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총언
조무위키
이 문서는 역사 속의 인물을 다룹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역사 속의 네임드 급 인물들입니다. 이 틀은 고인이 된 대상에게 사용하십시오. |
이총언(李悤言) | |
출생 | 858년 청주 벽진군 |
본관 | 벽진 이씨 |
사망 | 938년 |
경력 | 벽진태수, 벽진장군 |
국적 | 신라, 고려 |
가족 | 아들 이달행(李達行), 이영(李永), 33대후손 이광기 |
후삼국시대 벽진의 호족. 벽진군지역에 만연했던 떼강도단들로부터 성과 주민들을 지켰기 때문에 지역주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하며 왕건, 견훤이 영남지방에서 대규모 접전을 벌일 때, 왕건은 재앙과 변란을 평정해보자며 그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왕건의 요청에 흔쾌히 응한 이총언은 아들 이영과 자신의 군대를 보내 왕건을 따라다니며 후백제군을 공격하도록했다. 아들이 대광(大匡) 사도귀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을 때 벽진장군에 임명되었고 이웃동네의 주민 229호를 하사받았다. 또한 충주, 원주, 광주, 죽주, 제주 창고에 있었던 곡식 2,200석과 소금 1,785석을 추가로 하사받았다. 여기에 추가로 왕건이 친필로 "자손에 이르기까지 고마운 마음을 변하지 않겠다"라는 감사의 표시까지 했는데, 이에 광광 울었던 이총언은 자신의 사병들을 단결시키고 군량미를 쌓아두어 전쟁에 대비하였다.
당시 벽진성은 신라, 후백제, 고려의 전선지역이었기 때문에 큰탈없이 고려에게 군사적 지원을 해주는데 성공했고 그 결과 통일된 고려에서 잘먹고 잘살다가 938년, 향년 81세의 나이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