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주(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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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친일파 또는 친일파 의혹을 받는 새끼들을 다루는 문서이무니다. 이 새끼는 옛날 또는 현재진행형으로 일제를 찬양하는 놈이무니다. 헬조선이 강림한 원인이기도 하며, 아직까지도 금수저의 대부분을 대대손손 차지하고 이쓰무니다. 다행히 이들도 죽창과 발터에는 한방이무니다. 죽창...죽창을 가져와라데스... |
파일:Latest?cb=20120929182437.jpeg | 이 대상은 천수를 누린 쓰레기들입니다!! 이새끼들은 죽을죄를 저질러 놓고 풍요롭게 살다간 인간말종들입니다. 이런 새끼들은 하루 빨리 부관참시를 시전합시다. |
소개[편집]
1905년 7월 29일 ~ 1985년 1월 27일
태어난 곳은 함양군이고 자란 곳은 영일군이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가네다 류슈(金田龍周).
일생[편집]
[https://www.youtube.com/watch?v=
킹께서 직접 유튭에 업로드 한 그의 일생을 다루는 영상이다. 문제로 지적되는 1936~1945년을 쏙 빼놓은 게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
근데 적어도 이 영상에서 거짓말은 하지 않고 있는데 한때는 야학에서 교사로 뛰는 등 민족 계몽 운동에 힘쓰고 신간회 영일(포항) 지부 정치부 간사로 지내는 등 훌륭하신 민족 운동가였다. 20년대의 그의 행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래 봬도 치안유지법으로 감옥까지 갔다 온 사람이다. 사회주의 활동을 안 해도 감옥에 쳐집어넣는 치안유지법의 상태를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
친일 행적[편집]
1930년대 중후반부터는 포항읍회 의원, 경북 도의원을 지내는 등 친일파로 흑화했다. 8.15 광복까지 의원직을 계속 유지했다.
도의원을 지내는 것만으로는 뭐라고 하기에는 거시기 하겠지만 의원직을 지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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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체명징관[1] 내에는 내선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증명하는 자료를 진열하여 내선일체의 정신적 심도를 올려야 합니다. |
” |
— 1940년 2월 23일, 12회 경북도회 회의 중(출처: 동아일보 1940년 2월 27일자 석간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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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내선일체의 이상에 향하고 있으므로 옛날과 같이 불온 사상을 가진 자는 한 명도 있지 않으므로 반도 교육에 일대 전환할 시기인 줄로 생각한다. |
” |
— 1940년 2월 24일, 같은 회의 중(출처: 매일신보 1940년 2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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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발언을 하면서 친일파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차라리 말만 이렇게 하고 실질적, 자발적인 친일 활동이 없었다면 쉴드는 쳐줄 수 있겠으나...
이 사람은 1941년에 국민총력 경상북도수산연맹에서 이사로 선임되어서는 이 단체의 조직원들을 직접 뽑았다. 그리고 대구국체명징관에 1천 원을, 대구신사에 2천 원을 헌납하기도 했다.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임전보국단의 경북 지부에 상임이사와 사업부장을 임명했다. 경북 지부에서 한 일? 미국과 영국을 격퇴할 군용기 5대를 헌납했다.
해방 이후[편집]
민주당(1955년)에서 원내총무 지냈다. 더불어민주당의 뿌리라고 하는 그...
각주
- ↑ '황도정신(皇道精神)의 보급'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인들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를 촉진한다는 목적으로 세운 건물이다. '국체명징 = 내선일체'로 이해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