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호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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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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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에서 항복하는 프랑스군 사진.
명호작전(明号作戰, Operation Bright Moon)은 1945년 3월 9일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이 실행한 전략이다.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무력처리 또는 삼구 쿠데타(3.9 쿠데타)라고도 부른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대미 전에서의 협력을 거부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주둔한 비시 정권의 프랑스군을 일본군이 공격하여 명목상 공동 통치했던 인도차이나를 완전한 지배하에 거두었다.
투입일시 : 1945년 3월 9일 - 5월 15일
장소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결과 : 일본군의 승리 , 아시아의 비시프랑스군 소멸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해체 베트남제국, 캄보디아왕국, 라오스제국 성립
일본측 투입인원[편집]
일본측 지휘관 : 쯔찌하시 유우이츠 (土橋勇逸,1891~1972)
일본측 투입인원 : 5만여명
일본측 사상자 : 1000명 이하
여담으로, 이양반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중국에 억류됌
프랑스측 투입인원[편집]
프랑스 총독 : 장 드쿠(Jean Decoux, 1884~1963)
프랑스측 투입인원 : 5~6만5천명
프랑스측 사상자 : 2129명
프랑스측 포로 : 1만 2천명
개요[편집]
1940년과 1941년, 일본은 비시 정권과의 협정에 근거하여 프랑스령에 군대를 전개시켰다(일본 제국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 이후 태평양 전쟁 중에도 프랑스의 인도 차이나 식민지 정부가 통치는 계속했고 군사 면에서는 일본의 인도 차이나 주둔군과 프랑스군이 공동 방어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주둔 프랑스군은 대형 함정의 무장 해제됐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대로의 기존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 방면에서 추축군의 전황이 악화되면서 일본에서는 외무성에서 부처별로 프랑스령 정부 해체의 의견도 나왔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연합군의 대륙 반격이 시작되면서 8월 25일 비시 정권은 붕괴,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이었던 장 드쿠 해군 수석 중장(Vice-amiral d' escadre)은 2월 18일 시점에서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경우는 필리프 페탱 원수로부터 전권을 부여한다고 했다.
주둔 프랑스군이 점차 드골이 이끄는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 성향의 행동을 하면서 일본 육군은 곧 상륙이 예상되는 연합군 부대와의 협공을 경계했다. 1944년 12월에 인도 지나 주둔군에서 개편한 제38군 사령부는 주둔 프랑스군을 무장 해제하는 작전 계획을 검토하며 이를 최종적으로 "명호 작전"으로 명명.
이 동안 제38군 사령관 쯔찌하시 유우이츠 중장은 1944년 말에 가진 회담에서 프랑스의 인도 차이나 식민지 수뇌측의 반응을 보고난후, 공동 방위는 곤란하다는 판단이었다. 마지막 통첩이라고 할 요구 사항은 1945년 2월 1일 최고 전쟁지도회의에서 결정됐다.
2월 28일, 대본영은 남방군에 대해서, 3월 5일~10일 사이에 명호작전을 발동하도록 명령했다.
베트남 침공 일본군[편집]
제38군 (사령관 : 쯔찌하시 유우이츠 중장) - 참가 병력은 약 30,000명.
제21사단 - 하노이 등 통킹 서부, 라오스 북부, 안남 북서부 담당.
제22사단의 일부 - 중국 남부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국경 감시.
제37사단 - 랑선 , 하이퐁 등 통킹 동부 담당.
2사단의 보병 제29연대 기간 - 캄보디아 담당.
독립 혼성 제34여단 - 안남 남부 담당.
독립 혼성 제70여단 - 사이공 등 코친차이나 담당.
제1 남견 함대
소형 함정, 항공기 약간 등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편집]
프랑스 주둔군의 주력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현지인 부대였다. 이 밖에 제5 외인 보병 연대 등이 있었다. 보유하고 있었던 무기는 구식이 많았으며, 전차는 소수의 FT-17 뿐이었다. 그러나 랭손 등의 대 중국 국경 지대에 현대적인 요새가 구축되어 있었다.
