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우치 츠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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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종신감독님을 다룹니다. 이 문서는 팀을 말아먹어서 다른 팀들에게 감동을 준 감동님에 대해 다룹니다. 모두 이 감독을 위해 따봉을 들어보입시다. |
놀랍게도 도쿄에선 그/그녀를 보기 위한 인파로 교통이 마비되곤 합니다. 본 인물을 욕보일 시 많은 요미우리빠들의 저주로 제 명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
본 인물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그 자체이며, 임종할 때까지 자이언츠 감독직을 맡을 사람입니다. 이 문서에서 설명되는 자이언츠 종신감독을 욕하면 요미우리빠들에게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
호리우치 쓰네오 堀内 恒夫 Tsuneo Horiuchi | |
기본 정보 | |
생년월일 | 1948년 1월 16일 |
출생지 | 야마나시 현 고후 시 |
국적 | 일본 |
학력 | 고후 시립 고후 상업고교 |
신장 | 177cm |
체중 | 72kg |
선수 정보 | |
입단 | 1965년 요미우리 1순위 |
투타 | 우투우타 |
포지션 | 투수 |
경력 | 요미우리 자이언츠(1966~1983) |
지도자 정보 | |
경력 |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코치 (1984~1985, 1993~1998)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2004~2005) |
소개[편집]
성골 요미우리 출신이자 감독 재임기간 동안 팀을 B클래스로 추락시킨 명장
올해는 그에 빙의된 또다른 성골 요미우리 출신께서 새롭게 팀을 하위권으로 이끌고 있다.
우동 만드는 기계에 오른손 검지가 1센치 잘려나가서 검지가 짧다. 이 짧은 검지를 역이용해서 호리우치만의 고유한 커브를 개발해 현역때 잘 써먹었다.
선수 시절[편집]
1차지명 출신으로 그 해부터 좆본을 씹어먹으면서 신인왕을 차지하였다. 27승을 기록한 적도 있으며 각동님의 조언을 실행할 때 까지 통산 승수가 무려 203승이다.
ㄴ근데 이 203승의 대부분인 194승이 30대(1978) 되기 전까지 쌓은 거고 이후론 좆망해서 은퇴(1983)할 때까지 5년간 꼴랑 9승 거뒀다. 추했네.
빠따 실력도 투수치고는 ㅅㅌㅊ였다. 투수로써 한 경기 3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한다. 통산 타율이 0.172인데 홈런을 21개나 쳤고 3연타석 홈런까지 깐 적 있다.(심지어 그 3연타석 홈런 깐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 달성) 투수인거 감안하면 머단한 타격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실력도 넘사벽이였으며 인성도 다른 의미로 존나 넘사벽이였다. 차기 요미우리 종신명예갓동이 되실 분에게 대놓고 쳐개긴것은 물론 아예 개썅마이웨이를 외치고 다녔다. 이게 어느 정도나면 그 오 사다하루의 은퇴식 때 오의 상대투수로 나와 삼진으로 오를 조져버리고 그 다음에 오가 입단 당시 포지션이었던 투수로 등판하게 됐는데 상대타자로 나와서 홈런을 쳐갈기는 눈치없는 쌍놈짓을 저질렀다. 요미우리 OB들은 이 양반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더라.
지도자 시절[편집]
은퇴 후 2차례에 걸쳐서 친정팀의 투수코치를 역임했고 94년도엔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경험했다. 여담으로 랜디 바스가 오 사다하루의 홈런 기록을 노릴 때 이 양반이 투수들한테 "야 쟤 나오면 무조건 고의사구는 아닌데 도저히 칠 수 없는 공만 던져라" 라는 지시를 내려서 투수들이 그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바람에 결국 바스가 홈런 기록 갱신에 실패했다고 한다.
