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존 메이너드 케인스

조무위키

(케인스주의에서 넘어옴)
착한 문서 인정합니다.

이 문서는 유익한 정보를 주는 아주 착한 문서입니다.
문서를 읽기 전에 모니터나 액정 앞에서 따봉각을 치켜 세웁시다.
주의. 이 문서는 심히 진지하여 노잼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놀랍게도 디시위키에서 진지를 빨고 있습니다. 노잼이다 싶으시면 여기를 클릭하시어 이 문서를 탈출할 수 있습니다.


이 문서는 경제에 대해 다룹니다.
이 문서는 경제에 대해서 다루는 문서입니다.
제발 어디서 주워먹은 차트충 글&감정글 싸놓지 마시길 바랍니다.
디시위키 망하면 어떠냐?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제가 뭐 경제 살리겠다고 말이나 했습니까?
주의! 이 문서에서 서술하는 인물은 존나 똑똑합니다.
이 문서는 노오오력충도 따라갈 수 없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인물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으니 호구가 되기 싫으면 뒤로가기를 누르세요.
서는 재앙에 대해 다룹니다.

이 문서는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끄는 슈퍼文 재앙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읍읍!!

ㄴ문재인 소득주도성장의 사상적 기반 제공.사실 현재 좌파식 자본주의는 보통 케인즈주의쪽으로 흐른다

파일:&file name=9b17e2ac37c52d04bcaa101c9474f693.jpg
존 메이너드 케인스
John Maynard Keynes
생년월일 1883년 6월 5일
사망일 1946년 4월 21일
국적 영국 서양일본
직업 경제학자
표방이념 중도
케인스주의, 사회자유주의
1970년대에는 석유파동 등으로 인해 세계경기가 침체하게 된다.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밀턴 프리드먼등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이 맞아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케인스학파에 대한 의문이 제기됨과 동시에 그 영향력이 크게 감소하게 된다. 그러나 2007~2010년 금융 위기의 등장과 함께 케인스 경제학도 다시 조명받기 시작한다.
 
— 위키백과 존 메이너드 케인스 항목



그 유명한 케인지언학파를 만든 장본인. 경제에 있어 이 사람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주식으로 돈을 존나 많이 벌었다.

또 양성애자라서 잘생긴애 이쁜애들 가리지않고 존나 따먹고다님.

여러모로 주갤럼들의 워너비라고 할 수 있다.

개요[편집]

거시경제학이란 분야를 만든사람이다.

케인스주의[편집]

이 문서는 경제에 대해 다룹니다.
이 문서는 경제에 대해서 다루는 문서입니다.
제발 어디서 주워먹은 차트충 글&감정글 싸놓지 마시길 바랍니다.
디시위키 망하면 어떠냐?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제가 뭐 경제 살리겠다고 말이나 했습니까?

케인스의 유효 수요의 원리에 입각하여, 경기 순환을 안정시키고 완전 고용을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국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케인스학파의 한계[편집]

※주의 이 문서는 오른쪽으로 치우쳤습니다.


자극적인 내용과 특정 성향의 의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의 내용은 조무위키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이 문서는 토론으로 합의된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특정 내용을 이행하기로 합의한 문서입니다.
토론 페이지에서 토론 결과 및 합의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합의 내용과 다른 내용이 발견되거나 반달 혹은 사유화의 흔적이 보인다면 디시위키:신고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케인스의 정부주도의 사업발의를 통해 대기업들과 함께 사업을 벌이자는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은 처음 고전학파에서는 정부의 예산을 가지고 기업들과 같이 투자한다는데에 케인스혁명이라 불릴정도로 신드롬을 일으켰지만, 이내 60~70년대 들어서서 높은 임금상승을 따라가지 못하는 생산성 향상, 잦은 투자실패와 무능한 정부의 뻘짓으로 행정부의 엄청난적자와 인플레이션만 부른 결과를 초래해 "말은 쉽지" 라는 평가를 받게되었으며 80년대에 들어서고는 신자유주의가 각광받게 된다.

즉 케인스의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은 미래에대한 확고한 비전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이러한 까다로운 조건때문에 오늘날은 시장에 간접적으로만 간섭하는 뉴케인지언이 등장하였다.