주둔 프랑스군의 주력은 프랑스령의 현지인 부대였다. 이밖에 제5외국인 보병 연대 등이 있었다.
프랑스 군사력[편집]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군 (사령관 : 길버트 사비터) - 하노이에 사령부. 프랑스 일반병 · 외인 부대 약 15,000명의 현지인 병사 약 35,000명
북부 집단군 (사령관 : 가브리엘 사비터 중장) - 통킹
중부 집단군 (사령관 : 테르쿠앙 중장) - 안남 및 라오스
남부 집단군 (사령관 : 델 슈크 중장) - 코친차이나와 캄보디아
보안대 (무장 경찰대)
해군 부대
극동 함대 - 통보 함 등 약간.
인도차이나 함대 - 하천 함정 등 약간.
최후통첩[편집]
대본영의 지시에 의거 쯔찌하시 유우이츠 제38군 사령관은 1945년 3월 9일 21시(현지 시간. 이하 동일)의 작전 발동을 결정했다. 일본군은 제1기 작전으로 프랑스군 주둔지를 기습으로 격파하는 것을 목표로 각 부대는 몰래 공격 태세로 이행했다. 마지막 최후 통첩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측에서 수락한 경우는 "3·3·3" 거부한 경우는 "7·7·7"을 암호로 발동 예정 시간 5분 전까지 각 부대에 타전하였다.
3월 9일 18시 일본 측의 마츠모토 쥰이치 특명 대사가 쌀 공출에 관한 협정의 명목으로 사이공의 드쿠 총독을 방문. 공출 협정 조인 후, 마츠모토 대사는 최후 통첩을 제시하고 헤어졌다. 통첩 내용은 프랑스와 일본 공동 방위 정신에 입각, 연합군 상륙 시에는 일본군과 협력하겠다고 요구하며, 다음의 2가지 사항에 대해서 21시까지 2시간 이내의 답변을 요구했다.
"프랑스군 및 무장 경찰을 전면적으로 일본군의 휘하에 넣어 교통·통신 기관을 일본군 관리 하에 옮긴다."
"프랑스령 전역에 대한 일본의 요청에 전면적이고 충실히 협조할 뜻을 포고한다."
검토 후 프랑스 드쿠 총독은 로벨 대령을 사자로 보냈으며 연합군 상륙시에는 일본군 사령부가 전투 지휘 책임을 가지는 것은 인정하지만 2가지의 요구 사항에는 즉답할 수 없단 답변을 하기로했다.
그리고 협상을 계속 이어나갈 의사가 있다고하고 일본군의 도발 행위가 없는 한 프랑스군은 적대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도 제안했다. 그러나 로벨 대령은 21시까지 일본 측에 도달하지 못 했다.
얼마 전 시작 예정 시간 전의 20시 55분경부터 각지에서 일본군의 접근을 깨달은 프랑스군 사이에서 전투가 개시됐고 보병 제227연대는 독단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토교 미군 사령관은 21시를 20분 21시를 20분 이상 지나도 응답이 오지 않아 정식으로 "7·7·7"공격 개시 명령을 발신했다. 21시 25분에 로벨 대령이 일본군 사령부에 도착했으나 일본 측은 응답 내용을 최후 통첩 거부로 보고 작전은 속행되었다.
전초전[편집]
길목이었던 랭손은 인구 2만의 작은 도시이다. 그러나 이 마을에 있는 랭손 요새는 보루2곳 진지 2곳 병영 4곳을 갖추고 7000명의 병력 중,경기관총 300자루, 화포 80문, 전차 10량을 배치하고 있는 난공 불락의 요새를 공격 제37사단 휘하 보병 225연대는 총원 1500명 미만일 뿐, 공략에는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연대장 시즈메 타케지대령은 랭손 요새 사령관인 에밀 레모니어 소장과 수비대장인 로벨 대령들 간부를 파티에 초청하며, 전원 체포하려고 계책을 짜냈다. 그리고 프랑스군에 공격 개시 예정일 당일 3월 9일, 파티는 예정대로 진행됐고, 계획대로 공격 개시 예정 시간인 22:00 직전 레모니어 소장, 로벨 대령 이하 간부들을 회장에 돌입한 헌병대에 의해서 전원 구속시켰다.
