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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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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뤼 문서뤠서 설명하른 대상른 북괴롬덜과 밀접한 관계가 맀습레다!
황태성(黃太成)
이명 황대용(黃大用)
출생 1906년 4월 27일 경상북도 상주 청리면[1]
사망 1963년 12월 14일 (57세), 총살형
국적 일본 제국, 북괴
경력 북조선 무역성 부상 겸 무역상 서리
정당 (광복 이전) 조선공산당, (광복 이후) 무소속


개요[편집]

민족의 완전자주독립과 남북통일 만세!

 
— 처형장에서 남긴 유언

경상북도 상주 출신 빨갱이.

어렸을 때부터 반일 감정을 가진 사람이면서 좌익 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남한에 내려왔을 때, 본인의 주장으로는 북한에서 내려보낸 남북 협상 밀사라고 했지만 일단 현재까지 법의 판단은 '간첩'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주요 경력[편집]

1924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일본인 교장을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한 사건을 빌미로 퇴학 처분을 당했고, 이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지만 그곳에서도 퇴학을 당한다. 1927년에는 창설된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조선 공산당 경북위원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신간회 김천지부의 멤버로서 투잡을 뛰기도 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서울까지 확대되었을 때 그곳의 총지휘자로 있었다. 이때 검거되어서 2년 동안 복역하다가 출소 후 김천에서 다시 항일 활동을 전개했다. 1944년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건준의 모체) 전라남북도 책임자로 활동했다.

1945년 조선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이듬해 박상희와 함께 대구10월사건에 뛰어들었으나 박상희가 구미 봉기 때 사망하면서,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 당시 신원 보증을 서주고 월북을 단행한다. 그렇게 그는 북조선의 고위직까지 올라갔지만 8월 종파사건 때 숙청당하고 한직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래도 모가지가 뎅겅당한 한설야, 임화 등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은 편이었다.

소개[편집]

일제 강점기부터 죽마고우였던 박상희와 함께 TK 일대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해왔다. 덕분에 박정희는 자기 형보다 그를 더 친밀하게 여겼다고 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평범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로 그쳤겠지만 여러모로 박정희 일가와 접점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박상희의 혼인 중매를 서주기도 했다.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나중에 박상희의 딸 박영옥은 김종필과 혼인을 하게 된다.

이 사람의 이름이 주로 언급되는 것은 5.16 군사정변1963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당시의 일이다. 정변이 있었을 당시 주체 세력이 누군지부터 급히 파악한 북한 수뇌부는 주동자의 좌익 경력 때문에 속으로 안심하게 되었다. 북한 수뇌부는 이때 박정희를 내심 좋게 여겼는데, 때마침 남한의 HID(육군 첩보부대)의 제의로 비밀리에 정치회담을 제안하자 남북은 영화 필름을 교환하는 관계까지 가기도 했다.

남파 그리고 체포[편집]

이렇게 대화의 물꼬가 트자, 남한 정부와 더 자주 회담을 가지면 좋을 거라고 판단한 북괴는 대화가 통할 사람으로 누가 좋을지 고민했는데 이전부터 박정희와 친분이 있었던 황태성이 자원해서 가기로 결심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정확한 배경이 무엇이었을지 추측이 많다. 남한과 대화를 시작한 다음 통수 쳐서 적화통일하고 요직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고, 진짜 북조선에서 탈출해서 친구 동생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귀순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물론 황태성과 관련자는 현재 모두 죽어서 알 길이 없으니까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황태성은 1961년 8월, 임진강을 건너서 서울까지 혈혈단신으로 들어왔다. 이전부터 남한에서 활동한 게 꽤 있었기 때문에 남한에서 연줄이 많았던 그는 지인들의 도움을 통해서 가장 먼저 박정희와 김종필부터 만나기로 했다.

황태성은 먼저 김성곤 동양통신 사장부터 찾아갔지만 출장 중이라서 만나지 못하는 바람에 박정희의 대구고등사범학교 후배인 김민하를 만나서 사정을 설명했다. 박정희, 김종필과 접촉할 때까지 당분간 김민하의 집에서 은거했는데 황태성은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의 조카사위 권상능을 만나서 친필 편지를 김종필에게 전달해주라고 요청한다. 권상능은 일단 그 편지를 박상희의 아내이자 김종필의 장모인 조귀분 씨에게 편지를 전달했는데 이 년이 황태성이 남파했다고 김종필에게 고자질을 하는 바람에 황태성은 결국 중정에게 붙잡혀서 반도호텔 735호실에서 뜨뜻한 대접을 받았다. 사실 당시 김종필은 초대 중정부장이었기 때문에 안 잡고 내버려놔두면 자기도 화를 입을 거라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재판[편집]

황태성의 존재는 당연히 미국에게 알려졌다. 그래서 미군 부대로 황태성을 보내라고 요구했고 11월 경에 약 2주 동안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태성은 자신을 줄곧 대남 밀사라고 주장했다. 8월 종파 사건의 여파로 자신의 관직을 탈취 당하기까지 했으므로 극형은 부당하다고 계속 얘기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양형을 때렸다가는 진짜 북괴와 접점이 있는 놈들이라고 딱지 붙고, 5.16 군부가 통째로 ㅈ되게 생겼으니까. 사형을 때려야 한다고 차지철과 김형욱이 얼마나 닦달했을지는 눈에 뻔하다. 결국 사형이 선고되었고 파기환송심 역시 기각 당해서 쐐기가 박혔다.

그는 사형이 확정된 후에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정말 애썼다. 처형 직전까지 미국과 몇 번 접촉하기도 했지만 미국 역시 황태성에게서 더 이상 얻을 정보가 없다고 판단하고 굳이 공론화하지 않았다. 그냥 단물 다 빨린 셈.

이후[편집]

1963년 9월이 되면서 황태성의 존재와 남파 사실은 결국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때가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있던 시점이라서 윤보선은 박정희의 남로당 활동 경력, 여순 반란 사건 가담, 황태성 등 온갖 꼬투리를 잡으면서 박정희 후보를 전면적으로 압박했다. 이렇게 대선 경쟁 후보에 대한 최초의 종북몰이가 이루어졌지만 그 종북몰이는 민주당의 역관광과 박정희의 대선 승리로 끝났다. ㅂㅅ...

1963년 12월 14일 인천 근교에서 그의 총살이 이루어졌고 사흘 뒤 5대 대통령 취임식이 치러졌다.

황태성의 처형 이후로 북조선은 남한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으면서 남북 관계는 급속도로 냉랭해졌고 북한은 대남 도발의 양상을 바꾸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의 50년대는 남한 정계에서 간첩 활동하도록 파견 보내는 것이 주된 양상이었다면 60년대부터는 대대적으로 무장공비를 내려보내거나 무력 도발을 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