2002년에 셧다운 우승까지 시켜준 하라보살동님을 애미뒤진 프런트가 갈아버리고 어디 또 진성 혈통이 없나 두리번거리다 모셔온 게 이 양반이다. 2004년 취임 첫 해에는 메쟈리그 쌈싸먹는 타선을 만들어 팀 홈런이 무려 259개에 달했다.(지금도 일본 최고 기록) 하지만 홈런을 무지막지하게 쌓은 반면 팀 도루는 마찬가지로 현재까지 일본 최저 기록인 26개에 머무르는 등 기동력이 심하게 떨어졌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거포진들을 잔뜩 갖추고 홈런을 마구 쳐갈겼는데도 투수코치 감독이 있는 팀답지 않게 팀 ERA가 4.50으로 좆망하면서 그 전년 하라보살동님이 기록한 3위에 머무르고 만다.[1]
이 당시 돈지랄로 강타자들을 모조리 쓸어와서 초호화 타선을 구축한 건 좋은데 문제가 수비 포지션을 고려 안하고 마구 쓸어오는 바람에 포지션 중복이 심해져서 혈통님이나 터피 로즈, 요코하마 감동니뮤 등을 원래 맡던 위치가 아닌 다른 위치에 처박아두는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주로 코너 외야를 맡던 선수를 센터라인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따위로 수비배치를 하니 당연히 수비도 좆망해 버리고 말았다.
그 다음해에는 그야말로 어메이징을 달성해 B클래스인 5위와[2] 구단 사상 최다패인 80패 & 구단 사상 최악의 팀 ERA 4.80을 안겨줘 다른 의미로 도쿄핫을 찍어냈고 한신아재들에게 존나 빅웃음을 안겨 주었다. 물론 이놈들은 동넨머튽이 이끄는 팀에게 셧다운패를 쳐먹었지만 한신은 그렇게 일본시리즈라도 나갔지 교진은 시즌 내내 폭망하다가 한신이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에서 상대팀으로써 몸소 한신을 일본시리즈 진출행 열차에 태워줬다. 그렇게 팀이 폭망하자 그제서야 교진 윗선들은 하라보살동님을 다시 모셔왔다. 그렇게 다른 팀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감동님은 뜬금포로 정치계에 입문하게 된다. 재선에는 실패하고 해설하신다는데 지금 또 다른 무능력한 혈통이 이 양반도 하지 못 한 13연패는 물론 B클래스 최하위까지 밀어낼 듯 한 기세로 팀을 쳐말아먹었다. 결국 최하위는 면했지만 혈통니뮤는 끝내 자기 이미지만 망친 채 3년만에 쓸쓸히 물러났고 또다시 보살동이 감독으로 복귀했다.
그래도 호리우치가 감독이던 이 당시에는 화력이라도 좋았고 특히 05년 80패를 찍어 5위로 내려앉았음에도 교류전에서는 반타적 이상은 먹고 들어갔음은 물론(18승 14패 4무) 당시 센트럴을 씹어먹은 한신(87승 54패 5무)에게도 지금 히로시마에게 아낌없이 퍼주는 '느그가 프로가?' 같은 짓거리는 안 했다. 05년 한신 상대 8승 14패, 그래봐야 대준건 대준거긴 하지만.
하지만 이 분이 교진 역대 감독 중 유일하게 포스트시즌 진출경험이 없다는 점에서(다카하시 요시노부와 함께 유이한 리그 우승 경험이 없는 감독도 포함) 최악의 감독이란 건 부인할수 없다.
감독직 물러난 후에는 자유민주당 비례대표로 출마해 정계진출을 노려봤지만 2010년엔 낙선했다. 하지만 2013년 자유민주당 비례대표 나카무라 히로히코가 딴 세상으로 가면서 의원직을 승계한 덕에 정계에 진출은 했다.
2016년에 다시 참의원 선거에 나섰지만 낙선됐다. 이후에는 해설자, 평론가로 일하는 중이다.
- ↑ 심지어 시즌 승패 성적도 전년도와 사실상 같았다. 2003년 하라교진의 성적이 71승 66패 3무였고 이듬해인 2004년의 호리우치교진의 성적은 71승 64패 3무였는데 2004년엔 긴테쓰랑 오릭스의 합병으로 인한 프로야구 재편문제로 야구계가 시끄럽던 와중에 합병 반대를 외치던 선수회에서 파업을 선언하면서 2경기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승패가 같다.
- ↑ 그것도 개막부터 6월 초까지 최하위에 머물다가 미스터 아카헬 야마모토 고지가 이끌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더 좆망해서 최하위는 간신히 면했다. 근데 추한건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