1기작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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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야습은 성공했고 다음날에는 프랑스군 기지 대부분은 제압됐다. 프랑스군 간부 2/3은 사이공에 외출중이라, 조직적인 응전을 못하고 1시간 정도로 주둔지가 제압되고 드쿠 총독도 저항하지 않고 포로가 됐다. 랭손의 병영과 돈단 보루, 하이퐁 등의 북부 거점에서는 프랑스군의 거센 저항이 있었지만 3월 12일 오후까지 항복했고 프랑스 해군 함정도 일본 해군기의 공습과 자침, 나포 등으로 궤멸했다. 일본군의 손해는 비교적 경미하고, 제37사단에서는 전사자 189명, 전상 약 300명이었다.
투항한 프랑스군은 무장 해제되었다. 이 때 랭손에서는 보병 제225연대가 포로 3,000명 중 프랑스인 장병 300여명과 사전에 체포했던 레모니어 소장, 로벨 대령포함 기타 간부들을
"정세는 매우 불안하고, 긴박한 사태에 직면" 했다는 판단하에 참수형을 비롯한 처형식을 거행한다. 하장성 에서도 50명의 포로가 처형된다. 그리고 대조적으로 로빈 함락시에는 포로의 처형직전, 일본군 장교가 제지한적도 있다.
일본군은 레모니어 장군이 항복을 절대적으로 거부하자 레모니어 장군 휘하의 포로중 부상병들을 추려내서 참수나 총살을 시켰다. 결국에는 레모니어 장군도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참수형으로 죽는다.
제2~3기 작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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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일본군은 각지의 중요 시설을 접수하는 제2기 작전과 프랑스군 잔존 부대에 대한 소탕전인 제3기 작전을 실시했다. 제3기 전략은 디엔비엔푸 등의 산악 지대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난항을 겪었고
4월 초 종료 예정이었던 것이 완전소탕이라 선포한것은 5월 15일이다.
프랑스군은 일부 부대만이 중국령으로 빠져나왔다.
3일간 저항했던 동 당 마을의 53명의 프랑스군 생존자가 총살당하거나 참수당했다.
랭손전투이후[편집]
랭손에서 일본에게 항복을 거부하다 죽은 레모니어 장군을 기념하는 기념판, 1957년 세워짐.
에밀 르모니에 장군에게 통킹 부대 제 3군 지휘관 1945년 3월 10일 적으로부터 랭손에 붙잡혀, 총알이 없었을 때도 2번이나 항복을 거부하고 차라리 참수를 선택한, 명예를 어긋나는 행동보다는 역사에 남는 것을 선택한, 프랑스 의지와 성격이 무엇인지 보여준 예다.
레모니어(1893~1945) 장군의 사진.
이 전투 이후로 일본군은 아주 그냥 프랑스군을 좆으로 보기 시작함
일본본토반응[편집]
국내에서는 일불 개전 다음날의 3월 10일에는 미군에 의한 도쿄 대공습이 개시되었다.
또 지금까지는 "연합국의 국민"으로 자유롭게 행동했던 재일 프랑스인은 모두 경찰에 억류되어 주일 프랑스 대사 이하 전원이 가루이자와 등의 피서지로 보내고 종전 때까지 연금 상태에 놓였다.
결과[편집]
이 작전에 관해서는 다른 연합군의 침공과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주둔 프랑스군을 압도하는 것과 동시에 프랑스의 식민지 정부 기구를 지배하에 두었다.
