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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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曺晩植) | |
이명 | 호 고당(古堂) |
출생 | 1883년 2월 1일 평안도 강서군[1] |
사망 | 1950년 10월 18일 사망지 불명 |
국적 | 조선→대한제국→북괴[2] |
본관 | 창녕 조씨 |
학력 | 평양숭실중학, 세이소쿠 영어학교 메이지대학법학부 |
가족 | 아버지 조경학(曺景學), 어머니 진강김씨(鎭江金氏) 손자 조경규 |
종교 | 성리학→장로교 |
“ |
북녘과 내 고향 동포들이 그 자의 통치하에 억압받고 고통받고 있는데 나 혼자 좋게 살라고 남쪽으로 내려갈 수는 없다. 나는 이곳에 남아서 동포들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 |
” |
설명[편집]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의 사업가,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이 사람이 북한을 통치했더라면 6.25 전쟁은 안 일어났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평화적인 통일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ㄴ 그냥 이 사람이 북한 통치자였으면 몇 개월 안에 바로 통일했을 듯
일제 시절[편집]
평양 메리야스 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이자 성직자였다. 전북 고창 출신의 어느 수꼴과 함께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했으며, 사업가 중에서도 드물게 친일을 하지 않은 사례였기에, 이북 지역의 종교인들과 자본가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지지층을 보면 알겠지만, 이분은 기독교, 친미, 애국보수, 복지 지향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반기업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해방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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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틀을 보고도 계속 남아있다가 조만식 슨상님에게 살해당해도 조무위키에서는 일절 책임지지 않습니다.
근데 소련군정이 들어서면서 인생이 막장으로 치달았다. 해방 직후에는 친구이자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대장이었던 현준혁과 함께 조만식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평안남도 지부와 조선공산당에서 각각 16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현준혁이 백의사에 의해 살해를 당하고 소련군이 데려온 웬 병신이 갑자기 정권을 장악해나가더니,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터지고서 반탁운동을 하기 위해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 총재가 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 빽을 믿고 조만식을 가택연금을 시켜버리고 도청했다. 때문에 여운형, 이승만 같은 남한의 정치인들이 월남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사양하며 거부했다. 결국 1950년 김일성에게 죽임을 당했고 심지어 친일파라고 매도당했다.
여담으로 이 분이 현준혁과 함께 만든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에서 준비위원으로 김병연, 노진설, 김광진, 지창규, 김동원, 한근조, 총무부장에는 이주연, 재무부장에는 박승환, 선전부장에는 한재덕, 산업부장에는 이종현, 지방부장에는 이윤영, 교육부장에는 홍기주, 섭외부장에는 정기수, 치안부장에는 최능진 등이 각각 선임되었다. 이 사람들 중에서 일부는 월남을 해서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김일성이 죽였다는 설과 함께 소련으로 끌려가 굴라그에서 죽었다는 설도 있다. 이게 유력한 게, 굴라그는 상당히 혹독한 추위와 열악한 시설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당시 노인이었던 조만식이 거기서 버텼을지는 만무하다.
가족[편집]
조경규가 이분의 손자인데, 이분의 아들이자 조경규 부친인 조연흥 씨는 김일성과 이반 치스차코프가 고려 호텔에 연금시켜버리자 엄마와 함께 월남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