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사 나리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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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아래에서 엣츄를 다스렸던 무장.
삿사 나리무네의 3남으로 태어났지만 형들이 죄다 전쟁터에서 요절하는 바람에 가독을 이을 수 있었다. 나리마사는 노부나가의 우마마와리(호위를 맡은 기마무사)로 활약하기 시작해 후일 아네가와 전투, 나가시노 전투 등에 참전하였고 철포대를 이끌며 오다의 승리에 일조하였다. 오다가 에치젠에 진출한 뒤부터는 마에다 토시이에, 후와 미츠하루와 함께 후츄의 삼인방으로 등극했다. 물론 그쪽 지역의 영지도 받았다. 이들 후츄삼인중은 시바타 카츠이에 아래서 카가에의 공격을 함께하기도 했다.
엣츄가 오다의 손에 떨어지고 나리마사는 엣츄의 지배권을 얻게 됐다. 뿐만 아니라 나리마사가 속한 후쿠리쿠 방면의 군단은 우에스기의 거성인 우오즈성에까지 진격해있었는데, 당대 최강이라 불린 오다군은 이미 우에스기를 압도하고(도 남았음) 있던 중이었다. 최소한 우에스기 겐신이라도 살아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 후계자인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우오즈성을 지켜낼 방법이 없었다. 노부나가에게 목젖을 붙잡히고 컥컥대던 우에스기는 이렇게 끝나나 싶었을테지만, 하늘이 우에스기를 마냥 내다버리려고 했던건 아니었다. 바로 혼노지의 변이 터졌던 것이다.
오다군은 열심히 우오즈성을 낙성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흩어져버렸다. 무장들이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버렸으니 그 텅 비어버린 성을 우에스기가 그냥 놔뒀을리는 없었다. 게다가 우에스기는 나리마사가 시바타 카츠이에를 지원하지 못하게 발목까지 붙잡았다. 카츠이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권력을 두고 다툴 때 나리마사는 숙부에게 얼마 안 되는 병력을 곁들여 카츠이에한테 보냈었는데, 이는 근처에 적을 두고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전투는 히데요시가 승리했다. 결국 나리마사는 머리를 빡빡 깎고 히데요시한테 기어간 다음 항복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가 발발하자 나리마사가 편을 들고 나선 쪽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쪽이었다. 히데요시 편을 드는 토시이에와 스에모리성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카게카츠와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고 여하튼 많이 고생했다. 아니 시발 근데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화친을 맺어버렸음; 나리마사는 당황하여 황급히 이에야스에게 달려갔지만 제 2차 전투를 일으키는데는 실패했다. 설득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히데요시는 기쁜 마음으로 나리마사를 잡아 죽이러 출동했다. 1583년, 히데요시의 10만 군세는 엣츄로 진입했다. 나리마사 입장에서 보면 히데요시를 이길 엄두가 나지 않았던건 물론이었고 걍 뱃가죽을 찢기지나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었다. 나리마사한테 항복 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항복한 이후에는 갖고 있던 영토의 대부분을 뺏겨버렸다.
1587년 쯤에는 규슈 정벌에 공을 세우며 히고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히고 국에서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막지 못했으며 히데요시는 반란이 일어난 정황에 책임을 물어 할복을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