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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津寬寺
개요[편집]
사실 행정구역인 진관동도 이 진관사에서 따온 이름이며 처음이름이나 이명은 신혈사(神穴寺)이다.
고려시대부터 국가 불교의 총본산중 하나로 선정되어 1000년가까이 푸시를 받았던 절로 유명하다.
역사[편집]
정확한 창설연도는 모르는데 고려건국이전에 창설된것은 확실하다.
목종치세에 나라를 좌지우지했던 천추태후썅년이 김치양하고 합법해서 낳은 아들을 왕으로 올리기 위해 12살나이의 대량원군을 진관사로 불리는 이름없는 암자에 강제로 출가시키고 몰래 작업치려 했지만 스님들이 3년동안 현종을 지켜준 것으로 유명하다.
왕이된 현종이 돌아갈 때 자기를 돌봐준 주지스님인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기가 살던 땅굴을 신혈(神穴)로 칭하고 이름없는 절을 신혈사로 부르자고 요구했다. 물론 스님은 오케이하고 들어줌.
이후 왕이된 현종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1011년부터 1년동안 진관대사를 위해 암자를 대형사찰로 업글시킨다음 이름도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 지금의 이름인 진관사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에도 영험한 곳이라고 여러 왕님들이 왕래하면서 왕실의 푸시란 푸시를 다받았고 이 절의 수륙재가 반도 수륙재의 기초가 될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조선시대에도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이성계가 수륙재를 지낼 수 있도록 수륙사라는 건물을 지어주고, 전ㅊ건물이 59칸에 달할 정도로 푸시를 많이받았고 이는 불교극렬까였던 이방원시기에도 그대로였다.
갓종머앟은 1442년 집현전학사, 유교 탈레반, 똥수저등 각종 수저를 물고난 과거 고시생들이나 관리들을 위한 도서관으로 이용했다.
1463년 화재로 일부 건물이 소실되어 복구했고 1879년 큰방을 34칸이나 지어올리게 되었다. ㅗㅜㅑ 원래부속건물이 59칸이었고 일부 소실되서 34칸을 추가로 올렸다니 거의 70~80개나되는 건물을 가진 졸라 거대한 대찰이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6.25 전쟁때 르메이셰프님이 빨갱이 통구이요리를 위한 장작으로 써먹으시면서 80여개나되전 건물중 나한전등 3개건물만 남고 모두 통구이가 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진관사의 건물들은 대부분이 60년대이후 복구하면서 세운 건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