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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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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orted>하르카스님의 2023년 7월 30일 (일) 15:05 판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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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겨울 공화국이 끝나고 학원가에 찾아온 민주화 열풍을 가리키는 단어. 80년대 학생 운동의 노선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이때 미국이 한국 정부를 비판하면서 민주화 운동 진영의 손을 들어주었더라면 민주투사들이 반미 빨갱이 집단으로 변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설명[편집]

박정희가 총탄에 맞고 사망한 1979년 10월 26일부터 (혹은 최규하가 긴급조치를 해제한 12월 8일부터) 5.17 내란으로 민주화 시위 세력이 사실상 잠수 타버린 1980년 5월 17일까지, 그동안 있었던 대한민국 전국 각지의 민주화 열풍을 의미한다. 혹자는 광주 민주화 운동까지 포함해서 5월 27일까지로 보기도 하는데, 둘을 독립적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에서는 여전히 17일로 본다.

'~~의 봄'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때는 그 나라의 수도 명칭을 갖다 붙이기 때문에 꼭 서울에서만 일어난 민주화 시위를 가리키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통틀어 가리키게 된다. 쏘오련 빨갱이 새끼들 꺼지라던 프라하의 봄(1968)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전역에서 있었던 사회 운동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는데, 유신 정국 기간 동안 국회의원 등 정치적 활동이 주 업무인 사람을 제외하고는 일반인이 정치 활동을 한다거나 정치 관련 얘기를 하는 게 법적으로 원천 금지였고, 단체 결성, 집단 활동 같은 거 하려면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대학교에서 동아리, 학생회는 공식적으로 존재하면 안 됐으며 70년대에 학생회, 동아리 같은 거 했다면 불순분자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10.26 사태박정희가 사망하자 유신 헌법의 알맹이가 사라지면서 정치적 활동 제한이 풀렸고 전국적으로 학생회, 동아리가 우후죽순 결성되었으며 자연스레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계엄령 상황이었음에도.

그런 상황에 터진 사건이 바로 12.12 군사반란이다. 자세한 내용을 보고 싶으면 12.12 군사반란을 봐라. 10.26 사건이 김재규 단독 범행이라고 결론 내린 걸 번복하고, 대통령한테 재가 받지도 않은 상황에서 자기 상관인 정승화(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를 공범이라고 엮으면서 끌어내린 사건이다. 이건 그냥 군대 내부의 일인데 언급하는 이유는, 얘네들이 이후 기어이 정권까지 꿀꺽하기 때문이다. 그때 대통령은 최규하였는데요? ㅇㅈㄹ하는 놈들은 병먹금해주면 된다. 을사조약 체결된 건 고종 때 일인데요? 정미7조약 체결된 건 순종 때 일인데요? 이 지랄 하는 놈들과 다를 바가 없다.

5월 15일 서울역에서 서울대생들이 시위를 크게 벌였지만 '시위하면 ㅈ된다', '이번에 시위했다가는 정말 뒤질지 모른다.' 등 무서운 소문이 학생 운동 진영에 암암리에 퍼졌고 결국 시위 주동자 중 한 명이었던 심재철은 5월 17일에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다. 당시 심재철의 생각이 '서울에서만 이러지 말고 전국적으로 한 번에 들고 일어나야 된다. 그러니까 내일 다시 하자!'라는 계산이었다고.

그날 자정, 신군부는 전국적으로 시위가 더 크게 터져서 사회적으로 더 혼란스러워지는 것에 대비하고, 제2의 부마사태를 방지한다(쑻)는 차원에서 비상 계엄령 선포 지역에 제주도까지 집어넣어서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를 내리게 된다.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산되면 그 순간부터는 전시 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군인에게 개기면 즉결처분이라도 당할 수 있는 그 전시 말이다. 마치 6.25 때처럼.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