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가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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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가가린 Юрий Гагарин | |
국적 | 소련 |
---|---|
종교 | 무종교 |
경력 | 공군조종사 우주비행사 |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로, 최초로 탈지구를 실천한 인물.
일찍 사망했다.
러시아인들로부터 현인신 취급받는 존재다.
생애[편집]
1934년 소련 스몰렌스크 주의 그샤츠크라는 깡촌에서 노동자 계급의 아들로 출생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그와 그의 가족은 독일군 치하의 소련에서 살았다.
그의 부친은 학비 문제로 가가린을 고등급 기술학교에 보내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가가린이 설득하여 겨우 수락한다.
이후 가가린은 모스크바 근교의 기술학교에서 금속제련 과목을 수료하고 사라토브 산업학교를 다니며 동시에 인근 항공연구소에서 비행기 조종을 배웠다.
1955년 오렌부르크에 있는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키가 작았던 가가린이 대형 공군기 조종에 미숙하자 퇴교 위기까지 처했으나 다행히 상관의 배려로 임무를 무사히 성공한다.
1957년 졸업하여 공군에 중위로 임관 후 루오스타리 항공기지에 배치받는다.
1959년 상위로 진급함과 더불어 3급 비행사가 된다. 이때 루나3호가 발사됐는데 가가린은 여기에 관심이 많았고 바부슈킨 중령의 지원으로 더 나아갈 수 있게 된다.
1960년 다른 19명과 함께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요구 조건에 의하여 보스토크 계획을 위한 소련의 우주인 선발 프로그램을 거쳐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 되었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를 선발하는 작업이라서 소련 체제 특성상 정치적 고려가 들어갔다. 심사 당시 알렉세이 레오노프, 게르만 티토프, 유리 가가린 등의 후보가 올랐는데
다행히 가가린은 기량 및 능력도 출중했고, 출신성분조차 평민 출신 노동자 집안이라 홍보하기엔 안성맞춤이라 만장일치로 선발되었다고 한다.
즉 다른 후보자들도 기량이 뛰어났지만 출신성분이 부르주아 가문이거나 반동분자 가문에 해당되면 얄짤없이 탈락됐다.
우주 비행사가 되다[편집]
당시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수석 기술자가 보스토크 1호의 캡슐에 들어갈 우주비행사의 조건을 정했는데 최대한 작은 체구의 사람만이 해당될 수 있었다.
가가린은 소련 기준으로도 157cm로 키가 매우 작고 가벼웠기에 조건에 부합한다고 평가받아 보스토크 계획의 우주비행사 양성 프로그램의 신체검사를 통과하였다고 한다.
이전에 그는 작은 키 때문에 공군 비행사가 되지 못할 뻔 했지만 우주비행사로 선발되는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최종 경쟁자는 19명이었는데, 가가린은 여러가지 비행 실력, 신체적 조건, 집중력, 그리고 인품까지도 이들 중 최상위권이었기에 게르만 티토프와 함께 최종 합격되어, 지구인 처음으로 우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궤도 비행 중 "지구는 푸르다", "지구는 푸른 베일을 감싼 신부와도 같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던걸로 알려졌으나 가가린이 실제로 한 말은 아래와 같다.
“ |
Юрий Гагарин рассказывает: небо очень и очень темное, а Земля голубоватая. Все хорошо видно. |
” |
가가린이 우주에서 돌아와 착륙했던 장소는 원래 예정지에서 약 400km 떨어진 곳이었는데 통신 수단이 없어서 가가린은 지구에 돌아온 직후에 한동안 소련 당국과 연락할 수 있는 통신 수단을 찾아 헤맸다고 한다.
스타가 되다[편집]
1시간 29분간의 인류 역사상 첫 우주비행을 성공한 후, 그는 소련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영웅이 되었다.
가가린은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소비에트연방의회 대의원이 되었으며, 소련 최고 영예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소련은 자신들의 체제우월성 및 우주기술의 과시를 위해서 가가린을 전 세계에 보내 연설회 및 기자회견, 팬사인회 등을 열었다.
가가린은 30여개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냉전이 한창이었으나, 가가린은 공산권만 아니라 영국, 캐나다, 프랑스와 같은 서방국가에서도 대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심지어는 미국에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국민 사기를 고려한 케네디 대통령이 거절하여 무산되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
이와 함께 우주비행 2년만에 대위에서 대령에 이르는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되었다. 이후 우주비행사 훈련센터의 부센터장을 맡게 되었다.
우주에 갔다오기 전에는 일개 비행장교로서 대위에 불과했으나, 이렇게 갑자기 고속승진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기 때문에 가가린은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고, 대중노출에 따르는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과음을 하기도 했다.
우주 여행 이후에는 영웅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소련 당국의 과보호로 행동 하나 하나에 제약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도 우주 개발에 있어 계속해서 참여했고 블라디미르 코마로프의 목숨을 앗아간 소유즈 1호 미션 당시 백업으로 근무했다.
당시 가가린은 위험성을 강조하며 발사 연기를 주장했는데 높으신 분들이 무시하고 강행하다 코마로프가 사망하고 뒤늦게 경각심을 차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죽음[편집]
그 이후 가가린은 우주센터에서 일하느라 정지되었던 전투조종사 자격을 회복하기 위해 친구인 테스트 파일럿 세료긴과 훈련비행을 하다가 33세의 어린 나이에 객사한다.
이때 그의 계급은 대령이었다. 이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단순사고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KGB는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조사했고,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당시 KGB 문서도 단순사고로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가가린은 자신이 우주비행 중 잘못될 것을 걱정해서, 가기 전에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사망 후 소련의 영웅들이 묻히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고 소장으로 추서되었다.
그 외 야사[편집]
- 공군조종을 처음 배울 시기 가가린은 자금사정이 여유롭지 않아 볼가강의 항만에서 노동자로 일했는데 그럼에도 가가린은 자신의 돈이 생기면 부모님을 위한 선물을 사는데 돈을 다써버릴 정도로 효자였다고 한다.
- 중위로 임관했을 때 모스크바 노동절 행사에서 오렌부르크 간호학교 출신의 아내 발렌티나를 만났다고 한다. 둘은 11월 7일 결혼을 했다.
- 당시 소련은 가가린이 살아 돌아오지 못 할거라 예상하고 그의 계급을 상위에서 2계급 특진시켜서 소령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사실상 이것은 그를 전사한 것으로 처리하고 전사자 예우를 행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는데 무사히 생환하고 계급을 인정받았다.
- 가가린이 사망 시 달고 있던 계급장이 대령이었는데, 사망하면서 순직처리하여 소장으로 승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