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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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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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칼리굴라 | ← | 4대 클라우디우스 | → | 5대 네로 |
로마 제국의 4대 황제로 티베리우스의 작은 조카. 본명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게르마니쿠스.
오늘날에는 뇌성마비로 추정되는 신체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황족이었으나 고위직에 오르는데 꼭 필요한 군복무가 불가능해 정치나 공직에서는 큰 역할을 맡지 못한 채 젊은 시절을 보냈다.
양할머니인 리비아 드루실라는 침을 질질 흘리고 다리와 팔에 장애가 있던 클라우디우스를 배냇병신 취급했고, 누나인 리빌라가 어느 날에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될 것이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하자 큰소리로 '그런 잔인하고 불행한 운명이 로마인들에게 닥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큰 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이런 대우는 친 어머니인 소 안토니아도 마찬가지여서 맏이인 게르마니쿠스나 둘째 리빌라와 달리 막내인 클라우디우스에겐 유독 엄격하게 대했다. 친아들인데도 '괴물'이나 '자연이 시작만 해 놓고 마무리는 못한 인간'이라고 불렀으며 종종 어리석은 사람을 부를 때 '클라우디우스처럼 멍청한'이라고 비난을 퍼부을 정도였다.
그러나 양할아버지인 아우구스투스는 신체장애가 있지만 정신에는 문제가 없었던 클라우디우스의 진가를 알아보고 취미였던 역사 공부를 실컷 할 수 있도록 역사가이자 자신의 친구인 리비우스를 스승으로 붙여주었으며, 다른 학문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친형인 게르마니쿠스는 인격자답게 불편한 동생을 잘 챙겨주었다.
삼촌인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면서 그가 맡고 있던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수장 자리를 물려받았고, 로마사와 카르타고사, 에트루리아 사 권위자로서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출판할 정도로 역사가로서 명성을 쌓았던 클라우디우스는 공적인 부문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명문가의 수장이었고 권위있는 역사가였고 골동품 감정사이자 수집가로서 유명해서 유명인사들이 매일같이 그를 찾아왔고 아우구스투스와 게르마니쿠스의 후광으로 평민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 시기를 조용히 보낸 클라우디우스는 그렇게나 원하던 공직 경험을 조카인 칼리굴라 덕분에 할 수 있게 되었다. 티베리우스 시절에도 클라우디우스는 삼촌에게 '저한테 공직을 줄 수 없으십니까?'라고 부탁을 했는데 티베리우스는 집정관 휘장을 줬다. 이에 클라우디우스가 진짜 집정관 자리를 달라고 재촉하자 '내가 준 금화 40닢은 축제 기간에 장난감이나 사라고 준거다.'고 차갑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공직 진출의 꿈을 접었다가 칼리굴라가 즉위한 후 공동 집정관으로 삼촌을 지명했고, 중요한 행사를 조카 대신 개최해서 명성을 더욱 높였다.
일반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칼리굴라는 의외로 통치철학이 확고했고 그의 정책은 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 시절의 정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의 자리를 넘볼 가능성이 없다는 걸 이미 파악한 클라우디우스에게 훌륭하게 황숙으로 대우해줬다. 두 달간의 공동 집정관 임기가 끝난 후에는 차기 집정관에 지명해줄 것이라고 약속해줬고, 세 번째 부인인 메살리나와 결혼하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조카인 칼리굴라가 고작 2년의 제위 끝에 근위대에게 암살당하자, 차기 황제 후보를 찾던 근위대에게 발견되어 황제로 추대된다. 당시 로마 시내에서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공화정 재건 움직임이 있었는데 클라우디우스는 일단 자신을 추대한 근위대와 차분하게 설득을 하면서 개인당 1만 5천 세르테르티우스의 보너스까지 약속해 완전히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 후 칼리굴라 암살자들을 인도받아 반역죄로서 사형에 처한다. 그리고 수도 로마에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넓히기 위한 작업을 하고 수도의 근황을 빠짐없이 보고받는 매우 치밀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행동에는 역사공부를 꼼꼼히 하면서 얻은 지식이 큰 도움이 됐다)
이에 원로원은 백기를 들었고, 클라우디우스는 정중함으로 포장된 협박으로 조카 칼리굴라의 기록말살형만은 안 된다고 했고 그 뜻을 관철시켰다.
제위에 오른 클라우디우스는 덩치가 커진 제국 로마의 행정을 전문화시키기 위해 내정을 개혁했다. 원로원 구성원을 인위적으로 교체했고 (카이사르에게 시민권을 받고 로마에 편입된 갈리아 코마타의 귀족 후손들을 대거 원로원 의원에 앉혔다) 원로원 관할의 속주와 군대 통제권을 줄이고 황제의 권한을 늘렸다. 급증한 업무 처리에 도움을 받기 위해 황제가 되기 이전부터 자신을 보좌한 해방노예 3인방(나르키수스, 칼리스투스, 팔라스)을 비서로 활용했다. 이들은 막중한 황제의 업무를 분담했으며 딴 생각 없이 클라우디우스의 명령을 따랐고 클라우디우스도 이들을 잘 통제했다.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는 고리대를 근절해 젊은이들의 삶을 안정시켰다. 각종 인프라 구축 사업도 계속 진행했고 칼리굴라가 빼앗은 화폐 주조 권한을 그대로 황제의 것으로 만들어 인플레이션을 예방했다. 또한 로마의 외항이 된 오스티아를 건설하는 초대형 공사로 유통되는 각종 물자의 가격조절 문제를 해결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브리타니아 원정이 있었다. 치세 초기에 일어난 달마티아 반란은 그 지역에서 인기가 높았던 클라우디우스 덕분에 며칠만에 싱겁게 진압되었고 트라키아가 완전히 속주로 편입되었다. 칼리굴라가 왕을 죽여버린 사건 때문에 소요사태가 벌어진 마우레타니아는 2년 동안 평정을 거친 끝에 2개의 속주로 분리하여 황제령으로 편입시켰다. 또한 친로마파 브리타니아 인들의 개입 요청과 드루이드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반기를 든 쿠노벨리누스, 그 아들 카라티쿠스를 제압하기 위해 브리타니아 원정을 했고 13명의 왕에게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치세때부터 보조군으로 복무했던 자에게 로마 시민권과 속주민과의 통혼권을 주는 제도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