양적완화와 케인즈주의는 일맥상통한다.

곡물파동-카르텔의 형성[편집]

영국의 농업생산량
그래프 출처:Federal Reserve Economic Data


  • 1930년대 영국 농산시장은 겁나게 심각한 흉작을 맞이하여 수확체감이 극심하였으며 외생변수[1] 실물위주 경기변동이론과 화폐베일관에 힘이 실리는 증거가 되었다.



미국의 농업생산량
그래프 출처:Federal Reserve Economic Data





  • 마찬가지로 1930년대 미국 또한 이상기후로 인하여 개흉작을 맞이하였는데 제번스가 주장한 태양흑점 변동에 의한 경기순환이론 + 실물 외생변수 경기순환이론 +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기순환이론과 부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심화된 이상기후로 실물위주 경기변동이론이 적합하게 되었다.


정리하자면,1920년대부터 이상기후 가뭄이 심각해졌으며 제번스 태양흑점설로 인하여 이상기후 흉작 실물위주 경기변동이론이 적합하게 되었다.[2]

이에 불구하고도 케인즈의 이론은 1956년 이상기후 이후 중동국, 에체베리아 헌장에서의 자원 카르텔 결성의 움직임 확산, 56년 수에즈 사태, 1958년 이라크 카심장군 국유화, 1960년 OPEC 결성등에 영향을 주었다.

1988년 이상기후 흉작에서 국제 곡물재고가 급감하여 국제곡물가가 폭등 하였다. 이에따라 케인즈식의 미국 역사상 최대 농업구제책이 의회통과 - 1989년 오펙 감산 카르텔 재결성 가동에 영향 - 걸프전 오일쇼크라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파장은 2011년~2012년에 연속된 3차,4차 세계 곡물파동을 불러일으켰고 결과적으로 수많은 정치적 갈등을 야기했다.[3]

이에 따라 케인즈는 제번스를 향한 반론으로 '터닝 포인트'[4]:"풍작, 재고증가가 불경기로의 터닝 포인트다!"라는 개드립을 치게 된다. 그러나 사실 터닝 포인트라는 개념은 후버와 뉴딜정부하 농업정책, 감산 카르텔 컨설베이션 경작제한 정책, 토양보호정책에 적극적인 개입활동을 했던 1935년의 극한 가뭄, 개흉작 사태로 인해 '터닝 포인트'의 돌입을 설명하는 내용[5] 이어서 케인즈 혼자만의 망상처럼 풍작, 재고증가가 불경기로의 터닝 포인트가 아니라, 흉작, 실물생산 공급 감소가 불경기, 골로가는 '터닝 포인트'라는 현시창 메세지를 담고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중상주의로의 회귀[편집]

케인즈는 그의 에세이에서 자유무역따위는 무시하고 국가의 폐쇄적인 자급자족을 주장하였다.[6] 이에따라 케인즈주의는 부국강병을 구현하기 위해 부족한 자본을 조달하고 공기업을 통해 직접 생산을 담당하기도 하며, 임금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저항하는 노동 세력 등을 탄압해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는 신중상주의로 전락해버렸다.

케인즈는 그의 논문 National Self-Sufficiency[6] 에서 중상주의로의 회귀를 주장하였다.


케인즈 일반이론에 대한 분석에 따르면[7] 근린궁핍 정책(내핍조치 옹호)를 주장하였다, 즉 1930년대 뉴딜의 자원 컨설베이션 감산 카르텔을 옹호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1934년 루즈벨트 공개서한에선 소비확대를 주장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케인즈의 자원카르텔 옹호에 대한 비판논문[7]



