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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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면수심(人面獸心), Human Trash/Human Garbage
개요[편집]
디시위키가 가장 좋아하는 부류의 인간이자 가장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부류를 말한다.
국가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있다.
상세[편집]
사실 80%의 인간은 쓰레기다.
네똥기는 인간쓰레기이다. 하루하루 쓰레기를 생산하기 때문에 인간쓰레기다.
부카니스탄에서는 아예 장성택 사형 판결문에 당당히 "개만도 못한 인간쓰레기"라고 적어놓는 등 즐겨쓰고 있다.
아마 북한은 제대로 된 인간쓰레기를 사랑하는 나머지 인간쓰레기라는 단어 자체를 계속 남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도처에서 하나의 집요한 의문을 가득 품고 사는 이들을 본다.
"나는 쓰레기인가?"
쓰레기는 무엇인가? 쓰레기는 필요없는, 더 나아가 치워버려야 할 존재다.
보관을 잘못해서 곰팡이 슨 옷은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라 쓰레기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이 사회의 기능적 용처에 매끄럽게 결합되지 못함으로 인해 자신이 쓰레기라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잘못 강요된 질문이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났을 뿐, 쓰레기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에 시달리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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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gmunt Bauman, Wasted Lives modernity and its outcasts. 정일준 옮김, 『쓰레기가 되는 삶들 -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새물결, 2008은 산업자본주의의 작동이 어떻게 인간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처리하는가를 예리하게 기술한 책이다.
바우먼은 "지구는 만원이다."(위 책, 20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두지만, 자연지리나 나아가 인문지리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리적 공간과 인간 주거지의 분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지구는 결코 만원이라고 할 수 없다."(위 책, 21면)
뉴욕 정도의 인구 밀도로 모든 지구상의 사람들을 다 모을 때, 그들은 텍사스 주에 모두 들어갈 수 있다.
전세계의 인구밀도는 46명 정도 수준으로 파나마와 동급이다.
오히려, " ‘지구는 만원이다’라는 말은 사회학적이고 정치학적인 발언이다." (위의 책, 21면) 즉 그것은 산업자본주의의 생산과 소비 활동에 결합될 수 있는만큼의 인구 이상의 인구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결과 나머지 인구들은 과잉 인구가 되며, 따라서 "쓰레기 하치장"에서 처리되어야 할 쓰레기가 된다.
"‘인간 쓰레기’, 좀더 정확히 말하면 쓰레기가 된 인간들 (‘잉여의’, ‘여분의’ 인간들, 즉 공인받거나 머물도록 허락받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 인간 집단)의 생산은 현대화가 낳은 불가피한 산물이며 현대(성)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것이다." (위의 책, 21-22면)
마르크스가 갈파했듯이, 경제적 진보는 그 진보에 어울리지 않는 생활방식을 축출한다. 그로 인해 지구 곳곳에서는 "과거의 생계 유지 방식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생활수단"은 박탈되지만, 그 생활수단을 대체하는 다른 생활수단은 보증되지 않는다. (위의 책, 22면)
왜냐하면 지속적으로 산업자본주의의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 결합될 수 있는 인간은, "특권화된 지역"(위의 책, 23면)의 특권화된 사람들 뿐이며, 그 외의 사람들은 "과잉 인구"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생계를 유지할 방도를 찾지 못한 망명자와 이주자들은 과잉 인구의 한 축이다. 이들은 특권화된 지역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갖은 수를 쓴다.
현대화된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계속적인 결합을 전혀 보장받지 못한 인간들 역시 과잉 인구의 다른 축을 이룬다.
