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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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제 | ||||
네르바 | 트라야누스 | 하드리아누스 | 안토니누스 피우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
출생 | 121년 4월 26일 이탈리아 로마 |
즉위 | 161년 3월 7일 |
사망 | 180년 3월 17일 오스트리아 빈도보나 |
국적 | 로마 제국 |
16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죽자 즉위한 황제로서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다. 22년 동안 사소한 소란 하나 없이 고요했던 전임 황제 안토니누스와 달리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즉위했을 때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자연재해가 연속으로 터지고 도나우 강 유역의 게르만족과 동방의 파르티아가 준동하면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연달아 터지는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의 이복동생인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황제로 임명해달라는 요청을 원로원에 보냈고, 임명되자마자 바로 동방 전선으로 보냈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파르티아를 조지고 동방 전선을 안정시켰다. 한편 아우렐리우스 황제 본인은 가장 심각한 도나우 강 전선으로 향했다. 게르만 족들은 도나우 강을 넘어 일리리쿰과 판노니아 속주를 약탈하고 당시 아드리아 해의 중요한 항구도시였던 아퀼레이아를 포위한다. 이는 킴브리 전쟁 이후 약 300년만에 로마 본토가 이민족의 공격을 받게 된 사태였는데 문제는 동방에서 넘어온 전염병(홍역 아니면 장티푸스였다고 한다)이 서방까지 넘어와 4백만 명의 인구가 전염병으로 죽어 군을 보충하는 게 어려워졌고 연이은 자연재해에 전쟁까지 연달아 터져서 국고까지 텅 비었다.
이에 황제는 황실 재산을 전부 팔아서 국고에 기부하고 로마 역사상 최초로 대규모 노예 해방을 실시하여 해방노예와 검투사들을 징병하여 방어군에 편성시켰다. 여기에 더해 달마티아 속주 일대의 산적들을 끌어다 병력을 보충하고 로마에 우호적인 게르만 족과 스키타이 족까지 용병으로 고용하여 아퀼레이아 포위군을 공격해 몰아내고 빼앗긴 속주를 되찾았다. 이 즈음에 공동 황제로서 책무를 나누어 맡던 루키우스 베루스가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뇌졸중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황제는 다시 도나우 전선으로 가야만 했다. 아퀼레이아에서 박살낸 마르코만니, 콰디, 아이지게스 족이 여전히 로마를 노리고 있었고 라인 강 유역의 카티족, 벨기에 국경지대에서 침입하는 카우치족까지 전부 상대해야 했고, 북아프리카에서는 마우레타니아의 토착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히스파니아 속주까지 침입했고 황제령인 이집트에서는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유목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더해서 갈라키아 지방 동부에서 살던 코스토보키 족이 사르마티아 족을 설득해 동맹을 맺은 후 도나우 강 하류를 건너 발칸 반도로 남하해 그리스까지 약탈했다가 쫓겨나듯이 물러났다. 아우렐리우스는 장군들과 함께 가장 큰 위협인 도나우 강 유역의 게르만들족들을 박살내는 일에 착수했다. 로마군은 제일 먼저 강을 넘은 후에 콰디 족을 박살내고, 마르코만니 족과 전쟁을 치른 후 마지막으로 아이지게스 족을 쳤다. 이 때 이들의 본거지까지 공격해 잡혀간 민간인과 군인 포로들을 전부 돌려받았으며 도나우 강 북쪽 16km의 제방을 보수하고 그 지역에 살던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속주들을 복구해 전선의 방비를 재정비했다.
그리고 오랜 평화로 인해 약해진 로마군의 체질 개선에도 손을 댔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전임 황제인 안토니누스의 교육 철학 때문에 전술적인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전략적인 측면에는 매우 유능했고 일선에서 직접 군을 지휘하며 쌓은 실전 경험을 반영시켜 로마군을 손보았다. 이 조치 덕분에 훗날 콤모두스가 깽판을 쳐대서 나라를 개판 5분전으로 말아먹었지만 외적의 침입은 없었고 군대도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전선을 지켰다.
