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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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崔益鉉)
이명 초명 기남(奇男), 자 찬겸(贊謙), 아호 면암(勉庵)
출생 1834년 1월 14일 경기도 포천현 내북면 가채
(現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사망 1907년 1월 1일 쓰시마 국 이즈하라에서 옥사(향년 72세)
국적 조선
본관 경주 최씨
학력 1855년 과거 급제
가족 아버지 최대(崔岱)
종교 성리학

읽기 전에[편집]

문서에 내용이 아무것도 없길래 새로씀. 간략하게 쓰려고 했고,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 있을수 있고 사견도 좀 들어갔다. 한번 읽어보고,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더 알고싶으면 제대로된 사전이나 역사책을 보길 바람.


대략적인 생애[편집]

조선말에 태어난 선비다. 독립운동가로 분류되며 상당히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7세경에 성리학의 기초를 배우고 14세 쯤에 대학자였던 이항로에게 가서 사사했다. 이때 배우는 능력이 꽤 특출나서 상당히 기대를 받았던듯 하다.

22-23세 정도에 과거에 급제했다. 처음에 과거시험을 치기로 한 이유는 봉급으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세월이 지난 후 대원군이 집권할때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구체적으로는 토목공사를 중지하고 당백전을 파하고 문세 거두는것을 그만두고 그외에 백성을 털어먹는 각종 행위를 그만두라는것이 요지였다. 이 상소는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도록 자극하는 요소가 되었다. 최익현은 상소중에 글귀 하나가 문제가 되어서 위리안치의 형을 받는데, 반대파들이 중벌을 먹이려던것을 고종이 방어해준 것이었다. 대원군을 실각시킨 주요인물이 되어 이름이 알려졌다.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을때 도끼를 들고가서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반대하는 이유는 요약해서 대충 다음과 같았다:

1. 우리가 강해서 상대가 부탁한게 아니라 약점을 보여서 맺게 된 조약이고, 우리가 방비없고 허약한것을 저들이 모두 알고있으므로 앞으로 어떤일이 벌어질지 알수 없다(이 조약이 조선이 일본에 먹히는 첫 발판이므로 꽤 정확하게 본 것이다)

2. 재물을 교역하게 되면, 상대의 물건은 사치품이고 생산되는데 한이 없고, 우리 물건은 필수품이고 한이 있는데 이것을 서로 바꾸면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힘들어질 것이다.

3. 일본인들은 서양인과 같으니 일단 조약을 맺으면 천주교의 책과 초상이 들어와 기독교인이 늘어나고 유교적 질서가 파괴된다.

4. 일본인들이 들어 와 살면 조약을 맺었으니 거절할 말이 없는데, 그들이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면 백성들이 호소해도 윗사람들은 강화가 깨질까봐 일을 함부로 처리할수가 없을것이다.(조약내에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과 관련된 말인듯 하다)

5. 일본인들은 조금만 마음에 들지않으면 사람을 죽이고, 재물과 여자밖에 모르므로 짐승이나 다름없는데, 짐승과 사람이 같이 있으면서 걱정거리가 없길 바라는것 자체가 이상하다.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을 어떻게 봤는지 참고가 되는 대목이다)


이미 실권했던 대원군은 최익현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다가 최익현이 올린 이 상소를 보고 마음이 풀렸다고 한다. 그런데 차라리 대원군이 집권중이었다면 이 조약은 성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조선땅에는 다시 전쟁이 났었을 것이다. 일본은 수차례 보낸 사신들이 퇴짜를 맞자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보이고 있었고 이미 별로 많지도 않은 병력으로 강화도 포대를 완전히 박살내버리고 돌아가기도 했었다. 개항을 하는것은 전세계적인 대세였고 조선은 사실 이미 좀 늦었었다. 게다가 이제와서 개항을 하는 상대가 하필이면 일본이었으므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하여튼 저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최익현은 또 유배를 간다. 최익현 말고도 반대하는 상소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최익현이 잡혀가는것을 보고 짐을싸서 돌아갔다고 한다. 일본을 상대로 개항한 조선은 최익현의 예상대로 쌀값이 폭등하고 국가재정이 파탄직전에 이르렀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의 고질적 문제인 권력자들의 사리사욕이 가장 큰 문제이긴 했다. 조선은 임오군란 때에도 밀리고 밀린 쌀 봉급을 뒤늦게 주면서 삥땅을 쳤는데 이때 민씨들의 창고는 재물이 넘쳐흘렀다.

이후 상당히 오랫동안 크게 정치에 관여하는일 없이 사는데 아마 썩어빠진 조정에 발을 담그기 싫었던것이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다. 유교에서는 나라에 도가 행해지면 벼슬하고 그렇지않으면 충고하고 충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떠나라고 가르친다.(물론 이 말을 지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1895년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내릴때 최익현을 잡아와서 상투를 자르려고 용을 썼는데, 최익현의 한 사람의 영향력이 상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국 최익현은 상투를 지켰는데 여기서 내 목은 잘라도 머리카락은 못 자른다는 말이 나왔다.

