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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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은 한국 1호 여자 판사, 여자 변호사다. 1952년 변호사를 처음 개업했다.
기수가 다른 황윤석이란 여자 판사는 현직 판사로 일하던 중 퇴근후 잠자다가 1960년 남편 손에 독살당했다. 참고로 황윤석은 황의돈이란 학자의 딸이며 매천야록의 저자인 황현은 황의돈 부녀와 조금 먼 친척.
미군정 때 관료였으며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인 정일형의 부인이다.
호주제 폐지 운동을 했다.
활동[편집]
정일형은 아들 정대철 손자 정호준이 같은 지역구에서 3대를 국회의원을 한 집안이다. 그리고 민주당꽈 정당에서 활동한다.
이승만이 판사 임용을 거부했다 한다. 김병로 1대 대법원장이 이태영을 판사 후보로 추천하자
이승만은 이태영이 여자라는 이유를 들어 판사 임명을 반대했지만, 감정적으로도 안좋게 생각했다.
이태영은 이우정, 공덕귀, 박용길 등과 함께 1970년대 박정희 반대 운동과 함께 페미니즘 운동, 위안부 문제 해결 요구, 기생관광 반대 운동 등을 했다.[1] 이우정, 공덕귀, 박용길 등은 YWCA 여자 청년회에 몸담던 사람들이다.
공덕귀는 윤보선 대통령 부인, 박용길은 문익환 목사 부인이다.
박정희 정권 때의 반독재 운동 중 여성 운동가들 지도자는 이태영, 이우정, 공덕귀, 박용길 등이다.
호주제 폐지 운동[편집]
호주제가 부당한 소리라면서 호주제 폐지 운동을 오랫동안 했다. 이태영은 1952년부터 호주제는 남녀 차별하는거다, 엄마나 할머니가 어른인데 호주는 어린 아들이나 손자다 등의 이유를 대며 1952년부터 호주제 폐지 운동을 벌여왔다.
이태영은 생전에 못 봤지만 2005년 3월 2일 대법원에서 호주제를 위헌판결 내려 호주제를 폐지했다.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남성 운동이 분열, 정채기, 한지환 등 호주제 폐지 찬성론자와 성재기 등 호주제 폐지 반대론자로 나뉘게 됐다.
그런데 이태영 생전에 맞붙지는 못했다. 남성 인권 운동은 1994년 2월 건국대, 명지대 교수 등으로 출강하던 정채기가 1992년부터 일본 남성협회 회원으로 있으면서 보고 들은 것을 한국에 처음 소개하면서 알려진거다. 성재기는 1999년 10월 2일 군가산점 폐지에 자극받고 남성운동에 뛰어들었다.
기타[편집]
1952년 한국인물사에 명성황후를 재조명하는 글을 썼다고 한다. 출처요망. 1952년 이전에도 명성황후를 재조명하는 글이나 논문 있으면 추가바람.
성재기는 이태영을 상당히 혐오했다. 박정희 유신독재를 반대하는데 참여했고 여성단체 지도자였으며 이승만도 이태영의 판사 임용을 거부하였다. 수구 보수들이 극도로 싫어할 만한 인물.
수구 보수면서 무신론자면 더욱 극혐할듯.
그런데 이승만의 측근인 이윤영의 처가 쪽과 이태영의 남편 정일형의 외가가 먼 인척간이었다.
주석[편집]
각주
- ↑ 박정희는 5.16 초기 성매매업소와 술집 등을 단속했지만 1963년부터는 단속을 사실상 중단하고 방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