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노동가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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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의 가치는 노동에 의해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아이디어 자체는 중세시대부터 있었지만, 애덤 스미스에 의해 최초로 이론적 체계를 갖추게 된다.

이 후,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론에서 핵심 개념으로 쓰인다.


"노동이 가치를 창출한다면, 많은 노동이 투입되었는데도 결과물이 형편없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하죠?"라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노동가치설에서는 결과물의 가치가 낮을 경우, 그것에 투입된 노동의 가치도 낮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허공에 삽질을 한다고 해서 가치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들어, 똑같은 물건 C를 만들기위해 숙련된 노동자 a는 손쉽게 C를 만들었지만, 비숙련 노동자 b는 힘들게 C를 만들었다고 치자.

비숙련 노동자 b가 힘들게 C를 만들었으므로, b가 만든 C는 a가 만든 C보다 더 비쌀까? 그렇지 않다.

숙련된 노동의 가치가 비숙련 노동의 가치보다 높기 때문이다.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물은 값이 싸지만, 없어도 그만인 보석은 왜 값이 비싼걸까?

물을 얻는데는 많은 노동이 필요하지 않지만, 보석을 얻는데에는 많은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을 얻기 어려운 지역에서는 물의 값이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다. 물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손쉽게 탄소를 보석으로 합성할 수 있는 기술을 발명한다면 보석의 가격은 벽돌의 가격만큼이나 낮아질 것이다. 보석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판[편집]

위에 설명을 보면, "상품의 가치는 노동에 의해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라고 정의해놓고서는

"노동가치설에서는 결과물의 가치가 낮을 경우, 그것에 투입된 노동의 가치도 낮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라는 말도 안되는 순환논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상품의 가격은 결국 한계효용에 따라 결정되는데 그럼 애초에 노동가치설을 주장할 근거가 없다는 소리이다.

상품의 가치를 노동투입량에 대한 함수로 표현해야 하는데, 이미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을 가지고

"결과물의 가치가 낮으니까, 투입된 노동의 가치도 낮다." 라는 이상한 순환논증을 주장하고 있다.


y = 5x 라는 함수에서 y = 결과물, x= 노동투입량이라면, x에 따라서 y의 값을 정해야지, y=10 이니까, x= 2라는 어처구니 없는 순환논증이 되어버린다.

결과물의 가치를 논할거면, 애초에 노동가치설을 주장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노동가치설을 주장하지 않아도, 한계효용에 따라서 가격이 결정되는데 왜 굳이 노동가치설이 주장되는가?


저 설명대로 [가치] 가 실존한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면 이상한 논리에 빠진다.

아프리카 TV에 어떤 유명한 BJ는 군대가기전에 쇼하면서 1시간에 2000만원씩, 5시간에 총 1억원을 땡겼다.

반면, 소방관은 사람을 구하고, 생명을 구하고, 사회에 좋은 일을 하는데 연봉 5000만원(?)이다. 실제 소방관이 수정바람.

그럼 "결과물의 가치가 낮으니까, 투입된 노동의 가치도 낮다." 라는 논리에 따르면 소방관의 노동이 인터넷에서 발가벗고 쇼하는 것보다 가치가 낮다는 말인가?

건물주가 한달에 1억을 버는 것은 반도체 생산직의 월급 300만보다 더 높은 가치의 노동을 하기 때문인가?


이러한 이상한 모순에 빠지기 때문에 현대 경제학에서는 애초에 [가치]라는 애매모호한 추상적인 당위성, 추상적인 개념을 폐기시켰다.

현대 경제학에 따르면 [상품의 가격] 이란 [각자 다른 상대방에게 주는 효용] 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소방관의 필요성보다는 인터넷에서 욕하고 발가벗고 쇼하는 BJ에게 가격을 더 높은 지불할 용의가 있다.

그래서 BJ가 군대가기전에 5시간만에 총 1억원을 벌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아프리카 TV에서 별풍선을 쏘는 놈이 있고, 안 쏘고 그냥 공짜로 보는 놈이 있다.

이 말은 누구에겐 그 방송이 공짜밖에 안되고, 누구에겐 그 방송이 1000원짜리 방송이고, 누구에겐 그 방송이 100만원 짜리 방송이다.

개개인이 느끼는 효용이 다르기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다.

[가치]라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 오로지 현실에서 발생되는 [가격]이라는 현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비트코인이 6300달러라는 것은 비트코인에 투입된 노동의 가치가 6300달러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매수자와 매도자의 균형일 뿐이다.

비트코인이 6300달러의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실제로 거래되는 [가격] 그 자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같은 크기와 품질의 다이아몬드가 두 개 있다고 하자.

하나는 광산 입구에서 바로 발견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하로 100미터를 파들어가 캐낸 것이다.

전자는 발견하는 데 노력도 위험도 없어서 비용이 들지 않았고, 후자는 채굴하는 데 많은 노동력과 위험이 수반돼 큰 비용이 들었다.

이제 이 두 다이아몬드가 똑같이 경매에 나왔다고 하자.

노동이 많이 들어간 후자의 가격이 전자보다 더 비싸야 하지만 실제로는 크기와 품질이 같기 때문에 두 다이아몬드는 같은 가격에 팔린다.