머리카락좀 자르는게 뭐 어렵냐고 호들갑이냐 할 수도 있지만 유학자들의 사고를 보면 이해가 좀 된다. 유학에서는 자기 한 몸을 바르게 처신한 다음 집안을 정돈하고 그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그 다음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순서로 하는데, 한 몸을 바르게 처신할때 기초가 되는것이 효도하는 것이고 효도에서 또 기초가 되는것은 부모에게 받은 몸과 털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머리카락을 썩둑 짤라버리라는 소리는 유학자들 입장에서 좀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최익현은 성격이 굉장히 강직하고 곧기는 했지만 철저한 수구파였기 때문에 조정에 상주하던 박영효나 유길준같은 개화파들을 싫어했다. 이때 이런 내용으로 상소를 상당히 올린다. 그리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할때 명나라가 오랑캐(청나라)에 망한지 오래돼서 황제 자리가 오래 비었으니 못할것도 없긴 하지만 명령이 금문을 나가지도 못하면서 명칭과 실제가 맞지 않는것 아니냐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1904년 고종은 무슨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최익현에게 밀지를 내려서 상경하게 한다. 최익현은 많이 늙어서 기력이 없는데다 이질이 심해서 여러차례 거절했으나 결국에는 서울로 가서 고종을 만나고 시책을 건의하고 차자를 올린다. 당시 대한제국은 백성은 부패 관리와 조선거주 일본인들에게 등쳐먹히고 있었고 정부는 비열한 인간들로만 꽉 찬 쓰레기통이었으며 고종은 큰돈을들여 궁궐을 짓고 벼슬자리를 팔아먹고 있었다.

최익현이 올린 차자의 조목들은 단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최익현은 애초에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온 이상 돌아갈수 없다고 궁 밖에 엎드려 상소를 4차례 올렸다. 상소들은 외국 차관 들여오는것을 결사반대하는 내용과 개혁을 촉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조선땅의 경찰권을 쥐고있던 일본군은 최익현을 끌고가서 구금하고 그 다음 조선 정부에 통고한다. 대신중 하나는 그래도 쪽팔린줄은 알았는지 최익현은 인망이 높아서 국민의 지지가 두텁고 황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인물인데 이같이 행동한것은 우리 국가를 무시한 것이며 양국의 우호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항의했으나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최익현은 일본군 헌병대에서 대장의 명함을 땅바닥에 팽개치면서 고함을 쳐 대고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불러오라고 악을 쓰다가 구금되고 포천 고향집으로 압송된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나라가 망한것으로 받아들여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상소를 올려서 애초에 일본에서 사람을 보낼때 의도를 몰랐을리가 없는데 대비를 하고 온 나라에 죽을 각오를 했다고 알리지 않은게 일단 문제고, 또 설령 총칼의 위협을 받았더라도 고종 본인이 위엄을 내면서 책상을 칼로 쪼개버리고 대신들은 조약서를 찢어발겨버렸으면 저놈들도 더 어떻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을사오적을 당장 죽이라고 하면서 그나마 괜찮은 사람이었던 한규설한테도 장관이라는 놈이 일의 시초도 생각못하고 부하도 관리하지 못했다고 욕을 한다.

그리고 아직 각국 공사들이 돌아가지 않았으니 모두 회합시켜 조약이 무효임을 통고하고 국제법대로 처리하라는 의견을 낸다.

이후 국민대궐기를 촉구한 포고팔도사민, 일본공사관에 일본이 한국의 신의를 배반한 조목을 하나하나 따져 보낸 기일본정부 등을 발표하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의병을 일으키며 동참할것을 권한 창의격문을 쓴다. 이때 최익현은 이미 현대의학을 구경도 안해본 채로 70살을 넘긴 초고령자였다.

이때 쓴 포고팔도사민에 이런 내용이 있는데

우리나라가 고려 이후로 명칭은 비록 중국의 번속이었지만, 토지와 인민과 정사는 모두 우리가 자립하고 자주하여 털끝만큼도 저들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성기에는 승병이 백여만이요, 재화가 창고에 가득하였으며, 백성은 부유하고, 호구는 번식하여 비록 수 양제와 당 태종의 위세로도 패하여 돌아감을 면치 못하였으며, 원 세조가 여덟 번이나 쳐들어온 다음에야 복속 시켰다. 우리 태조 때에 왜적이 여러번 침범하였지만 번번이 패하였고, 임진왜란에 비록 명 나라의 구원이 있었지만 회복하여 전승한 공은 모두 우리 군사가 왜선 70여 척을 노량에서 침몰시킨 데 있었으며...(중략)...우리나라가 비록 협소하지만 백성들의 성질이 강력함은 반드시 타국에 뒤지지 않는다.

이걸 보면 멸망한 명나라를 중화로 보고 조선을 소중화로 봤던 수구 유학자들도 민족의식이 있었음이 보인다.