상기 논문자료에 의하면, 케인즈의 "..forever in a perfectly regulated economic paradise"라는 발언으로 미루어보아 중상주의에 대한 옹호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케인즈가 의기양양하게 국가주의가 최고의 세계주의이며, 적대적인 정책들이 평화를 가져오며, 친화적인 정책은 전쟁을, 통화 안정성과 자유무역은 불안정성과 혼동을, 그리고 국가주의와 상호적대적 정책들(밀리터리 케인지어니즘, 네오콘주의)은 국제적 안정성과 '부' 를 가져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곳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역설과 '모순들'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이를 통해,일련의 케인즈의 이론에서 그가 그렇게 싫어하는 자유경쟁 자체를 무엇으로 대체할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케인즈의 실제 제안은 단순히 개인간의 또는 기업간의 경쟁을 국유화 되고 정치화된 경쟁으로 대체하는 경향을 가질 뿐이었다.그것들은 '근린궁핍화 정책'[8] 들과 무역전쟁(경제전)의 압력을 경감시키기 보다는 증대 시킬 뿐이었다.

케인즈가 1934년 공개서한과 뉴욕 타임즈 기사에 나오듯이 일반이론 저술 당시에도 미국의 카르텔 조업단축 공급축소 컨설베이션 내핍조치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추어보면 이를 의식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이론을 저술했다는 아이러니함이 보여지는 대목이다.


They would increase rather than reduce the pressure beggar-thy-neighbor policies and for trade war and real wars........

위의 인용된 단락이 암시하고 있듯이, 국가주의적인 '근린궁핍화 정책들'[9] 은 현실적인 것이며, 세계 금 표준과 대여와 무역의 자유는 평화 보다는 전쟁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나라가 다른 나라에 끼치는 영향을 개의치 않고 국가주의적 정책(중상주의)를 따른다면, 각각의 나라가 '수출을 최대화' 하려고 노력하고 수입을 최소화 하거나 금지하려고 노력한다면 국제무역량은 지금까지 보다 더 커질 것이다(?)", "만약 관료들이 우리의 저축을 압류하고 우리가 큰 손실을 보지 않도록 우리 자신의 자금을 '투자하는 것'을 '금지' 한다면 [10] 그들은 정확히 언제, 정확히 어디에, 그리고 정확히 얼마나 그것을 '투자해야 할지' 또한 정확히 어떤 모험 투자가 성공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을지를 알 수 있는 '완전한 전지(전지전능?)'을 가질 것이다"라는 괘변들과 같이 케인즈의 모순된 논리는 아직까지도 고전파 경제학에 기여한 모든 이들에 대한 어그로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보고있다.

결과적으로 케인즈의 이론은 뉴딜정책에서 수많은 카르텔의 형성을 위한 산업부흥법과 같은 정부주도의 독점법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었다.이후 1937년 Court Packing 위헌논란 사건이 터지고 미국내 반뉴딜, 반독점, 반카르텔 여론이 형성되어 뉴딜 민주당은 38년 중간선거에서도 참혹한 패배를 얻어 맞게 되었다.이후 뉴딜 정부는 이전의 컨설베이션 카르텔 조업단축 생산통제 정책을 종료하고 '시장경제, 경쟁체제' 경제로의 회귀, 자유시장체제 복귀를 공식 선언하게 되므로서 케인즈주의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이후 뉴딜정부의 루즈벨트는 이전의 코포라티즘, 혹은 우파 집산주의, 빅 비즈니스 콘트롤(카르텔 기업집중 브로커 스테이트 정책, 스워프 플랜, 상공회의소 플랜), 지지가격, 독점가격 정책을 공식 종료하고 '미시경제학' 경쟁시장, 시장자유 확대 정책으로의 회귀를 천명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케인즈주의로 인해 지금 미국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기업집중이 극심화 된 상태이다.

기업집중은 바로 본질적으로 전체주의라 볼 수 있을정도로 그 문제가 심각하다.

현재 미국은 기업집중 심화로 인하여 고용시장이 악화됬고 소비재 공급의 부족화를 초래했고 시민들의 삶의 질이 악화되었다

케인스주의는 궁극적으로 기업집중으로 인하여 '경제적 효율성'을 손상시키고 부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한계를 시사하였다.