이 후자의 부류를 바우먼은 '선진국'의 X세대라고 부른다. 19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이전 세대들은 알지 못한 질병들을 경험했다."(위의 책, 28면)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예전 세대들에게 처방했던 치료법을 기계적으로 그대로 처방하고 있다. (위의 책, 29면)
"젊은이들에게는 직업을 ‘평생 계획’의 도입부나 자존심과 자기 규정 문제 또는 장기적인 안정의 보증으로 여기기보다는 융통성을 갖고, 특벼히 까다롭게 굴지 말며, 직업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고, 자리가 나면 너무 많은 것을 묻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일하는 동안만큼은 그것을 즐길 수 있는 기회로 삼으라는 충고가 주어진다."(위의 책, 29면)
그런데 실업이라는 개념 자체가 "구성원들의 역할을 처음부터 끝까지 생산자로 간주하는 사회, 또한 완전고용이 바람직하고 달성 가능한 사회적 조건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 목적인 사회, 따라서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개인적 정체성과 안정된 사회적 지위 그리고 개인과 집단의 생존 사회 질서와 체계쩍 재생산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열쇠-유일한 열쇠-가 고용에 있다고 간주하는 사회의 자기 인식에 의미론적 기원을 두고 있다. "(위의 책, 30면)
이러한 사회의 자기 인식은 인간 세계를 일정한 방향의 당위들(Sollen)로 가득 채우는데, 그 당위들이란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생산에 결합되어 소득을 얻고 그것을 소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핵심 신조를 필두로 한다. (위의 책, 30- 31면)
실업은 이러한 '당위'에서 잠시 벗어난 일시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잉여’라는 개념에는 그러한 의미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어떤 비정상적이 상태, 이상한 것, 잠깐 건강하지 않게 된 것이나 일시적인 하락 등의 의미와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다. ;잉여‘는 그러한 상태가 영원할 것이라고 속삭이며 그러한 상태가 일상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위의 책, 31면)
" ‘잉여’란 여분, 불필요함, 무용함을 의미한다-유용성과 필수불가결함의 기준을 설정하는 필요와 유용성이 무엇이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당신 없이도 잘할 수 있고, 당신이 없으면 더 잘 할 수 있다. 당신이 거기 있어야 할 어떤 자명한 이유도 없고, 당신이 거기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만한 어떤 뚜렷한 정당성도 없다. 잉여로 규정된다는 것은 버려져도 무방하기 때문에 버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마치 환불해주지 않는 빈 플라스틱 병이나 일회용 주사기,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 아무도 사지 않는 상품 조립 라인에서 품질 검사관이 버리는 바람에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 기준 미달 제품이나 불량품처럼 말이다. ‘잉여’는 ‘불합격품’, ‘불량품’, ‘폐기물’, ‘찌꺼기’-와 그리고 쓰레기-와 의미론상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실업자’, ‘노동 예비군’의 목적지는 다시 노동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쓰레기의 목적지는 쓰레기장, 쓰레기 더미이다."(위의 책, 32면)
그럼에도 잉여는 오로지 자발적으로 개인적으로 생겨난 경제적 골칫거리로만 취급되고 있다. 그들은 사회의 부담이고, 잉여가 아닌 사람들이 먹여 살려야 할 사람들로 규정된다. 게다가 잉여의 '사회적 생존', 즉 스스로 가치감을 느끼고 자존감을 누리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에 대해서는 주의가 거의 기울여지지 않고 있다. (위의 책, 33-34면)
오늘날 젊은 세대는 누구보다도 더 많은 수가 스스로를 '잉여'로 느끼게 되었다.
"X세대는 또한 바로 직전 세대보다 훨씬 더 극심하게 양극화되었는데, 이들을 나누는 분리선은 점점 더 사회적 위계의 위쪽으로 움직여왔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쉽게 변하는 사회적 위치, 어두운 전망, 지속적으로 또는 적어도 좀 더 오래 자리잡을 만한 확실한 기회도 없이 근근히 꾸려가는 생활, 살아남기 위해 배우고 익혀야 하는 모호한 규칙들-이러한 것들이 모든 X세대를 무차별로 괴롭히면서 불안감을 조장하고 이 세대의 모든 또는 거의 모든 성원의 자기 확신과 자존심을 박탈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진입 장벽-과거만 해도 지금보다는 낮았다-은 점점 더 높아져 대다수가 넘어설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제 품위 있는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불확실한 기회나마 잡기 위해서는 최소한 고등 교육 학위가 필요하다(그렇다고 해서 그런 학위가 순조로운 인생 여정을 보장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학위가 소수의 특권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세상은 또 한 번 도약을 했고, 그러한 속도를 견디지 못하 승객들은 점점 속도를 높여가는 차량에서 점점 더 많이 떨어져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위의 책, 36면)
그러나 이들이 내재적 특성에 의해 쓰레기로 규정된 것은 아니다. 그들을 쓰레기로 규정한 것은 그들의 태생이나 품성, 의지라는 내적 논리에 따른 것이 아니다. (위의 책, 50면) 머리카락은 내적 논리에 의해 쓰레기가 되지 않는다. 머리카락은 머리에 붙어 있을 때는 트리트먼트를 받고 온갖 애정어린 손길을 받지만, 일단 잘리는 순간 오염물질처럼 취급된다.