최익현의 의병은 몇 고을을 점령하거나 일본 관공서를 철거하고 가담자도 계속 늘어서 위세가 꽤 있었다. 의병 부대 안에는 나중에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 되는 김병로도 있었다. 신학문을 배운 청소년 김병로를 감동시킨것을 보면 최익현의 연설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계속 진군하는 와중에 고종이 해산하라는 명을 내려(정말 고종의 뜻에서 나온것인지는 불분명) 최익현의 마음이 심란하던 차에 이미 통감부의 수중하에 들어간 대한제국군 진위대가 총포를 쏴대었다. 최익현은 동족끼리 죽이는것을 용납할수 없었으므로 같이 일본에 대항하고 더러운 이름을 남기지 말라는 뜻을 전했으나 진위대는 무시하고 오히려 소극적인 상대의 자세를 이용해 맹공격하였다. 이렇게 의병이 흩어지고 정시해 라는 문인이 최익현 바로 앞에서 탄을 맞고 죽는다.

최익현은 시체를 안고 통곡하다가 자기도 죽기 위해서 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진위대는 계속 공격하다가 저항이 없는것을 확인하고 주변을 지키고 있다가 좀 지나서 최익현과 최익현을 따라서 주저앉았던 사람들을 체포한다.

최익현의 의병은 그 자체로는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으나 인심을 고무시켜 의병활동이 활발해지게 만들었다는 의의가 있다.

이후에 대마도 감옥으로 보내진다. 흔히들 단식하다 죽은걸로 알지만 사실이 아니다. 처음에 감옥에 왔을때 경비대장이 여러분이 일본음식을 먹으니 일본 풍습을 따르라 하고, 일본 군인 하나가 갓과 탕건을 잡아서 벗기려고 하자 최익현이 사자후를 지르고, 칼을 빼들자 가슴팍을 헤치면서 찌르라고 고함친 사건이 있었는데, 이날 제자 임병찬에게 음식을 먹고 명령을 거부하는것도 옳지 않으니 먹지 않겠다고 하고, 마지막 상소를 구술해 준것이 와전되어 퍼진것이다.

이후 장교가 와서 통역이 실수한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과하고, 함께 온 제자들과 먼저 감옥에 와있던 홍주의병들이 계속 역사속 사례를 들고 울면서 권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대장이 다시와서 며칠전 말한것은 통역이 잘못말한것일 뿐이고 식비는 한국정부가 내고있다고 권하여서 비로소 식사를 한다.

대마도에 오고 몇달 후 병이 나는데 낫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이후 관이 바다를 건너오고 가는곳마다 상인, 농부, 과부, 기생, 유학자 등이 와서 곡하고 스님들이 길가에서 치전하여 인파가 수만명이 몰렸다.

사후 몇년후에 제자들이 최익현이 썼던 글들을 모아서 문집(면암집)을 내는데 이때 헌병들이 습격하여 조사하고 일제를 규탄한 부분을 샅샅이 찾아서 목판까지 뜯어갔다. 그런데 다행히 숨겨둔 몇십질이 남아서 내려왔다. 그리고 수십년 후 일제가 문화통치를 표방할때 총독부의 허가하에 다시 인쇄한다.

일제가 망해서 돌아간 뒤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다

형이상학적으로는 독자적인 학설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스승인 이항로의 학설을 계승했다고 한다.

시도 많이 썼다.

대지와 산하에 추운 겨울이 왔는데 / 大地山河屬歲寒

그대가 어려운 길 떠난 것에 놀랐네 / 驚君不計路行難

마지막 길에 좋고 나쁨을 말할 필요있나 / 窮途利病何須問

필경엔 너그러운 우주에 살 것인데 / 到底容身宇宙寬


여행을 좋아했고 경치도 많이 즐겼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최익현이 유독 고평가받는 이유는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가르침받은 자신의 확고한 정의대로 살아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중국의 지식인인 양계초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조선 양반이라는 것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미관말직이라도 관직하나를 잡아서 서민들의 등골을 빼먹고 자신의 욕심을 채울 생각만 가득한 놈들이며,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 관직을 자신의 배를 불릴 도구로 사용할 뿐 국가의 운명같은것은 안중에도 없는 자들이라고 혹평하고있는데, 그 와중에 썩지않은 부류들이 있었고 그 부류의 수장격인 사람이 최익현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이름이 남아오고 있는것이 아닌가 한다.

존나 꼰대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데 당장 위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안경 같이 생활 필수 서양물품은 어느 정도 썼다.

윤치호가 평가했다는 최익현[편집]

새로 발견한 자료라서 일단 올려둔다. 다카야마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상소내용이 문제가 되어 73세 2월에 일본군 헌병대에 끌려가게된 사건의 이후에 쓴것같다.