한편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했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황제가 죽었다는 거짓 소문을 듣고 반란을 일으켰고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진압을 위해 직접 동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 반란은 싱겁게 끝나버렸는데 황제가 오기도 전에 속주 군단 병사가 아비디우스를 죽인 후 그 머리를 증거로서 황제에게 넘겼던 것. 황제는 아비디우스를 정중하게 장례를 치뤄준 뒤 매장하라고 명령했고 아비디우스와 같이 행동한 장남만 추방하는 선에서 뒤처리를 마무리지었다. 어쨌든 계획대로 동방을 순회한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30년간 해로했던 아내인 소 파우스티나를 잃었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그때까진 결격사유가 없었던 콤모두스를 정식 후계자로 지명했다. (콤모두스가 본격적으로 맛탱이가 간 건 황제 즉위 후에 2번의 암살시도를 겪은 후부터다. 친어머니를 사춘기 시절에 여읜 콤모두스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들에게 의지했는데 그 중 큰누나인 루킬라를 엄마처럼 여기고 따랐다. 그런데 큰누나인 루킬라는 야심많고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아버지 생전부터 아버지가 없는 로마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콤모두스가 정식 후계자로 지명되자 황후의 자리를 잃어버릴 걸 우려해 치기 어린 악감정으로 동생을 암살하는 음모를 꾸몄다. 황족 여러 명과 그녀의 조카, 콤모두스의 장인이 가담한 이 첫 암살시도는 시행자인 조카가 바로 콤모두스를 칼로 찌르지 않고 '원로원이 너에게 이 칼을 보내노라!'고 겉멋 든 대사를 치느라 호위병에게 바로 제압되어 실패했다. 이 후폭풍은 엄청나서 직접 가담한 자들은 모조리 유배 후 사형되었고 애꿎게 원로원이 언급되어서 원로원 의원들도 상당수가 갈려나갔다)
로마로 돌아온 황제는 개선식을 치뤘고 자신을 조각한 청동 기마상 제막식도 치뤘다. 허나 콰디족과 마르코만니 족이 연합하여 또 도나우 전선에서 깝치기 시작하자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힘겨운 몸을 이끌고 전선으로 향했다. 이 때 황제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어 주치의가 아편을 조금씩 넣어 제조한 약이 아니면 고통을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제3차 마르코만니 전쟁을 치른 후 황제는 바바리아 지방의 레겐스부르크 일대를 시찰한 뒤 병영 기지인 카스타라 레기나를 건설하여 보강했다. 그리고 피폐해진 속주들에 정복한 게르만인들과 포로들을 이주시켜 정착민으로 만드는 정책도 시행했다. 이들에게는 자유가 보장되었고 전사로서의 안정적인 삶을 동경해 보조군으로 입대하는 일이 많았던 게르만족들에게는 매우 구미당기는 조치였고 항구적으로 자리를 잡아 동화되었다. 다만 이탈리아 북부로 이주한 이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다가 반란을 일으켜서 제압해야만 했다.
이런 결정을 도맡은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180년 3월 17일, 악화된 건강 때문에 전염병에 걸려 빈도보나(오스트리아의 빈)의 전선 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떠오르는 태양에게 가라. 내 태양은 지고 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당대에나 오늘날에나 가장 고결한 로마 황제로서 평가가 높다. 자신이 배운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묵묵히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하얗게 산화해버린 명군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철학 공부를 좋아했고 사색을 즐겨했던 황제는 제위 시절 내내 이민족들과 시도때도 없이 전쟁을 치뤄야만 했고, 그가 있던 전장은 하루 종일 찌뿌린 하늘에서 찬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게르마니아 지방이었다. 따뜻한 지중해 지방과 달리 습하고 추운 곳이었고 전선에서 매일 보는 풍경도 팔다리가 잘려나간 시체들이 썩는 것이었으니 짜증을 낼만도 했다. 허나 황제는 불평 한 마디 없이 자신이 바라는 걸 모두 제쳐두고 책무를 수행했다. 국고가 부족하자 황실 재산을 탈탈 털어 보강했고 최전선에서 일반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며 싸웠고 그 와중에도 최고 재판장으로서 훌륭한 판례를 많이 남기기까지 했다. '멸사봉공'이라는 말을 현실에서 실천한 그의 통치는 훗날 악명 높은 군인 황제 시대에 즉위한 황제들도 그의 통치를 본받겠다고 맹세할 만큼 모범적이었다.
로마에 있던 고대 로마 황제들의 동상이 많이 파괴되었지만,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청동기마상은 중세 시기에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착각한 덕분(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에 파괴를 피하고 남았는데, 르네상스 시기 미켈란젤로가 캄피톨리오 언덕을 재정비하면서 광장 가운데로 배치시켰다. 이후 수백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현대에 들어 대기 오염으로 인한 부식을 피하기 위해 근처의 박물관에 보관하게 됐고, 그 자리에는 복제품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