마르크스주의 만능론이라는 지적 태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보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편집]

그런데 경제학인데도 불구하고 탁상공론적이어서 명확한 경제학적 결론이나 수치를 내지 못하며 주류 경제학에 쳐발린지 오래다. 그렇다고 아예 오스트리아 학파처럼 비수치적인 경제개념을 도입한 것도 아니고

근디 이율 하락 곡선은 머임?(づ_ど) 노동가치라는게 존재한다는데 한계효용이론한테 발리고 이윤율 감소 때문에 자본주의가 망한다는데 역사 속에서 수많은 반증이 있고 맨날 이분법만 하다가 주류경제학한테 털려서 저기 구석에 쳐 박혀 있는데다가 수리적 근거도 없어서 개무시 당하다가 불황이 올 때 마다 가끔 머리 들다가 다시 호황이 오면 쳐 맞고 들어가는 학문이다.

반박에 대한 재반박[편집]

혹시 사회민주주의가 있다고 주장할 거라면, 마르크스는 더더욱 병신이 되는 셈이다.

북유럽에 자본가 계급은 아직도 남아있고,(그렇게 칭송하지만 북유럽 자산의 편차는 한국보다 훨씬 심하다 (놀랍게도 덴마크 같은경우 자산편차가 0.5 정도다 어느정도 산업화된 나라들이 0.4 정도인데 그 이상 이다 결국 자산보다는 소득과 사회 자산을 어떻게 나누냐가 더 중요하다), 소득이 평등하지 자산은 이미 귀족화된 부자가 다 소유하고있다.)

프롤레테리아 독재는 커녕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전했으며, 유혈 혁명은 없거나 겉절이에 불과한 역할을 했다.

더구나 위에서 여러번 설명했듯 영원한 불변처럼 떠받들던 마르크스의 주장은 벌써 걸레조각이 되었기 때문에 그냥 이런 생각을 처음 해본 개척자 정도로만 생각해야 한다.

또 애초에 진짜 제대로 집권한 사민주의 정당의 경우 이미 사회주의 계열에서 이탈했다는 평가까지 받는 생시몽주의의 국유화론, 케인즈의 재정정책 등 자유시장경제를 기본으로 깔고 수정한 정책들을 자기 이념으로 차용했지 개념 정의와 근거 자체가 정신병걸린거같은 이런 자본론적 처방은 한 번도 도입된적 없다. 영국 노동당 독일 사민당조차도.

애초에 서유럽의 사민주의 세력 자체가 레닌-막시즘에 격렬하게 반발해서 제3인터내셔널을 때려치고 나온 입장이기 때문에 사민주의를 막시즘의 증거로 드는 건 진짜 개 멍청한 소리라고밖에 할 수 없다

ㄴ 사민주의도 뿌리올라가면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이다. 디시위키 좆문가새끼들은 모든 마르크스주의주의자가 죽창들고 공산주의국가 만들려는 사상인줄 알고있다.

ㄴ 애초에 마르크시즘 자체가 거의 학문적으로 유통기한 다 됐는데도 비주류 ㅇㅈㄹ 하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근근히 생명력 이어가는 판국인데 사회민주주의라고 하면 마르크스주의랑 다르다고 믿는 깨어 있는 분들부터 좀 정신차렸으면 좋겠음.

여담[편집]

정작 마르크스주의 자체는 마르크스가 창시한게 아니라 마르크스 이론을 본 좌파 정치인이나 사상가들이 이념으로 만든거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주장하고 설파한 사상가라기 보단 단지 자기 생각대로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공산주의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것이다"라고 예측한것에 가깝다.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동의어 아니다 씨발.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도 있기 때문이다. 그냥 시발 지제크 강연만봐도 얼마나 디키새끼들이 무지한 지 알 수 있다.

ㄴ응 결국은 있는 놈꺼 뺏자는게 본질인 강도의 발상이야. 힘없을땐 사기꾼이고 힘생기면 강도로 돌변하는게 마르크스주의지. 마르크스 본인부터가 유혈혁명 ㅇㅈㄹ 떨었는데

  1. 사회주의 개념 자체는 마르크스 이전부터 존재해왔는데, 우리가 마르크스를 사회주의의 대표자라고 아는 까닭은 흔히 사회주의라 불리는 것이 이전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전의 사회주의를 공상적 사회주의, 자신의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이는 마르크스가 이전 사회주의를 깍아내리고 자신의 사회주의를 진정한 사회주의로 평가받기 위한 의도적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2.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상당히 대척관계에 있지만 기본적인 세계관, 사회경제적 이론은 공유한다 다만 운동과 정치의 방향성에서 (정통)마르크스주의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가 사회주의와 충돌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자기대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국가주의적, 독재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레닌-스탈린주의(혹은 레닌-트로키츠주의)와의 충돌이라고 보면 된다
  3. 흔히 '자본론'으로 알려진 그 책
  4. 사실상 전체 노동자들의 평균 노동시간을 의미한다
  5.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노동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을 의미할 경우 이때 노동량 노동투입은 노동시간과 동일하게 된다.
  6. 마르크스는 이를 유물론적 변증법과 c-m-c 공식을 통해 노동이라는 상품을 팔아서 생기는 화폐수익은 그 다음날 필요한 재화(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7. 이 때 가치론은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 즉 평균 노동시간으로 계산해야한다.
  8. 자본가는 분명히 노동력에 보상한다. 그러나 그것이 노동시간과 일치하는 임금이 아니라 그보다 모자란 임금을 준다. 이를 주의해야한다.
  9. s/(c+v)
  10. s/v
  11. 총자본=가변자본+불변자본이므로 두 자본을 노동시간으로 환산하면 30시간이고 모든 가격은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비례하므로 상품가격은 15만원이 된다.
  12. 노동시간으로 환산하면 25시간이며 노동가치론에 의해 상품가격은 12.5만원이 된다.
  13. 노동시간으로 환산하면 40시간이며 노동가치론에 의해 상품가격은 20만원이 된다.
  14. 임금을 받기 때문에 '부분'만 받는다.
  15. 다만 잉여가치율은 빠르게 증대된다.
  16. 물론 그렇다고 오버해서 방임주의라는 전통 자체를 오로지 자본가의 이익에만 부역하는 답 없는 신자유주의 쓰레기들 ㅉㅉㅉ 이라는 오바질도 좀 하지 않길 바란다. 방임주의와 맬서스-케인즈로 이어지는 개입주의는 언제나 상호비판을 주고받으며 비교적 우호적으로 교류하는 관계였지 무슨 투쟁하고 착취하고 쟁취해서 어느 일방을 박살내는 사회주의 세계관마냥 맬서스-케인즈주의가 방임주의를 찍어누르고 박살내는 관계가 아니었다. 쓰잘데기 없이 누굴 타도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병신같은 사회주의적 세계관으로는 방임주의와 개입주의가 애당초부터 자유주의를 이루는 두 근간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