최익현(崔益鉉)선생 이야기요. 몇 달 전 황제가 자문을 구하려고 유명한 유학자인 최익현 선생을 서울로 불렀소. 그 위대한 노인은 황제에게 비열한 짓을 중지하고 사악한 방식을 개선하라고 충고했다오. 지금 황제는 그 불쾌한 고문을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소. 최익현 선생은 자신의 충고가 실행될 때까지 서울, 즉 황제폐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주장하면서 귀향하지 않으려고 하오. 황제는 최익현 선생을 경기도관찰사로 임명했지만 최익현 선생은 경기도관찰사로 가는 대신 통렬한 상소문을 올렸소. 황제의 지긋지긋한 무모한 장난을 드러내고, 조선의 모든 백성이 황제의 급속한 몰락에 대해 탄식하고 있으며, 만약 황제가 개혁을 추진하지 않는다면 이웃의 적국들이 조선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황제에게 상기시키는 상소를 올린 것이오.

최익현 선생이 올린 상소의 마지막 구절은 황제가 굳게 믿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간섭할 기회를 주었소. 최익현 선생이 무관심한 일본의 의도와 동기를 비난해 공공의 평화를 교란했다는 이유로 말이오! 일본 공사는 이달 10일 만약 조선 정부가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일본 군부가 자신들의 손으로 그 문제를 처리하겠다고 말하면서 그 노인의 처벌을 요구했소. 그것은 촉박한 통고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오. 물론 황제폐하는 그 요구에 전혀 주목하지 않았고, 일본 경찰은 이달 11일에 최익현 선생을 체포한 뒤 본부로 이송했다오.

그 위대한 노인은 “林權助(하야시)란 놈이나 長谷川(하세가와)이란 놈 보자”라고 요구했소. 50년 동안 정직하고 명예롭게 지냈던 경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최익현 선생의 대담함은 선생을 체포한 이들로부터 존경심을 끌어내었다오. 최익현 선생은 일본인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며 식사를 거부했소. 이달 13일에 일본인들은 어쩔 수 없이 최익현 선생을 호위해 고향 집으로 모시고 가야 했소. 스티븐스 씨가 말하기를, 최익현 선생이 굉장히 영웅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일본 헌병대의 다카야마(高山) 소장은 완전히 탄복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하오. “만약 조선에 최익현 선생 같은 분이 50명만 있다면, 조선의 독립은 명목상의 독립 이상의 것을 의미할 것이오.”

글쎄, 그렇다면 왜 그 소장이나 그의 상급자들은 자신들이 조선에서 유일하게 발견한 정직한 인물을 내버려두지 않았단 말이오? 중요한 고백을 하겠소. 나는 황제가 최익현 선생을 제거하라고 일본인들에게 요청했다고 믿고 있다오. (1905.3.21)


위에 윤치호가 언급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소문[편집]

참고로 이 상소는 이거 한편이 아니라 최익현이 연달아 올린 "궐외대명소"라는 상소의 4번째 편이다.


삼가 아룁니다. 해가 가고 봄이 되어 삼양(三陽)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효혜전(孝惠殿)의 연상(練祥)과 의효전(懿孝殿)의 졸곡(卒哭)을 어느덧 지냈으니, 삼가 생각건대, 성상의 마음은 얼마나 간절하시겠습니까.

생각건대, 신은 이달 1일에 회계원(會計院) 낭신(郞臣)이 내사(內賜)한 돈과 쌀을 전해 준 것을 받았으니, 땅에 엎드려 감격하며 진실로 겨를 없이 절하고 받아야 됩니다.다만 생각건대, 국내에 춥고 배고픈 자가 신 한 사람뿐이 아닙니다. 또 신은 여러 번 폐하의 큰 은혜를 입고도 아직 티끌만 한 보답도 못했으니, 어찌 다시 하찮은 살림살이로 폐하의 걱정이 되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미 사자를 시켜서 반납하였으니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아아, 신이 삼가 물러가라는 명령을 받은 지 지금 한 달이 가까워집니다. 신은 폐하께서 신을 박하게 대우하고 매우 싫어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이 아직 단연히 물러가지 못하고 서성거리며 주저하고 돌아다니는 것은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진실로 폐하의 마음이 만에 하나라도 돌이켜 깨달으심이 있어 천일(天日)의 밝음을 다시 보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삼가 근일에 내리신 은명(恩命)을 보건대, 신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삼는다고 하니 신은 이제야 더욱 폐하께서 국가의 흥망에는 관심이 없고 신을 조금도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처음에는 은근하게 신을 부르셨고 많은 것을 신에게 바라셨는데, 오늘에 행한 바를 살펴보면 전혀 폐하의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필경 간사한 소인들의 참언이 있어서 폐하께서 신을 불신하게 한 듯합니다. 신은 비록 보잘것없으나 어찌 차마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나이로 일개 관찰사를 하려고 왔겠습니까.

