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포함 격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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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1967년 1월 19일, 대한민국 해군 소속 초계함 당포함이 동해안에서 북한군의 집중 해안포 포격을 받아 격침된 사건. 휴전 협정 이후 처음으로 NLL에서 북괴가 도발한 사건이다.
전개[편집]
1967년 1월 19일, 어선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 명태를 좀 더 많이 잡으러 명태가 많이 서식하는 NLL 북쪽으로 항해한다.
당포함은 어민들을 지키기 위하여 NLL을 넘어 어선들을 저지하려는 그때, 갑자기 북한 경비정 2척이 출현했다. 당포함은 순간적인 직감으로 '북괴가 어부들을 납북하려고 한다'고 판단해 경비정 두 척에 위협을 가하며 내쫓았다.
어선들을 끌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던 13시 55분, 북한 육군이 해안가 포진지에서 기습적으로 122mm 해안포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약 10여 문의 해안포가 당포함을 향해 다굴을 하여 당포함은 기관실을 시작으로, 스크류, 기관포탑 등이 가격으로 전투 능력을 상실하며 당포함은 매우 빠른 시간에 항행 불능에 처한다.
마지막 저항으로 당포함도 급히 대응 사격을 했으나 당포함의 무장은 3인치(76.2㎜) 포 1문, 40㎜ 6문, 20㎜ 4문에 불과하여 북한군에게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사거리가 짧았던 40㎜와 20㎜ 기관포는 북한군 포대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동해 바다에 힘없이 낙하하고, 그나마 쓸 만한 3인치 함포는 북한군의 집중 사격에 힘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게다가 북한군 해안포의 대다수가 위장색과 자연 지물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곳에서 포탄이 잔뜩 날아오는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상황까지 벌어졌다.
북괴군이 계속해서 시끄럽게 굴자, 타지에서 작전 중인 다른 해군 함정들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달려와 당포함을 보호하였고 쫄아버린 북괴는 단번에 포격을 멈췄다. 함정들은 당포함을 끌고 가서 수리를 시키려 했으나, 이미 손 쓸 수 없을 만큼 망가져 버렸기 때문에 모든 선원이 당포함에서 퇴함하였고 결국 14시 30분경 당포함은 결국 침몰하고 만다.
다음날 오전까지 해군의 구조 작업이 있었고 승조원 79명 중 51명이 구조되었으나 그 중 11명은 후유증에 시달리다 사망했고, 11명은 중상을 입었으며, 28명은 시신을 찾지 못해 미수습으로 남았다. 침몰 장소가 NLL 근처여서 북괴의 공격이 우려되어 제대로 된 조사를 할 수 없었던 데다가, 당포함이 210m의 깊은 바다 밑에 가라앉았기 때문에 인양도 불가능했다.
사건 이후[편집]
- 이 사건은 우리군에 과실이 넘어가게 끔 북괴가 치밀하게 계산해 실행한 사건이다. 형식상 먼저 NLL을 넘어온 우리 해군에 과실이 있지만 악의가 없던 당포함에 과잉 대처를 한 북한의 책임이 훨씬 크다. 실제로도 남한은 제 1, 2차 연평해전, 대청해전 등에서 북괴군에게 실사격을 가하기 전에는 경고를 하였기 때문이다.
- 당시 월북했던 어민들을 중 일부는 자기 때문에 죽은 당포함 승조원들에게 미안하다며 자살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 1월 20일 남북이 이 사건에 대한 공동 조사를 진행하겠다고 하였으나, 이튿날 북괴가 바람을 선언하면서 무산되었다.
- 격침된 당포함을 대신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PCE-50함을 사들여와, 거진함으로 명명하였다. 이름의 유래는 이 당포함이 침몰된 거진읍에서 따온 것이다.
- 당시 박정희 정부의 미온적이고 수동적인 대처가 논란이 된 바 있다.
- 정부는 어로 보호 업무를 대한민국 해군에서 농림부와 내무부로 이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