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초칠국의 난
조무위키
전한에서 일어났던 반란. 吳楚 七國의 亂 또는 칠왕지란(七王之亂)
오왕 유비가 주축인 제후국 연합들과 한 중앙조정과의 한판싸움.
오, 초 이외에 총 7개 제후국이 연합하여 오초칠국의 난이라 불린다.
발단[편집]
유비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유비의 왕세자)이 한문제의 황태자와 육박[1]을 하다가 황태자가 무르기를 요청하였으나 왕세자가 들어주지 않아 빡친 황태자는 바둑판으로 그 자리에서 왕세자를 헤드샷시켜 죽여버렸다.
근데 황실에서는 유비의 아들이 엄연한 한 황실의 일원이자 제후국 오나라의 왕세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관에다가 시체만 넣고 유비에게 보내는 만행을 저질러버렸다.
이에 개빡친 유비는 아들의 시신을 다시 장안에 있는 황궁으로 보내어 장례를 치러줄 것을 요구하며, 늙어서 병들었다는 핑계로 황제의 조정 입궁 명령도 거부하며 히키코모리처럼 지냈다.
문제는 황제였던 문제도 사촌형이자 고조 유방의 조카인 유비가 당시 한 황실에서 나일리지를 가장 많이 쌓았던 탓에 막을 수 없었고 결국 유비가 황궁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못박아버렸다.
문제가 죽고 황태자가 황위를 계승한 것이 경제다. 경제는 유비의 5촌 조카긴 하지만 자신의 아들의 직접적인 원수인 탓에 이때 유비와 한 황실의 사이는 더 틀어진다.
조조의 상소[편집]
한경제는 황제에 즉위하고 난 뒤 황태자 시절부터 자신이 신임하던 조조를 전폭적으로 밀어주었다.
조조도 이에 응답하였는데 유비가 황궁에 오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조조는 아래와 같은 상소문을 올리며 유비를 디스했다.
“ | 고조께서 처음 천하를 평정하였을적에 여러 형제가 나이가 젊고 후손들은 나약했으므로 같은 유씨를 여러 왕으로 봉했습니다. 지금 제(濟)나라에는 70여개, 오(吳)에는 50여개, 초(楚)에는 40여개의 성이 있는데 이것은 천하의 절반을 그들의 영지로 봉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오왕 유비(劉濞)는 병을 핑계로 입조조차 거부하고 있는데, 옛 법에 이르면 조정의 신하로서 조정에 입조하길 거부하는 자는 참해야 마땅하온데 선제께서 차마 그리못하시고 특별히 선처를 베푸시어 몇번의 매질로 끝냈는데, 이는 더할나위없는 인덕입니다. 헌데 오왕은 그 일을 계기로 반성하고 입조하여 새로운 면모를 보여 충신임을 보여야할진대 더 교만해졌습니다. 산에서 구리를 캐어 동전을 만들고 바닷물을 졸여 소금을 만들며, 천하의 대역(大逆)들을 모아 모반을 꾀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삭번을 해도 오·초·제등이 모반할 것이요, 삭번치 않아도 역시 모반할 것입니다. 만일 삭번을 하며 그들의 반란이 좀더 일찍 일어날진대, 그리하면 그들의 준비는 충분치 못하므로 그 피해도 적을뿐더러 쉽게 진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삭번하지않는다면 반란은 늦출지언정 그 피해가 더 클 뿐입니다. 평정하는데도 전자만 못할 것입니다. | ” |
반란[편집]
조조의 디스에 안그래도 빡쳐있던 유비는 죽창을 제조하며 경제의 정책에 불만있던 다른 제후국들의 왕들도 설득하며 세력을 모았다.
그 결과 7개 제후국이 참여하였으며 그 라인업은 아래와 같다.
- 오(吳)왕 유비(劉濞)
- 초(楚)왕 유무(劉戊)
- 조(趙)왕 유수(劉遂)
- 치천(菑川)왕 유현(劉賢)
- 교서(膠西)왕 유앙(劉卬)
- 제남(濟南)왕 유벽광(劉闢光)
- 교동(膠東)왕 유웅거(劉熊渠)
이들은 간신 조조 토벌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죽창을 들었었다...
결말[편집]
전한의 명재상 주발의 아들인 주아부라는 띵튽에 의하여 결국 진압당한다.
반란군이 토벌하려던 조조는 원앙의 계책에 의해 탈중국하게 된다.
유비는 목찔려서 죽고 나머지 왕들도 자결하는 등 좆망하였으며 그들의 영토는 대부분 중앙정부로 복속된다.
하지만 오히려 전한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며, 군현제가 출현하는 바탕이 되었다.
예언[편집]
고조 유방은 조카 유비의 관상을 보고서는 언젠가 죽창을 들게 될것이라고 말하였다.
조조의 아버지는 아들이 집안을 말아먹을 것을 예상하고 자살하였는데, 10일 뒤 오초칠국의 난이 발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