임금이 우레 같은 위엄과 만근 같은 권세를 갖고서, 신하가 죄가 있으면 벌을 내리거나 죽음을 내리거나 귀양을 보낼 수도 있으나, 이익으로 유도하여 떠나도록 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쩌면 이렇게 신을 이해하지 못하십니까? 신이 전후로 아뢴 말씀이 비록 질서는 없으나, 돌이켜 살피신다면 쓸 말이 하나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착한 사람을 등용하고 간악한 자를 물리치는 일에 대해서 말하면, 임금과 국가를 팔아먹은 역적이 여전히 폐하의 조정에 반거(盤據)해 있고,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탐학(貪虐)한 도적이 여전히 폐하의 좌우에 출입하고 있습니다. 아첨하고 간사한 도적이 여전히 폐하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는데 폐하께서는 한결같이 살피지 않고 도리어 믿고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로는 하느님의 돌보아 주는 마음을 잃었고 아래로는 만백성이 받드는 마음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선왕의 신령에게 제사가 끊어지는 슬픔이 있고 사방의 백성들에게 갈상(曷喪)의 탄식[1] 이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예로부터 인군이 소인에게 현혹되어 스스로 나라를 망하게 하고 필부(匹夫)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뒤에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었던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하물며 지금은 강적이 곁에 있으면서 키처럼 탐욕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으니, 어떤 변고가 일조에 일어날지 알 수 없으며, 차마 말할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는 흉악한 말이 신보(新報)라는 데 실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한 번 그 말을 듣고서 경악하여 곧바로 한칼로 자살하여 세상에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비록 곧바로 개정했다는 말은 들었으나, 선전서(宣戰書)를 반포한 뒤에 우리가 시행한 정치방략을 보니, 속이고 달래고 우롱함이 기필코 우리를 망치려 한 지 오래된 것입니다. 그 잘못이 원래부터 묘맥(苗脈)이 있어서 누설을 꺼리지 아니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민심은 날로 더욱 들떠서 서로 거짓말을 하며 아침저녁도 보전하지 못할 듯한데 홀로 폐하께서만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태산 반석같이 믿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 하늘이여.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이제는 국세가 기울었으니, 비록 후회를 해도 이미 고칠 수는 없다.’고 하나, 신은 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진실로 자발하여 폐하의 마음에서 크게 분발하여 마치 환도(環刀)를 가지고 책상을 자르며 일어나서, 먼저 나라를 팔고 정사를 어지럽힌 5, 6명의 역적을 잡아 시중에서 찢어 죽이소서. 또한 좌우에 벌여 있는 진귀한 물품을 가져다 모두 깨뜨려서 천하에 사심이 없음을 보이소서.

그렇게 한 뒤에 모든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각각 그 죄에 따라 처단하고 귀양을 보내소서. 국내에 노성하고 덕망 있는 자를 등용해서 정부의 수위에 두고, 다음은 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발탁하여 여러 지위에 반열시키고 책성(責成)을 전담하게 하소서. 그리고 법령이 국가를 병들게 하고 인민을 해롭게 하는 것은 일일이 폐기하고 주야로 계속해서 선정을 힘써 행하여 우레 같은 위세의 용기를 갖고서 답습하고 안주하는 폐단을 없게 하면 불과 한 달 내에 반 이상은 정돈이 되어 민심을 돌릴 수 있고 천명을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였는데 저 이웃의 적국이 그래도 나라를 합병할 술책을 행하며 악행을 펴려고 한다면, 우리는 진실로 세계 열국과 동맹 조약을 맺고 국제 공법을 통용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각국에 통첩해서 회합하여 담판하면 세계의 공론을 구하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스스로 하지 않고 여전히 무능한 태도만 취한다면, 저 이웃의 적국은 우리를 주머니 속의 물건처럼 여길 것이며, 각국에서도 당연하게 여겨 공분(公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세상에 제 환공(齊桓公)과 같이 위(衛) 나라ㆍ형(邢) 나라를 보존한 의로운 자를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2]

또한 예로부터 국가의 큰 화근은 남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비록 친형제라도 믿을 수 없고 오직 내 나라는 내가 주장하고 내 일은 내가 하되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최선을 다하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도와주며,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방 안에 있는 사람이라도 나를 배반할 것입니다.

세상에 어찌 최선을 다하고서 나라를 망친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아, 신은 폐하께서 신의 말을 크게 싫어하여 마침내 입을 봉하게 하고 속히 보내려 하는 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숨이 떨어지기 전에는 차마 임금을 잊지 못하겠기에 이목이 닿는 곳과 성정(性情)이 부딪치는 곳에 대해 차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불쌍하게 여기어 살펴 주소서.

관찰사의 직임은 다시 조정에서 선택하여 제수하면 될 것이니, 신은 여러 말을 아니하고 사퇴합니다.

신은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창의격문[편집]

아, 난적(亂賊)의 변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을까마는 그 누가 오늘날의 역적과 같았으며, 이적(夷狄)의 화가 어느 나라인들 없었을까마는 그 어느 것이 오늘날의 왜놈과 같겠는가. 바로 의병을 일으켜야 할 것이요, 많은 말이 필요없다.

