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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소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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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삼대 영구 미제 사건
화성 연쇄살인 사건 개구리 소년 사건 이형호 유괴 살해 사건

소개[편집]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영구미제사건

급식충들은 잘 모를수도 있는데 한 때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사건. 그 규모는 가히 천안함 피격 사건세월호 사건과 맞먹는다.

아니 천안함과 세월호를 뛰어넘는다. 영구 미제사건이기 때문에....

심지어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어서 대중매체가 뉴스나 신문 라디오밖에 없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대형 사건이었다.

개요[편집]

1991년 3월 26일 대구광역시 달서구에서 지방선거날 임시공휴일을 맞이하여 국딩[1] 5명이 뒷산이던 와룡산에 도롱뇽 알을 줍겠다면서 집을 나선다. 당시 와룡산은 높이가 300미터밖에 안되는 좆만한 산이었고 아이들이 시골 촌동네 애들이 되서 거기에 놀러가기를 예사로 알아서 어른들도 그냥 알겠다고 하며 애들만 보낸다. 그 시각이 오후 2시경 해가 쨍쨍한 한낮이었기에 어른들도 큰 걱정은 안했다.

하지만 밤이되고 날이 샜는데도 아이들은 돌아올 생각을 안하고 부모들은 경찰에 실종신고를 한다.

하지만 여기서 헬조선 경찰들은 첫번째 졸속행정을 한다. 아이들을 단순 가출로 생각하고 수사를 했던 것이다. 당시 부유한 가정에 화목하고 가출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상황임에도 가출이라고 섣불리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졸속행정 때문에 수사가 늦어졌고 매스컴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군인과 경찰들에게 특별수사를 명령하여 30만명의 군경들이 와룡산 인근을 쥐잡듯이 뒤지게 된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아이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대대적인 홍보[편집]

하루가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 아이들을 찾을 수 없자 국가적으로 대대적인 아이찾기 운동을 벌인다. 세제나 담배갑에도 아이들 사진을 붙이고 애드벌룬에도 아이들 얼굴사진을 붙이고 포상금을 걸고 심지어 노래까지 지어서 대중가요로 불러도 아이들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찾을수가 없었다.

또 당시 유명 TV 프로그램이었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이 사건을 집중취재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을정도였다.

당시 초등학생들도 친구를 찾아달라면서 거리에 플랭카드를 들고 다녔고 국가적으로 한바탕 난리를 쳤었다.

헬조선다운 사건경과[편집]

사건이 점점 유명세를 타고 규모가 커지자 관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개구리 소년을 납치했으니 돈을 가지고 오라고 어그로를 끌던 병신도 있었고 자신이 개구리소년이라고 경찰에 전화를 한 무개념 급식충들도 있었다. 이들은 경찰의 수사를 방해하기만 했다. 요즘같았으면 추척이 되지만 이시절떄 국내는 cctv도 주요기관쪽빼곤 없었고 cctv는 00년대부터 늘어나기 시작 했고 옛나 지금이나 2g폰 공중전화나 이런걸로 장난전화하면 추척하는것도 힘들다 테러단체들도 공중전화 2g폰을 아직도 사용하는게 이거때문이라는 말이있고 여튼 카이스트 소속이던 범죄 심리학자 김가원 씨는 범죄 심리학적으로 개구리소년의 아버지가 아들을 토막살해해서 암매장했다고 주장하며 아버지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경찰이 대대적으로 집을 수사해봤지만 아무 흔적도 나오지 않아서 유족들의 가슴에 못만 박았다. 이 사건으로 김가원은 카이스트에서 쫒겨났고 심리학계에서도 영구제명됐다. 이 양반은 끝까지 아버지가 범인이라고 주장하다가 유골이 나오고 나서야 방송에 나와서 공개사과했다.

여담으로 그알 유튜브에서 미국 범죄 전문 교수들이 분석한거 보면 인맥빨위주인 국내랑 비교될 정도이다.

몇몇 병신들은 UFO 납치설, 남파간첩 납치설, 인체실험 등등 허무맹랑한 뇌피셜을 쏟아내는 등 관종짓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병신같은 상황은 유가족들에게 딥빡을 주었고 실제로 화가나서 술에 쩔어 살다가 간암으로 죽은 부모들도 있었다.

실제 이때 경찰관들 하고 유가족들 집에서 전화 기달리면서 그알 비스한 프로그램에서도 장난전화 오는거 녹음하는것도 나왔다... 유가족분들이 장난전화 하지말라고 좋게 말하는것도 나왔고 이때 장난전화 하던 급식새끼들은 지금 출근충 애새끼

있는 나이정도 된다.

ㄴ그 간암으로 죽은 부모가 살인범으로 의심받던 아버지임. 그 분은 유도를 하셨을 정도로 건장한 분이었는데 아들을 잃고 관종 새끼의 의심을 받아 삶이 완전히 망가졌다. 무엇보다 이 분은 끝내 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한채 유명을 달리하셨다.