수확체감과 야성적 충동, 그리고 유효수요의 한계[편집]

1930년대 케인즈는 경제가 인간의 합리적,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만 돌아간다고 보지 않고, 인간의 비경제적인 본성도 경제를 움직이는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다며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 개념을 언급했다. 인간이 그렇게 합리적이고 오류가 없다면 대공황이나 경제위기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인식에서 내새웠다. 예를 들면 개인의 자신감이 팽배해 경제활동의 과잉을 낳았다가, 자신감이 극도로 위축되면서 자산을 팔고,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대공황을 낳았다는 해석이다. 야성적 충동에 의해 경제가 움직인다는 시각에서 케인즈는, 국가가 시장의 잠재된 창의성을 인정하되 인간의 야성적 충동으로 인한 과잉 현상을 억제해야 하므로, 정부의 적극적 시장 개입을 인정했다.[11]

케인즈가 설명했던 영국의 오일쇼크는 시장주도의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이 아닌 정부와 거대석유기업 BP주도의 집산주의(BP Motor Spirit)에 의해 일어났다

케인즈는 인간의 비합리성을 논하면서도 같은 인간들의 자의적 기준과 관리로 이루어져 더욱더 허술했던 정부의 합리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당시 케인즈가 외쳤던 영국의 대공황과 오일쇼크의 요인으로서 야성적 충동을 꼽았던데에 반해 상황은 반대로 흘러갔다.

1939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 유전개발을 호소하며 자금지원요청을 하기위해 프랑스를 방문한 사진

1932년 영국의 첫번째 오일쇼크 당시 사우디 정부는 영국을 방문, 런던회담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개발사업을 촉구하며 자금지원을 호소하였으나 이에 대해 영국정부는 20년대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APOC(현 BP)의 세차례의 조사를 통해 석유 매장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견해를 신봉해 자금지원에 대한 거부와 석유사업의 무조건적인 철수를 강요했다.1928년 적선협정과 아크나카리 현상유지 협정 당시에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매장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고 무시되었다.[12]

이후 1933년 영국정부는 APOC의 로얄티 감축 문제로 이란정부에 의해 두번째 오일쇼크를 맞이하게 된다.[13]

1930년대, 케인즈의 주장과 달리 영국은 1932년 정부주도의 석유회사들에 대한 감산, 공급축소, 가격지지 협정[14] 과 미정부의 카르텔 감산 조치(수출제한조치)로 오일 쇼크를 맞았다.

이 두번의 오일 쇼크로 영국정부는 이후 '에너지 독립'(Energy Independence)이란 중상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부치게 된다. 30년대 초반 케인즈의 에세이 National Self-sufficiency[6] 에 나오는 중상주의 옹호와 겹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에대한 대응으로 영국정부는 1934년 거대기업 합병형태인(Amalgamation Movement) 석탄기업 통합회사를 설립, 카르텔화를 꾀하며 석탄액화를 통해 국내에너지 의존도를 바꾸려했다. 석탄액화의 배경을 설명하자면, 영국은 1차대전 중 석탄수요 폭증으로 인해 이미 1913년 석탄생산이 최고점을 향하게되었는데, 수확체감에 돌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불가피하게 시장에 강력개입을 해 석탄에 대한 민간 투자확대를 독려해서 과잉투자와 같은 버블현상이 일어났었다.종전 후 부터는 이미 석탄 산업의 수확체감이 지나버려서 수익성이 망해버린 버블현상에 구조조정이 불가피하게 되버렸는데, 영국의 석탄회사들과 석탄 근로자들은 극렬한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1920년부터 1921년까지 이어지는 석탄노조들의 총파업, 피의 금요일등으로 인해 영국정부는 정부 스스로 자초한 과잉투자, 난개발, 오버 슈팅에 봉착한 석탄문제를 해결해야 햇었던 것이었다. 당시 영국의 탄광 노조들과 광산주들은 보수당 볼드윈 정부의 통폐합 구조조정, 대통합 합병에 시위를 통해 결사 반대하였다.