우리 조선은 기자(箕子)의 옛 나라요, 요(堯) 임금이 봉한 동쪽의 변방 나라이다. 우리 태조(太祖) 이래로 성왕(聖王)이 서로 계승하여 공자의 도를 숭상하였고, 현신(賢臣)이 차례로 일어나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웠으며, 이륜(彛倫)이 두텁게 펴져서, 높은 이를 높이고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어 예의와 문물이 밝게 빛났다. 집집마다 인의(人義)와 효제(孝悌)를 행하여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지 않은 자가 없었고, 신(信)으로 갑옷과 투구를 삼고 의로 방패를 삼아 모두 윗사람을 친히 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을 뜻을 두었다. 민속은 태평하여 삼대(三代)의 융성할 때보다 못하지 않았고, 문물은 빛나서 오랫동안 소화(小華)라 일컫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한번 사교(邪敎)가 중국에 들어오게 되자 마침내 사해(四海)가 짐승의 냄새로 변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우리나라만은 동쪽 한구석에 처하여 한 조각 땅이나마 청정(淸淨)함을 보존하였으니, 박과불식(剝果不食)이라 하겠는데[3] 그 누가 곤(坤)의 얼음이 굳게 얼 줄을 헤아렸겠는가?[4] 오직 머리 위에 하나의 상투가 남아 있어 홀로 천하에 뭇 화살의 과녁이 되었다.

아, 저 도적 일본은 실로 우리에게 백세(百世)의 원수이다. 임진년의 흉사(凶肆)에 이릉(二陵)의 화[5] 는 차마 말할 수 있는가? 병자년의 수호조약(修好條約)[6] 은 다만 외이(外夷)가 우리를 엿보는 것을 인도했을 뿐이다. 맹약한 피가 아직 마르기도 전에 협박이 먼저 이르렀고, 우리의 궁궐을 버릇없이 드나들었다. 죄를 짓고 도망친 무리들을 보육(保育)하였으며[7] 우리나라의 인륜을 무너뜨리고, 예복(禮服)을 찢어 버렸다. 우리나라 국모(國母)를 시해하고, 천왕(天王)의 머리를 강제로 깎았다. 우리 대관(大官)들을 노예로 만들었고, 백성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었으며, 무덤과 집을 파헤쳤다. 토지를 빼앗아 민생의 자원에 관계되면 무엇이든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는데도 아직도 부족하게 생각하여 갈수록 더욱 탐욕을 부린다.

아, 지난 10월의 소행은 실로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 하룻밤 사이에 종잇 조각에 강제로 도장을 찍게 하여, 오백년 종사(宗社)가 마침내 망하고 말았으니, 이 때문에 천지의 신명도 놀랐을 것이고 조종(祖宗)의 신령도 통곡하였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통째로 원수에게 준 역적 이지용(李址鎔)은 실로 우리나라 만대의 원수요, 제 임금을 죽이고 남의 임금을 범한 이등박문(伊藤博文)이란 놈은 마땅히 천하 열국(列國)이 함께 토벌해야 한다.

세신(世臣)과 교목(喬木)에게는 바로 자방(子房)이 원수를 갚던 때[8] 이며 왕실의 지친(至親)들은 어찌 북지왕(北地王)의 배성(背城)하자는 의리[9] 를 생각하지 않는가. 수실(秀實)의 홀(笏)은 주자(朱泚)의 얼굴을 때려야 하고[10] 안고경(顔杲卿)의 배의(緋衣)는 어찌 녹산(祿山)이 준 것을 영화롭게 생각하였겠는가[11]. 변을 당한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는데도 토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임금이 망하는데 신하가 어찌 홀로 살아 있으며, 나라가 망하는데 백성이 어찌 홀로 보존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저 마루 위의 참새와 솥 안의 물고기처럼[12] 함께 죽게 되었는데 어찌 한번 결전(決戰)하지 않는가. 또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죽어서 충의(忠義)의 혼(魂)이 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익현(益鉉)은 나이가 많고 병이 깊으며 재주도 없고 힘도 부족하여 조그마한 충성도 바치지 못하였다. 비록 귀양 갔던 부끄러움이 있으나, 목숨이 아직 남아 있으니 복수할 뜻을 잊을 수가 없다. 비록 그러나 큰 집이 무너지는 데 나무 하나가 어떻게 지탱할 수 있으며, 맹진(孟津)의 물이 넘치는 데 한 줌 흙으로 막을 수는 없다. 시장(市場)에 들어가 오른팔을 벗으면 반드시 왕손(王孫)을 따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13]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쳐들어가면 누가 감히 책의(翟義)를 공격하겠는가[14].