마르크스가 노동가치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결국 "노동가치설"를 통해서 잉여가치설이 주장되기 때문이다.

잉여가치설은 궁극적으로 이윤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이론으로 발전한다.

애초에 노동가치설 자체가 결국 "이윤은 자본가의 착취" 를 주장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비판의 비판[편집]

노동가치론이 순환논증을 하고 있다며 비판하고 있지만, 위의 비판도 가격은 그 자체만으로 존재한다며 순환논증을 하고 있다.

"가격은 가격이기 때문에 가격이다."

이런 식의 논리가 성립한다면 노동가치도 노동가치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똑같이 반박해줄 수 있다.

게다가 가져온 공식 y(가격)=5x(노동)에서, x의 가치는 일개 노동자가 정하는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반례랍시고 들고온 1시간에 2000만원 땡기는 BJ랑 사람 구하고 연봉 5000만원 밖에 못받는 소방관 사례도 노동가치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슬픈 현실이긴 하지만, 실제로 현재 사회는 1시간에 2000만원 땡기는 BJ의 노동을 사람 구하는 소방관의 노동보다 높게 쳐주고 있는 것이다.

다이아몬드 사례도 뻘소리.

일반적으로 다이아몬드를 캐기 위해 엄청난 노동이 투입되는 이상,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높게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설령 운좋게 광산 입구에서 다이아몬드를 주웠다 해도, 여전히 다이아몬드를 캐는건 쉬운 일이 아니므로 높은 가격이 매겨진다.

본문에도 서술되어있지만, 누군가가 탄소를 다이아몬드로 합성하는 기술을 만들고, 이 기술이 보편화 되고, 지적재산권도 만료되면

다이아몬드의 가격은 같은 무게의 탄소 가격으로 수렴한다니까?

사회가 더 이상 다이아몬드에 가치를 두지를 않거든. 다른게 아니라 노동 없이도 다이아몬드를 얻을 수 있으니까.


첨언하자면, 노동가치론은 카를 마르크스의 뇌피셜 창작 개념이 아니라, 엄연히 주류 경제학의 사조인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가 주장했던 개념이다.


비판의 비판의 비판[편집]

다이아몬드의 공급이 증가하면 가격이 떨어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한계효용론의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사람은 '한계', 다시 말해 추가적으로 얻는 가치에 의해 판단한다. 다이아몬드를 1개 가지고 있다면, 그 다이아몬드로 목걸이를 만들 것인지, 팔걸이를 만들 것인지, 반지를 만들 것인지를 추가적인 가치에 의해서 판단해야한다. 그 욕구의 순위에 따라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이다. 만약 다이아몬드가 2개가 된다? 그렇다면 1순위에 밀려 하지 못했던 2순위의 선택을 할 것이다. 다시말해,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하는 행동은 다이아몬드의 갯수가 많을 수록 점점 후순위에 있는 선택을 하게 된다. 따라서, 다이아몬드의 공급이 증가하면 증가할 수록 그로 인해서 얻는 한계효용도 떨어지게 된다. 즉, 다이아몬드의 가치가 공급이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떨어지는 것도 한계효용론을 통해서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노동가치론이 주류였던 시절은 한계효용론 이후로 끝났다.

또한, 경제학적으로 '사회'는 행동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어떤 재화에 가치를 매기는 대상은 본질적으로 모든 개인이며, 사회가 가치를 매긴다는 것은 여러 개인들이 어떤 재화에 가치를 매긴다는 것에 대한 추상적인 비유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회가 더 이상 가치있게 여기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오히려 물건 그 자체에 가치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개인들의 한계효용에 따라서 재화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옹호하는 근거가 될 뿐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재화의 가치가 그에 투입된 노동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그에 투입된 노동의 가치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이 같은 비판 또한 적용되는 이론이 노동가치론이다.

전형문제[편집]

마르크스경제학에 따르면 시장의 가격체계와는 별개로 노동의 가치체계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어떠한 메커니즘에 따라 그러한 가치체계가 시장의 가격체계로 '전형(transform)'한다고 한다.

따라서 가격체계를 통해 가치체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모든 생산 부문에 대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전체 자본 중에서 가변자본과 불변자본, 잉여가치의 비율을 말한다.)이 같아야 성립한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보기에도 이럴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것이다.

결국 현실에 이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이할 수 있음을 상정해야 한다. 그런데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이하다고 할 경우, 가격과 가치체계가 따로 논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는 가격체계를 통해 가치체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졌다면 결국 현실에서 가치체계를 측정할 수 없음은 물론 가치의 무형적 특성상 그 존재부터가 불확실하다고 디스할 수 있다.

노동가치설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애덤 스미스나 리카도같은 경우 이러한 문제 때문에 이 이상 노동가치설에 대해 손을 대길 거부하게 되었고 후대에서는 이를 들어 비과학적이라고 디스하게 되었다.

다만, 마르크스나 그 후학들은 노동가치설을 버리지 않고 계속 이 문제를 연구해왔는데 이들도 여태껏 이러한 가치체계의 증명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그것이 터진 것이 새뮤얼슨이나 네오리카디언같은 오늘날 비주류 포스트케인지언으로 분류되는 학파가 참여한 50년대 이래의 전형논쟁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