이후 1932과 1933년 사이의 두차례 오일쇼크를 맞이한 영국정부는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정부주도의 석탄액화 프로그램을 가동하여 '쇠락해 가는 석탄산업을 살리기위해' 실업률 삭감과 투자가 이미되버려 무용지물화된 석탄지역 시설들의 투자손실 부분, 주거지들, 각종 인프라들을 재활용해 보려고 석탄액화에 지원하게된다. 이때 바로 1934년 정부주도의 석탄액화법 제정과 강력한 에너지 독립정책, 대체에너지 개발정책, 경쟁제한-아말감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1934년 석탄액화 시도 당시 영국정부내에서도 에너지 독립, 트랜지션 운동, 석탄액화사업의 실제 경제성, 상업성에 대해 엄청난 우려와 '회의적'인 분석과 의견이 난무했었다.석탄액화는 석유가격 변동성에 엄청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독일의 경우에도 당시 석탄액화가 석유가격 변동에 따라 5배 ~10배 가격이 비쌌다) 대규모의 세금확보와 경쟁제한조치, 보호무역, 관세보호, 외국석유 수입제한이 전제되어야 했다고 한다. 당시 1938년 영국정부 공문서 자료에 의하면 1938년 기준 세계 전체 석유 확인매장량(소비가능량)을 고작 20여년 정도로 분석하고 있었으며 [15] 이는 케인즈의 유효수요이론의 한계를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즉 30년대 오일쇼크와 더불어 여러 보호무역적 조치와 관세부과 정책은 케인즈가 말해왔던 시장의 '야성적 충동'과는 달리 국가주도의 심각한 역효과를 내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이를 통해 케인즈의 주장과는 달리 입증되지 않은 정부에대한 신봉과 허상이 엄청난 피해를 입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버블[편집]

경제 후퇴를 극복하기 위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이자율을 그때그때 조정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며, 침체된 기업 투자를 상쇄할 만한 가계지출 증가를 유도하기 위해서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이 나스닥 버블 대신 주택 버블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 - 폴 크루그먼(케인지언 버블경제학자), 2002년 8월 2일 [10];이후 5년뒤 주택버블대공황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하였다.


케인즈의 이론은 중앙은행의 저금리 정책과도 잘 맞아떨어져 후대의 신케인지언 성향의 학자들도 그이 가정을 물려받아 부동산 시장에 흔히 불리는 '몰빵'이라고 불리는 자본몰아주기식의, 심각한 버블현상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버블 닷 컴과 같은 경제불황에도 모티브를 주었다.

어록[편집]

이자생활자들을 안락사시켜야 한다

[16]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 모두 죽는다

[17]

각주[편집]

각주

  1. 시장 밖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경제 변동의 요소
  2. 1925년 이상기후 흉작 - 미국 GM 찰스 케터링 바이오 곡물 대체에너지 연구 중단 초래(곡물가 폭등, 식량부족 때문)
  3. 리비아 사태, 아랍의 봄 발발에 영향
  4.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 by John Maynard Keynes, Fellow of the King's College, Cambridge, published by Harcourt, Brace and Company, and printed in the U.S.A. by the Polygraphic Company of America, New York;[1]
  5. David R. Montgomery. Dirt: The Erosion of Civilization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7. xi + 285 pp. $24.95 (cloth), ISBN 978-0-520-24870-0.[2]
  6. 6.0 6.1 6.2 National Self-Sufficiency by John Maynard Keynes(1933)
  7. 7.0 7.1 The Failure of The "New Economics" forward by Murray N. Roth Bard[3],한국어 번역문 [4]
  8. 1937년 케인지언 조안 로빈슨 -Beggar-thy Neighbor 발표
  9. 뉴딜 컨설베이션 독점카르텔 내핍조치등
  10. 뉴딜 카르텔- 투자제한 공급제한 소비제한 조업단축
  11. 출처:시사경제용어사전, 기획재정부, 2010. 11., 대한민국정부
  12. 참고 문헌 [5] 이에 반해 미국의 석유회사 엑슨모빌은 1938년 쿠웨이트 부르간 발견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의 최초 유전시추에 성공하였다.
  13. 참고문헌:[6], 두번째 오일쇼크에 대한 부분 [7]
  14. 1928년 적선협정, 아크나카리 협정
  15. [8](1934), [9](1938)
  16. 케인스는 저축은 경제를 망치는 길이며, 소비야말로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17. 어차피 경제위기는 해결되니까 놔두라는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반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