모든 우리 종실ㆍ대신ㆍ공경ㆍ문무관ㆍ사ㆍ농ㆍ공ㆍ상ㆍ서리(胥吏)ㆍ여대(與儓 하인(下人))들은 우리의 창과 방패를 수선하고 심력(心力)을 통일하여 역적의 무리를 섬멸하여야 한다. 놈들의 고기를 먹고 놈들의 가죽을 깔고 자며, 저 원수 오랑캐를 무찔러 그 종자를 멸하고 그 소굴을 소탕하여 무엇이든 복구하여 국세(國勢)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위험을 안정으로 바꾸어 백성을 도탄에서 구원하여야 한다. 오직 믿는 것은 군사를 일으킨 명분이 정대하니[15] 적의 강함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으로 두루 고하노니 성공하도록 함께 힘쓰라.

평가[편집]

진정한 애국지사이자 참된 선비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다. 흔히 개항을 반대한 것 때문에 대중들에게는 유교 탈레반 꼰대 혹은 근대화를 방해한 트롤러 정도로 여겨지지만, 전술했듯이 그렇게 폄하될 분이 아니시다.

개항 반대를 위해 내건 5불가소에서 볼 수 있듯이 최익현은 단순히 이념 때문에 개화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고, 외세인 일본의 본질을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어보았다. 김옥균 등 개화파들이 일본을 모델로 근대화 하겠답시고 나서다가 역으로 일본을 도와주고 만 것과 비교된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정 하나로 외세인 일본은 물론 국왕인 고종이나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을 상대로도 거침없이 개기던 사람이다. 말로만 떠들어대던 씹선비들과 달리 행동으로 옮길 줄 알았다는 이야기다.

이걸 가지고 또 누군가는 양반이니까 자기 기득권 유지를 위해 투쟁했을 뿐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럴 거였으면 그냥 왕실이나 일본에 붙어서 부역하는 게 기득권 유지에 더 도움이 된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ㅉ.

흔히 대한제국이 일본에 너무 허무하게 먹혔다며 그럴 거면 송나라 애산전투마냥 차라리 과감하게 싸워보지 그랬냐고 푸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분은 진짜로 그랬던 사람이다. 그야말로 유교의 근본을 보여주신 분이다.

그냥 노빠꾸 상남자가 유교 쪽에 붙어서 저평가당하는 사례다. 빠꾸없이 행동력이 엄청난 인물이었지만 하필 수구쪽에 오래 붙어있어서 개화할 것과 보수해야 할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탓에 평가가 낮아진 편이다.

차라리 일본의 좋은 점은 본받되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를 신봉하지 않는 절충안에서 놀았다면 반박의 여지 없는 위인이 됐을지도?

