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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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尹心悳) | |
이명 | 호 수선(水仙) |
출생 | 1897년 7월 25일 평안남도 평양 |
사망 | 1926년 8월 4일 현해탄에서 행방불명 |
국적 | 대한제국→일본제국 |
본관 | 파평 윤씨 |
학력 |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
일제 강점기 시절의 소프라노. 연인으로 알려진 김우진과 함께 대한해협에서 정사(꼐임 말고 연인 남녀가 함께 자살한 것)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증거는 없고(심지어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이를 당시 기레기들이 그냥 둘이 같이 없어졌으니 둘이 연인이라서 같이 자살한 거 아니냐고 추정해서 쓴 것뿐이다.
솔직히 자살인지도 명확치 않다. 시신도 발견되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냥 두 사람이 가명을 써서 배에 탔는데 두 사람이 배에서 없어진 정황으로 보아 자살로 추정하는 것일 뿐이다.
윤심덕은 자살할 동기가 차고 넘치긴 했다. 그녀가 죽을 때 나이가 서른이었는데 결혼도 안 한 노처녀였다. 지금이야 서른은 초혼 연령 수준의 나이니까 그렇게 이상해 보일 건 없을 것 같지만 당시 대개 17살에 시집 가던 시절에 서른이면 지금은 30대 후반 ~ 40대의 노처녀 정도 포지션으로 보면 될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독신에 대해 관대한 것도 아니었다.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남자도 나이가 찼는데도 혼자 살면 마을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거나 애들 놀림감이 되었던 시절이었다.[1]
또한 당시 미개했던 헬조선 수준 때문에 기껏 노오오오력 해서 전공한 성악은 써먹을 곳이 없어서 생활고에 시달렸고, 입에 풀칠해보려고 연극에 가봤지만 본인이 발연기라서 실패. 노처녀긴 해도 나름대로 배운 여자라서 이 사람 저 사람과 혼담이 오가기도 했는데 그것도 실패. 게다가 서울의 한 부자한테 몸 대주는 거 아니냐는 스캔들도 있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음반을 취입하러 일본에 가기 전에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남자 쪽은 딱히 자살할 만한 동기가 있지도 않았고(다만 아버지와 불화가 있었다. 아버지가 존나 잘나가는 기업 사장인데 아들은 이으라는 가업은 안 잇고 글이나 쓰고 있으니.) 유럽 유학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데 무슨 자살?
그래서 당시는 두 사람이 죽은 게 아니라 멀리 유럽으로 도망간 것이라는 설이 돌았다. 물론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 외에도 윤심덕이 죽은 후, 윤심덕이 부른 노래가 대박을 치자 그 레코드 회사에서 그 두 사람을 죽인 거 아니냐는 카더라도 있었다.
90년 전 미인 기준이 윤심덕의 얼굴이었는지는 몰라도 윤심덕이 미녀라고 쓴 글들이 많이 보이는데 별로 예쁘지는 않다.
어쨌든 그 배 위에서 그 두 사람은 사라졌고 설령 그때 유럽에 갔더라도 9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있을리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