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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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만 있다면야...


개요[편집]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 사이에 3차례에 걸쳐서, 10월 30일에는 1차로 울진 나곡리 해안에 30명이 상륙하였고 11월 1일에는 2차로 울진 고포 해안에 30명이 상륙, 마지막 3차로 11월 2일에는 삼척 해안에 60명의 북조선 무장공비가 상륙했다. 이들이 완전히 정리된 것은 12월 28일의 일로, 그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사건이 바로 평창에서 발생한 이승복 어린이 피살 사건(12월 9일)이다. 이승복 어린이는 생일도 12월 9일이고 기일도 12월 9일로, 공교롭게도 본인의 생일날에 죽임을 당했다.

한국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무력도발사건이다.

배경[편집]

1960년 후반은 데탕트의 싹이 트이기 시작했던 시점으로, 이때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슬슬 발을 떼기 시작하면서 마무리하고 있었다. 냉전의 긴장이 서서히 완화되어가던 시점에서 북조선은 한반도의 긴장 상황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안 그러면 중국과 소련이 지원을 잘 안 해줬을 테니까. 실제로 일성이가 이 사건으로부터 약 한 달 전에는 북한 건국 20주년 기념사를 통해서, 남조선에서의 혁명은 주권을 쟁취하기 위함이며 여기에 사용될 수단으로는 무력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등, 남조선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관심을 건넸다.

김일성이 게릴라 전술을 광적으로 집착한 것도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게릴라 전술은 잠입, 문화 적응, 교묘한 선동, 평화적 접근 등이 기본인데 이따위로 했던 걸로 봐서는 김일성이 뇌가 없다고 봐야 할 듯하다. 김일성 본인피셜로는 독립운동 할 시절부터 게릴라 전술을 많이 펼쳤다고 하지만 이걸 봐서는 게릴라 전술을 펼쳐 본 경험이 전무하다고 보는 게 좋을 듯한데... 애초에 이 새끼는 독립운동했다고 구라치는 새끼다.

무장 공비들이 위조지폐를 지참하고 있었다는 정황을 봐서 남한의 경제 마비를 통해서 경제 격차를 줄이기 위함이라는, 다소 찌질한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편집]

해안 초소의 경비 상태가 매우 개판이었기 때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당시 해안 초소에 있던 근무 인원이 6명에 불과했는데, 분대장이 말년병장의 전역을 축하한다고 4명이 술집으로 가버린 상태였고, 남은 인원 2명이 함께 경비를 서야 했지만 한 명은 고작 2~3달 더 고참이라는 핑계로 내무실에서 자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문무림 일병)은 그들이 상륙하는 걸 발견했지만 빤스런을 시전했다. 잠시 후 4명이 돌아왔을 때 문 일병이 분대장에게 보고했지만 횡설수설로 얼버무리고는, 바다 쪽으로 박격포 몇 발을 쏜 후 빨갱이들을 조져버렸다고 허위보고를 올려버리는 바람에 당연히 들통나고 이 사태가 해결되고 나서 두 일병들은 사이좋게 사형 판결을 받았다. (추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됨.)

행적[편집]

일단 남한의 사복, 노동자 의류 등으로 갈아입은 다음 기관단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지역 주민들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북조선의 책자와 전단을 나누어주면서 북조선의 발전상을 선전했고 조선로동당 입당원서를 나누어주면서 가입을 강요하였다. 주민들이 겁에 질려서 머뭇거리거나 집합 장소에 늦게 오거나 하면 돌로 머리를 깨는 등의 학살을 저질렀다. 이때 인근에서 마을에 놀러왔던 장성읍 거주민 전병두 씨가 대검에 찔려 죽었다. 이 당시는 한창 추수할 시기였는데 밭에서 추수를 하던 농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사상자를 만드는 한편, 택배 아저씨를 납치하여 살해하고 배달하던 택배물을 불태웠다.

역시 거지 근성을 고이 간직한 북괴군답게 영주에서는 무장공비가 소를 약탈하고 장롱에 있던 옷이 도난 당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평창에서는 무장공비가 한 어린이에게 "너는 북조선과 남조선 중에서 어디가 좋냐?"라는 질문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대답하자 입에 대검을 찔러넣어 살해하고, 그의 형과 여동생도 벽에 집어던져서 머리를 박게 하면서 죽이는 일이 있었다. 이때 대검이 입에 찔려 끔찍하게 살해 당한 아이가 바로 그 이승복이다.

외부로 전파[편집]

삼척과 울진은 당시에는 전화선 몇 개만 끊어버리면 인근 지역들로부터 완전히 연락이 끊기는 오지였기 때문에 이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는 직접 밖으로 뛰어나가야 했다. 그래서 주민들이 릴레이 식으로 소식을 전달하는 수밖에 없었고 결국 대남간첩대책본부가 이 사건을 듣게 되는 날은 11월 4일로, 이들의 침투 시기보다 며칠이나 늦어졌다. 삼척과 울진에 이때 비로소 을종사태를 선포하면서 현역 군인과 경찰, 예비군 등이 투입이 되면서 비로소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다.

12월 28일까지 진행된 이 작전의 결과로, 113명을 사살했고 7명을 생포했다. 아군의 피해는 38명의 군경이 전사하였고 23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결과물[편집]

  • 문교부(現 교육부)는 반공 교육 강화를 위해서 국민학교 4~6학년에게 보충 교재를 보급했다. 공부량 늘어난 애들의 띵복을 액션빔
  • 작전통제권이 미국에게 있었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구실로, 대한민국은 특수 상황 중에서 독자적으로 군대를 움직일 수 있게 해주라고 미국과 교섭했다.
  • 미국은 대한민국에게 당시 2억 달러 가량의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 무장공비 진압에 뛰어들었던 현역과 예비역들이 무공훈장 받았다.
  • 이듬해까지 무장공비 침투 사례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혼란스러워지는 정국 속에서 국가의 안정화를 위해 박정희의 임기를 연장할 필요가 있다며 3선 개헌 떡밥이 기어나왔다.

특수부대 임무 주의 사항 중에 민간인에게 총을 갖다대고 "야 너 안 따르면 쥬금"이라고 협박하는 방식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민간인은 무서워서 정부에 알릴 테고 제 아무리 천하의 블랙워터와 델타포스라도 임무는 끝장나기 때문이다. 적어도 임무 완수보다는 주민들을 먼저 돕는데 신경을 써야 했다. 예로 들면 쿠바 혁명과 북베트남에 침투한 그린베레의 성공 사례이다. 그러나 김돼지는 임무 완수부터 하고 본다. 사실 임무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다.

진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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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응?? 사실인가??? 시발 모르겠다."

4호 전차 타고 내려왔다 카더라.

뭔 대전기 탱크 타고 내려왔노 북괴 새끼들 가난은 여기서부터냐

ㄴ 그래도 당시에는 30년밖에 안 된 나름대로 중고품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