각주

  1. 백성이 나라가 망하지 않음을 탄식한다는 말이다. 《서경(書經)》 탕서(湯誓)에 걸(桀)의 학정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왜 이해[日]는 망하지 않는가? 내가 너와 더불어 망하련다.” 하였다.
  2. 노 희공(魯僖公) 원년에 적인(狄人)이 형 나라를 쳐들어와 멸망하게 되자, 제(齊)ㆍ송(宋)ㆍ조(曹) 나라가 원군을 보내어 형을 구하고 이의(夷儀) 땅으로 옮겨 살게 하고 성(城)을 쌓아 주었고, 희공 2년에 역시 적인의 침입을 받은 위(衛)가 망하게 되자 제 환공 등 여러 제후가 초구(楚丘)에 성을 쌓고, 위 나라 백성을 살게 하였다. 《春秋左傳 閔公2年, 僖公1ㆍ2年》
  3. 전 세계가 오랑캐로 변하였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이 중국의 도를 지켜 선왕의 의관 문물(衣冠文物)을 보존하고 있다는 뜻. 《주역(周易)》 박괘(剝卦)는, 아래에 있는 다섯 효(爻)는 모두 음효(陰爻)이고 맨 위에 있는 한 효만이 양효(陽爻)이다. 《주역(周易)》에서는 양은 군자, 음은 소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아래의 다섯 효는 모두 소인이고 위에 있는 한 효만이 군자이다. 그리하여 상구(上九) 효사(爻辭)에 “큰 과일은 먹지 않는다.[碩果不食]” 하였다. 이것은 과일을 딸 적에 맨 위에 있는 큰 과일 하나를 따먹지 않는다는 뜻에서 온 것이다.
  4. 서리를 밟으면 점점 굳어져 얼음이 되듯 조그마한 악이 점점 확대함을 말한 것이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초육(初六) 효사(爻辭)에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된다.[履霜堅氷至]” 하였는데, 맨 아래에 있는 음효(陰爻)를 가리킨 것으로 아직은 밑에 있어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것이 점점 확대되면 결국 큰 죄악을 저지르는 변이 온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곤괘 문언(文言)에 “신하가 임금을 죽이며 아들이 아비를 죽이는 것은 하루아침 하루저녁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래가 점차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5.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의 묘인 선릉(宣陵) 및 중종(中宗)의 능인 정릉(靖陵)을 파헤친 사건을 말한다.
  6. 고종 13년(1876) 일본이 운양호(雲揚號) 사건을 핑계로 통상조약을 요구하며 8척의 군함을 출동시켜 부산에 입항하고 일본의 전권대신 흑전청륭(黑田淸隆)이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에서 12조의 통상수호조약을 맺은 일이다.
  7.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보호를 받은 김옥균(金玉均)ㆍ박영효(朴泳孝)ㆍ서재필(徐載弼)ㆍ서광범(徐光範) 등을 말한다.
  8. 교목은 오래되어 높다란 나무를 말하는 것으로 교목세신이란 여러 대를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휴척(休戚)을 나라와 함께하는 신하를 말한다. 자방(子房)은 한(漢)의 유후(留侯) 장량(張良)의 자이다. 그는 처음에는 한(韓) 나라 사람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한(韓) 나라에 5대를 걸쳐 정승을 지낸 세족이었다. 진(秦) 나라가 한을 멸하자, 장량은 나이가 젊어 벼슬하지 않았지만 한을 위하여 원수를 갚으려고 자객(刺客)을 시켜 동쪽으로 놀러온 진 시황(秦始皇)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저격(狙擊)하였으나 실수로 수행원의 수레를 쳤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9. 왕실의 종친들은 끝까지 싸울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 북지왕(北地王)은 촉한(蜀漢)의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아들인 유심(劉諶)을 말한다. 후주가 위(魏)에 패하여 항복하려 하자 유심은 노하면서 “만일 꾀가 없고 힘이 없어 화패(禍敗)가 반드시 미친다 하더라도 부자ㆍ군신(君臣)이 성을 등지고 끝까지 싸워서 사직(社稷)을 위하여 함께 죽어야 한다.” 하였다. 후주가 듣지 않자 그는 먼저 처자를 죽인 다음 자신도 따라 죽었다. 《三國志 卷33 後主傳列註》
  10. 정직한 사람들은 오적(五賊)을 쳐야 한다는 뜻. 당 덕종(唐德宗) 때에 번진(藩鎭)의 난을 틈탄 주자(朱泚)는 모반하려고 인망(人望)이 많은 단수실(段秀實)을 위협하여 맞아 왔다. 주자가 수실 등 여러 사람을 불러 일을 모의하다가 ‘천자’가 될 것을 말하자, 수실은 대번에 성내며 일어나서 옆사람의 상(牀)을 잡고 그의 상아(象牙)로 만든 홀(笏)을 빼앗아 주자 앞으로 나아가서 “미친 역적아, 너를 만 조각으로 토막 내어 죽일 것이다. 내가 어찌 너를 따라 반하겠느냐?” 하고는 그 홀로 주자를 때려 피를 흘리게 하였다. 《新唐書 卷153 段秀實列傳》
  11. 오적(五賊)들이나 왜인들이 준 벼슬이나 물품은 하나도 영화로울 것이 없다는 뜻. 당(唐)의 안고경(顔杲卿)은 안녹산(安祿山)에 의해 상산 태수(常山太守)가 되었는데, 후에 안녹산이 반역하자 할 수 없이 장사(長史) 원이겸(袁履謙)과 함께 녹산을 길에서 뵈었다. 녹산은 고경에게 고관(高官)만이 입는 붉은 색깔의 도포를 주었다. 고경은 준 옷을 가리키면서 이겸에게 “어찌 이것을 입을 수 있겠는가?” 하니 이겸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군사를 일으켜 녹산을 토벌할 것을 꾀하였다. 《新唐書 卷192 顔杲卿列傳》
  12. 곧 환란이 닥쳐오는데도 모르고 태평하다는 뜻. 집에 불이 나서 기둥이 곧 타게 되는데도 여기에 집을 지은 제비는 아무 걱정 없이 지저귄다는 옛말에서 유래하였으며, 솥 안에 든 고기는 곧 삶겨 죽는데도 모르고 있다는 뜻으로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음을 말한다.
  13. 자기를 따르는 의병이 있을 것이라는 뜻. 전국 시대 제 민왕(齊湣王)이 부하인 요치(淖齒)에게 살해되자 그의 신하였던 왕손가(王孫賈)는 시장에 들어가 요치를 토벌할 것을 말하고는 이에 찬동하는 사람은 ‘오른팔을 걷어 올리라.’ 하니, 따르는 장꾼이 4백 명이었다. 왕손가는 이들을 데리고 요치를 공격하여 죽이고 민왕의 아들을 세워 제 나라를 구하였다. 《戰國策 卷13 齊策》
  14. 의병을 공격할 사람이 없다는 뜻. 한(漢) 나라 때 왕망(王莽)이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어린 왕을 세워 스스로 천자의 일을 대신하자, 동군 태수(東郡太守)로 있던 책의(翟義)는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켜서 서쪽인 장안으로 쳐들어왔다. 《漢書 卷99上 王莽傳》
  15. 명분이 바른 의병은 두려울 것이 없다는 뜻.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13년에 진(晉) 나라 자범(子犯)은 “군사는 명분이 정대하면 장(壯)한 것이 되고 정대하지 못하면 파리한 것이 된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