근대 실제 외국에서도 은근 이런 억울한 누명으로 가족들이 의심 받아서 자살하는 경우도 예나 지금이나 많다 요즘은 sns발달로 이런게 더 심하고

유골의 발견[편집]

그로부터 11년 후인 2002년 9월 26일,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질 무렵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와룡산에 도토리를 주우러 갔던 한 행인에 의해 아이들의 시신이 발견된다. 발견자는 시신을 발견한 즉시 개구리 소년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시신의 발견 장소는 다름아닌 군경들이 샅샅히 뒤졌다던 그 와룡산 중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지라 군경이 조사했던 당시에 시신이 거기에 있었는데 발견을 못했던것인지 아니면 이후 시신이 따로 옮겨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때 경찰은 또다시 실책을 범한다. 아이들이 조난당해서 저체온증으로 죽었다고 성급히 단정한 것이다. 경찰의 주장으로는 아이들이 실종된 당일 비가 왔고 산에서는 평지보다 체온이 더 급속도로 내려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말도안되는 주장이었다. 당시 와룡산은 아이들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는데 밥먹듯이 드나들던 아이들이 길을 잃을리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바로 옆에 경부선도 지나가고 엎어지면 코 닿을곳에 마을이 있는데 조난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故 우철원과 故 조호연은 국민학교 5~6학년이라 더욱 말이 안되는 거고!

실제로 "그것이 알고싶다" 취재팀이 당시 개구리 소년들 또래의 아이들로 과연 그 장소에서 길을 잃어버릴수 있는지 실험을 해봤는데 늦은밤에도 아이들은 모두 불빛을 따라 마을로 잘 돌아왔다.[2] 따라서 경찰의 주장은 완벽한 뇌피셜이다.

또 두개골에 손상 흔적이 발견되자 짭새 새끼들은 인근의 군부대 사격장에서 오발이 일어나서 군부대에서 사건을 은폐하려고 암매장을 했다는 뇌피셜을 뇌까렸다. 당연히 애 5명 전부가 사격 오발로 죽는건 말이 안될 뿐더러 관할 사단에서 그날은 쉬는 날로 사격 훈련이 일정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군이 사람 죽으면 사건 은폐하기로 악명 높다지만 이건 너무 말도 안돠는 뇌피셜을 싸지른거다. 씨발 무슨 M60 탄도 아니고 무슨 소총 오발탄이 애 5명을 다 죽여. 한 두발 오발나면 당장 사격 중지부터 시킨다.

경찰은 이 외에도 또다른 실수를 했다. 사건을 조사한답시고 성급하게 시신주변을 훼손한것이다. 여기서 당시 졸속행정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추정[편집]

그렇다면 아이들은 대체 왜, 무엇에 의해서 죽게 되었고 여기에서 발견된 것일까?

우선 발견 당시의 시신을 살펴보면 한 아이는 팔이 뒤로 묶여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 경찰은 이를 "아이들이 저체온증에 떨면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면서 이상행동을 할 수 있다"면서 개병신같은 주장만 늘어놓았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는 명백한 타살의 증거이다.

시신의 부검결과 더욱 완벽한 타살증거가 나왔다. 아이들의 두개골이 둔부에 찔려 깨진 흔적이 있었던 것이다. 즉, 누군가에게 머리를 둔기로 찍혀 사망하고 이곳에 묶인채 암매장 당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묶인 매듭은 일반인들은 모르는 전문적인 매듭이라서 절대로 아이들이 묶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그 쪽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이 된다.

또, 아이들이 한곳에 한꺼번에 같이 있었다는 점에서 범인은 한명이 아닌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이들이 5명이나 되는데 성인 어른이더라도 한꺼번에 5명을 잡아죽인다는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시골아이들이라서 도망도 잘친다.

실질적으로 아이들을 죽인 놈은 1명이고 조력자가 둘 내지는 셋 이상 있었을거라 보고 있다.

ㄴ반드시 그렇다고는 할수 없는게 범인이 먹을거에 수면제를 타서 줬다면 혼자서도 가능하다.

ㄴ아니면 당시 어린아이들이니 겁을 준 다음에 순순히 말을 들으면 살려준다고 하고 협박한 다음에 범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어떻게 되는지는 솔직히 모르는 상황임. 범인새끼 천벌이나 받았으면.

사건은 미궁속으로[편집]

경찰의 졸속행정과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 더이상 수사가 불가능해지자 경찰은 영구미제사건으로 결론내렸고 2006년 공소시효마저 끝이나서 수사는 그렇게 끝났다.

전문가의 의견[편집]

이 문서에서 다루는 대상이 너무나도 무섭습니다.
성님, 무서워서 아주 지려버리겄소?

에릭 힉키 박사는 "범인은 생각보다 시체가 늦게 발견되어서 놀랐을 것"이라고 하며,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걸 알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는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아이들의 옷처리나 묶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살해 경험이 이 사건 이전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미리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매장을 얕게 했던 것도,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함에 불과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사이코패스가 저지른 사건이며, 범인의 수는 1명이고, 다시 살인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매우 위험한 인물로, 아마 체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주장했다.


씨발 너무 무섭다 ㄷㄷ

진실[편집]

국민의 정부때 시신 발견되고 공소시효 연장 안하고 마무리 지었다.

당연히 정부차원에서 진입해야하는 영구 미제사건인데도 위에 써져있는 경찰의 헛손질을 단순히 방관..

당시 여야당, 정부 모두 책임이 있다.

세월호 봐라<<<


각주

  1. 당시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으므로 초딩이 아니라 국딩이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지금 40대 초반이다
  2. 더구나 그 아이들은 대구에 단 한번도 살아보지도 않은 외지의 아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