3월 9일 작전 개시 직전 일본군은 프랑스 보호령이었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황제, 국왕에게 무력 사용 결의와 "독립을 선언할 수 있다" 취지를 연락하는 사자를 보내고 있었다
이에 따라서 3월 11일,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바오다이 황제는 프랑스와 보호조약을 파기하고 쩐통킴(陳仲金)을 수반으로 하는 베트남 제국(월남) 수립을 3월 11일 선언했다.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도 3월 13일에 선언을 이어갔다. 라오스 루앙프라방 왕조의 시사방봉 국왕은 처음엔 프랑스의 패배를 믿지 않았지만, 일본군 부대의 전개를 보고 4월 8일에 독립선언을 했다.
일본군은 프랑스인의 재산 등을 보호하겠다고 선언했지만 프랑스령 정부를 온존하는 정책은 호치민의 반발을 불렀다.
이 해 베트남 북부는 홍수나 이상 저온에 따른 흉작으로 식량 부족을 심각하게 겪은데다 연합군의 공습에 의한 철도 파괴로 인한 베트남 남부의 식량 수송 문제로, 다수의 베트남인이 아사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베트남인의 반일 정서가 높아졌다.
호찌민은 그 해 5월 보응우옌지압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베트남 해방군을 출범시키고 각지에서 민족 해방 위원회를 조직하고 바오다이 황제의 베트남 제국과 대치했다.
일본군은 계속 인도 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의 방위 태세를 강화하여 진지의 구축이나 쌀 등 식량 비축했다.버마 방면에서의 영국군의 침공에 대비해 명호 작전을 마친 독립 혼성 제37사단은 태국으로, 독립 혼성 70여단은 말레이로 전진했다.
이후 프랑스군은?[편집]
중국으로 탈출에 성공한 프랑스 주둔군은 원래 북부 집단군 사령관이었던 가브리엘 사바티에 중장의 지휘 하에 윈난 성에서 재건이 진행됐다. 제5외인 연대는 본래의 3개 대대 편성이 1개 대대로 축소 개편됐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종전까지 실현하지 못했다.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에 의한 협의가 열린 북위 16번 선을 경계로 한 북부의 치안 유지는 장개석(중화 민국), 남부에는 동남아 지역 연합군 총 사령관 루이스 마운트 배튼 에 위임됐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는 중국군과 영국·인도군에 의해서 이뤄졌지만 남부에서는 연합군의 파견이 지연되어 프랑스군 부대의 도착도 늦어졌고 이 일로 인하여 베트민 세력 확대를 야기하게 되었다.
중국령으로 탈출한 주둔 프랑스군이 귀환한 것은 1946년이 되고 나서였다.
드골 장군은 미국과 영국 중국 보고 "우리 개털리는데 왜 안도와줌?" 이라며 극딜날림
비시프랑스라고 했지만 얘네들도 동포라고 생각했고, 나치독일이 힘이 약해짐에 따라서 베트남에 있던 비시프랑스는 프랑스 임시정부 성향을 띄게됌
미군은 제 14 공군을 보냈지만 오폭으로 인해
수용소에있던 600여명의 수용자중 25명이 죽었다.
요약[편집]
참고로 비시프랑스는 일본과 같은 추축국인데 베트남에서 일본이 팀킬한거다.
일본 : ㅎㅎ 프랑스님들 파티초대함
프랑스 : (일단 가보자) 어... 근데 무슨일임?
일본 : 사실 내 포로가 돼라고 ㅋ
프랑스 : 어 시발...
일본 : 항복해 시발
프랑스 : 지랄 ㄴㄴ
일본 : 맛보기로 몇명 죽여야겠네 이래도?
프랑스 : 지랄 ㄴㄴ
일본 : 다죽여야겠네.
프랑스 : 야이 미국 중국 영국 개새끼들아 우리 개털리는데 제대로 안도와줌?
프랑스 : 일단 중국으로 ㅌ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