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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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정상,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올라갈 곳이 보이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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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979
1977년 9월 15일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등반에 성공한 사람.
국가로는 8번째, 개인으로는 56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비하인드 스토리[편집]
원래 고상돈은 에베레스트 1차 정상 공격조가 아니었다.
등반팀의 대장인 김영도는 정상 등반 마지막 캠프인 5차 캠프에서 정상에 도전할 최종후보들을 추려놓았다.
운동선수 출신으로 8000m 고지에서도 산소통없이 활보하던 박상열을 1차로, 돌을 아령삼아 운동하고 남들보다 많이 먹어 체력이 뛰어난 고상돈은 2차였다.
고조의 컨디션을 보여주던 박상열이었지만 간밤에 산소를 충분히 공급받지않은 박상열은 결국 정상을 100m 남겨두고 돌아오게된다.
아깝게 왜 100m만 남기도 돌아오느냐 하겠지만 저때 박상열은 죽지않고 돌아온게 기적인 수준이었다.
1차 공격에서 쓰디쓴 참패를 맛본 김영도 대장은 작전을 바꾸어 고상돈 단독에 경험많은 셰르파인 펨바 노르부를 메이트로 붙혀준다.
오전 5시, 정상에서의 사진 효과를 고려해 빨간 옷을 입은 고상돈이 20kg의 짐을 메고 캠프를 나섰다.
4시간 만에 남봉에 도착한 고상돈은 산소통을 갈아끼웠다. 앞에는 50m 길이의 칼날 능선이 버티고 있었다.
좌우는 끝이 안 보이는 벼랑이고 능선은 너무 뾰족해 도저히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앞장섰던 펨바가 ‘되돌아가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고상돈은 앞으로 나서 오른팔로 커니스(눈처마)를 껴안듯이 하고 스텝을 만들며 한 발 한 발 전진했다.
천신만고 끝에 칼날 능선을 통과하자 직벽에 가까운 9m 빙벽 ‘힐러리 침니’가 앞을 가로막았다. 2시간 30분 사투 끝에 힐러리 침니를 올라섰다.
작은 언덕 세 개를 넘으니 또 하나의 봉우리가 보였다.
정신력에 의존해 간신히 봉우리에 오른 고상돈은 다시 올라갈 정상을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뒤따라오던 펨바가 “미스터고 우리 정상에 온것같아요!”라 소리쳤다.
반신반의하고 있는 고상돈의 발에 뭔가가 걸렸다. 눈을 헤쳐 보니 카메라 삼각대였다.
순간 김영도 대장의 말이 떠올랐다.
“정상에는 1975년 중국 원정대가 세워 놓은 삼각대가 있을거다. 그게 정상이라는 명백한 증거다.”
1977년 9월 15일 낮 12시 50분이었다. 동시에 그 유명한 무전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했다.
고상돈은 에베레스트 등반을 목표로 설악산에서 훈련하다 숨진 최수남·송준송·전재운 대원의 사진을 에베레스트 정상에 묻었다.
사실상 기적과 다름없는 등반이었던 셈이다.
여담[편집]
고상돈이 등반성공한 후 거의 십몇년 동안 에베레스트 등반을 한 한국인이 없었다.
사실 1970년대 등반도 정부에서 홍보 및 사기진작 목적으로 강하게 푸시해줬기에 가능했던것이었다.
이후 성대한 환영 속에 각종 행사에 참여하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에베레스트 등정 기념우표와 주택복권이 발행됐고, 기념담배도 출시됐었다.
김포공항으로 개선한 원정대는 신촌∼서소문∼창경궁으로 이어진 카 퍼레이드를 펼쳤다.
그 장면을 보며 ‘나도 산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 소년이 있었으니 훗날 한국인 최초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고(故) 박영석(1963∼2011)이다.
하지만 1979년, 매킨리산 등반 후 하산 중에 목숨을 잃고만다.
만약 이 안타까운 사건이 없었다면 향후 대한민국 산악계의 대부가 됐을텐데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