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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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인조반정 시기에 있었던 조선 중기시대의 문신.
송담 백수회 선생이라고 칭한다.
일생[편집]
그의 69년에 걸친 생애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국내 정세의 불안으로 평탄하지 못하였다.
- 1세 ~ 1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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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군 상동면 사배아리에서 출생하여 12세에 부모를 잃었고, 14세에 현감 석지의 딸 칠원배씨를 아내로 맞아 경남 양산 물금 가촌의 산방에서 학문에 힘썼다.
어렸을 때부터 의지와 기상이 출중했다고 전해진다.
- 19세 ~ 27세
이 틀을 보고도 계속 남아있다가 송담 백수회 선생에게 살해당해도 조무위키에서는 일절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이 존나 불쌍합니다...ㅠㅠ 광광 우럭따 8ㅅ8 |
아아! 이 내 몸이 일일도 삼추로다. 해동 이역을 이 어디라 할 것인가? 천심이 블조하니, 만리 표림이라. 눈물을 씻고서 좌우를 돌아보니, 어음이 부동하고, 풍속이 상위로다. 청의를 메었고, 성전에 절하며, 이제의 채미와 소무의 한절과 천상의 위국단심을 잊지 않은 이내 마음 조조 모모에 서산을 창망하니, 일촌 간장이 끊는 듯 잇는 듯 건곤을 부앙하고, 고사를 사량하니, 부모의 은덕과 형제의 우애를 못다 갚은 잔구로다. 침상에 꿈꾸어 고국에 돌아 오니, 궁실이 여전하고, 송국이 황무로다. 부모께 절하며, 이제를 덥썩 잡고, 중년 불견하며, 양생 상비 이르며 물으면서 체루를 상휘하고, 적적 전정을 못내 베푼 사이에 이요 난이하니, 원접 경회하도다. - 재일본장가(在日本長歌)에서 -
임진왜란이 발발한 19세 때 왜적에 잡혀 일본으로 끌려가 9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다.
왜적의 끊임없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조선에 대한 충의를 지킨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
당시 왼팔에 문신한 영위이씨귀 불작견양신이라는 글의 뜻은 아래와 같다.
“ |
차라리 이씨조선의 귀신이 될지언정, 개나 양과 같은 짐승 오랑캐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
” |
— 송담 백수회 선생
|
이순신만큼이나 조국에 대한 충의가 뚜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러나, 문신을 새긴게 아닌, 같이 잡혀 온 조선인들에게 이 글을 지어주어 저항의 의지를 전파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였는지라..
타국에서의 고독한 마음을 시편이나 가사로 글을 지었으며, 이는 현재 한시11수, 서적 1권, 편지 1통, 국문시가 4편이 전해져 오고 있다.
국문시가 4편은 도대마도가(到對馬島歌)‚ 재일본장가(在日本長歌)‚ 단가(短歌)‚ 화경도인안인수가(和京都人安仁壽歌)로써‚
모두 일본에 압류되어 있을 당시 고국에 대한 우국충정의 내용을 담고 있는 단편의 가사(歌辭)들이다.
송담선생유사집(松潭先生遺事集)은 송담 백수회 선생이 죽은 140년 후인 1782년에 송담 선생의 시문 및 그의 사적과 양산 송담서원에 관한 기록을 모아 펴낸 책인데
국어 문학 시간에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27세가 되던 해에 석방되어 조선으로 돌아오게된다.
- 27세 ~ 4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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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넘도록 외부와 단절한 채, 어떠한 교류도 하지 않고 살아감.
- 40세
40세가 되던 해 광해군의 폐모사건이 일어났는데
"천하에 어찌 모후(母后) 없는 나라가 있으리오. 윤기(倫紀)가 길을 잃었으니 어찌 인륜이 있다 하겠는가"
하며 전해진 광해군 폐모 통문(通文)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하며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찢어버렸다.
“ |
내 몸소 화를 당할지언정 사람의 이목을 더럽힐 뿐인 이런 흉역지서(凶逆之書)를 받을 수 없노라. |
” |
— 송담 백수회 선생
|
이 후, 난정(亂政)을 여러 번 상소하여 맹렬히 비판하고 정권의 불의에 의연히 맞서게된다.
- 41세 ~ 55세
이로 인하여 점차 명사들과 교류의 길이 트이고 잠시 벼슬길에 나아가기도 하였는데,
1623년 인조반정 후 이러한 행적이 인조에게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송담 백수회 선생에게 여러 차례 벼슬을 줄려고 했다.
이를 몇년 간 송담 백수회 선생은 번번이 사양했다가
마침내 사옹원참봉(司饔院參奉)에 임명되었는데 사퇴하였고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을 지낸 다음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지내 그 소임을 다 하였다고 한다.
- 55세 ~ 69세
그러나 1628년 인조에 상소를 올린 것이 각하되자 벼슬을 버렸으며
현재의 양산시 물금읍 가촌리 지역으로 귀향하여 후학에 힘을 썼고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