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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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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Marcus Junius Brutus
국적 로마
표방이념 귀족주의, 공화주의

배신의 아이콘. 대국적이지 못한 정치를 펼친 카이사르를 야수의 심정으로 찔렀다. 로마의 김재규

그러나 마키아벨리 말하길 반역은 평범한 권력 창출보다 수십배의 노력과 운빨이 따라줘야 하는 거라서 권력을 잡지 못하고 좆망했다.

"로마 시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개요[편집]

고대 로마시대의 금수저로 카이사르가 제일 좋아했던 애인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카이사르가 꽤 아꼈었으나 공화정을 위한답시고 다른 금수저들과 연합해서 카이사르를 살해했다.

하지만 당시 로마의 공화정은 그런 금수저들 때문에 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결국 마케도니아로 도망쳤다가 제 2차 삼두정치 세력에게 깨지고 뒈졌다.

고대 로마는 정복을 통해 팽창했기 때문에 많은 병사들을 필요했었고, 그 병사들의 대다수는 자신의 땅을 갈고 먹고살던 자영농들이었다.

그런데 정복하겠답시고 남자들을 끌고 나가자 농사가 제대로 될 리 없으니 저절로 파산하게 되고, 그렇게 파산한 자영농들의 땅을 원로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금수저들이 헐값에 거둬들인다.

그래서 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그라쿠스 형제같은 개혁가들이 등장했으나, 원로원은 헌법에도 없는 규정으로 개혁가들을 제거해갔다.

이렇게 되자 퇴역한 이후의 삶에 보장을 받지 못하게 된 군인들은 개되지같은 원로원 금수저들보다는 전선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장군들을 더 따르게 되면서 로마의 군벌이 탄생했다.

그렇게 성장하게 된 군벌들이 끼리끼리 싸우다가 결국 카이사르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종신 독재관이 되었고, 그를 향한 로마인들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사르만 죽이면 모든게 잘 돌아갈거라 착각한 금수저출신 브루투스와 암살범들은 구체적인 계획이 없이 카이사르만 죽였다.

범행을 저지른 후 로마인들에게 자신이 정당하다고 얘기했지만 로마인들이 그때까지 자신들을 착취해왔던 개돼지 금수저들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고, 분노한 로마인들에게 맞아 뒈지기 전에 마케도니아로 도망쳤다.

나름 자신이 세운 원칙에는 충실했던 청년이긴 했지만 고리대로 속주 주민들을 등쳐먹었다는 점을 볼 때 속주민들은 같은 로마인으로 취급하지 않은 당대의 전형적인 로마 보수청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연이율이 무려 48%였는데 브루투스를 높게 평가한키케로도 이 사실을 알고는 어이없어 했을 정도였다.


결국 브루투스를 비롯한 암살자들을 도축하고 최후의 승자가 된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공화정은 끝나고 제정 로마가 시작되었다.


이를 요약하자면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 - 이경규

이 말이 딱 들어맞는 인간이었다.

1. 카이사르가 왜그리 인기를 끌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찰을 조금도 안했고

2.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카이사르만 죽였으며

3. 스스로 지키겠다던 공화정은 지가 한 짓으로 인해 망했다. 적어도 카이사르는 단 한번도 스스로를 왕이나 황제로 칭하려 한적이 없었다. (속사정이야 어쨌던, 안토니우스가 바친 왕관도 공식적으로 거절하고 이를 포고했을 정도엿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