이렇게 생겨난 잉여를,, 단지 공무원 준비 시험 학원에, 그리고 컴퓨터 게임이 있는 방 안에, 몰아 넣음으로써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잉여처리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통하는 이유는 "사회적 생존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박탈당한 가운데 생물학적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을 획득해야 하는 힘겨운 작업에 직면해 있는 이들에게는 자신이 설계 때문에 고통받는 것인지 아니면 태만 때문에 비참해진 것인지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 깊이 생각하고 음미할 이유가 없는 것" 때문이다. (위의 책, 81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도 부국 이외의 국가들의 인구들은 '잉여'로 '쓰레기가 된 삶'으로 취급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저 부자들, 즉 지구 자원의 무관심한 소비자들이야말로 지구의 진정한 ‘기생충’, ‘등쳐먹는 자’, ‘기식자’가 아닐까? 따라서 우리가 지구의 ‘인구 과잉’의 원인이라고 비난하여는 ‘잉여’ 또는 ‘과잉’ 출산의 기원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삶의 방식’으로까지, 즉 우리의 정치 대변인들이 ‘협상 불가의 문제’라고 선언하며 필사적으로 방어하겠다고 맹세하는 방식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하지 않을까?"(위의 책, 88면)라는 의문이 당연히 제기된다. 그럼에도 "우리를 걱정시키는 것은 항상 그들의 과잉이다."(위의 책, 90면)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러한 문제들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처리한다.
잉여인간의 산출과 상관없이 '저출산 문제'를 고민한다. 그러나 이것은 생산수단의 소유로 인하여 언제나 생산과정에 결착되어 있는 권력자의 입장일 뿐이다.
다루어지지 않은 질문은, 앞으로 거대한 기술발전-AI, 나노기술, 3D 프린팅-등이 기다리고 있는 미래에,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계급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이다.
잉여인간의 사회적 생존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보이지 않게 만드는 종래의 방법이 문제 없으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 통용될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만, 무조건적인 출산 장려가 이치에 닿는 것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산업 국가에 속하는 한국 사회는, 다른 지역의 인구 문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는 단지 국내의 경제적 필요에 따라 받아들이고 내치고 하는 규범적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경제 내에서 인간 잉여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일조하고 있는 이 경제 시스템이 분담해야 할 의무의 문제도 발생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의무의 수행이, 국내의 잉여를 가속화함으로써 국내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수단 소유권의 독점과, 산업구조의 계속된 변화가 결합되어 발생하는 지역적, 전세계적 차원의 잉여인간화의 문제는, 인간의 취약성과 불확실성을 낳는다.
그런데 "인간의 취약성과 불확실성은 모든 정치 권력의 주된 존재이유raison d'être이다. 그리고 모든 정치 권력은 그러한 자격증을 정규적으로 갱신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위의 책, 99면)
그런데 "개인적 위험을 ‘사회화’하고 이러한 위험의 감소를 국가의 임무와 책임으로 삼겠다는 의도를 천명한" 복지국가적 공식은 "과거 속으로 사라지(101)고 있다." 더 이상 이에 대한 대처는 "사회적 보호 문제가 아니라 법과 질서의 문제로 재분류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잉여의 문제는 개인들이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문제로 전가되고 있다.
국가의 할 일은 잉여화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국가가 잉여화에 정면으로 대응하기 위해 필수적인 전제는, 국가가 생산수단에 결합하지 못한 사람들을 최후로 고용하는 최후고용자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로써 수면 아래에서 보이지 않던 문제들은 체제에 명시적으로 표기되는 쟁점으로 드러나게 된다. 또한 그러한 최후고용자로서 고용한 사람들의 숫자는, 외국에서 이주하여 노동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한 지표로서 기능하게 될 것이다. 다른 과제는, 생산수단의 소유에 대한 지분을 사회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기술 발전이 인간의 노동을 필요 없게 만드는 미래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떠한 경우든, 인간이 시장경제의 변덕에 따라 삶이 쓰레기가 되거나 하는 일은 제도적으로 방비해야 한다.
즉, 사람들은 이 사회에 태어남으로써 이 사회의 생산수단과 자연자원에 대한 지분을 갖게 된다고 보아야 하며, 이러한 지분을 제도적으로 명시화하고 넓혀나가는 일이 추진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분에서 나오는 수익은 사회적 지분급여나 기본소득의 방식으로 분배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병영국가를 추구하며 특권을 보존하기를 바라는 계급과, 병영국가 바깥에서 법과 질서의 억압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계급으로 나뉘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끝>
출저-이산님의 블로그 시민교육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