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령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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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중 일어났던 전투 중 하나로
어중이 떠중이 4만명 VS 정예소수 팔기군 300명 결과는?
청나라 승
이래서 군대의 질이 중요한것이다. 현대전도 마찬가지
허완: 내...내가 패전이라니!! 내가 패전이라니!!!!!!!!
동북아시아 최고의 갓흥국 킹조선 다운 진정한 전투 갓흥국 답게 차세대 무기인 조총을 든 조총병이 주축이던 4만의 군사로 청나라 기병 300한테 처발린
씹레전드 전투... ㅆㅅㅌㅊ 쨕쨕쨕 필자는 이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도중에 충격을먹고 곧바로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 한가운데에 구겨넣었던 태극기를 꺼내들고 갓국의 백성들이 많이 활보하는 부산머학교 대학로로 뛰쳐나가 태극기를 사방으로 찢으면서 울부짖었다...
이 전투 이후 인조는 한달 채 지나지 않은 1월 30일 삼전도에서 대가리 쾅쾅 지어박으면서 굴복.
ㄹㅇ 킹조선 동북아시아의 주인.. 인정합니다..ㅕㅠㅛ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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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위에는 역알못 새끼들이고 정확히는 청군의 수는 3000명이다
그리고 싸우지도 못하고 기병이 돌격해오니 밀리다 뒤에 있는 화약을 지들끼리 밟고 자폭한거에 가깝다
근데 청나라에선 지들이 졌다고 기록해놓았다.
뭐지 시발?
사실 청군 300명한테 조선군 4만이 털렸다는건 그냥 야사에나 나오는 얘기고 당시 조선군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쌍령에 4만이 모였다는 얘기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쌍령전투에 참여한건 경상도 근왕군이였는데 경상도 관찰사가 인조한테 보고한 내용을 보면 경상도에 있는 속오군 다 합쳐도 2만4천명 수준이였다.
그리고 당시 기록들을 보면 경상도 근왕군은 근왕 명령 받은지 5일만에 출발했는데 상식적으로 당시의 행정력과 교통 상태를 볼 때 이들이 5일만에 다 모여서 출발하는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기록을 보면 좀 멀리 있는 고을의 군사는 반도 안 소집된 상태로 출발했다. 이건 사실 인좇 잘못인게 인좇이 포위된 남한산성은 인좇의 삽질 때문에 군량이 얼마 없어서 오래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였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군사 다 소집되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또 소집된 군사들 중 일부는 경상도에 남아야 했다. 상황이 급하긴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난지 40년도 안 되었는데 만에 하나 일본과의 전쟁이 다시 터질 경우 최전선이 될 경상도를 완전히 비워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군사들이 빠지다보니 실제로 남한산성을 향해 북진한 경상도 근왕군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8천명 정도였다. 그리고 이 병력이 전부 다 쌍령전투에 참여한게 아니라 경상도 관찰사 심연 휘하의 부대는 후방에 있었고 이 외에도 빠른 행군속도 때문에 도착하지 못한 군사들이 꽤 있었다. 여기에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쌍령 전투의 전사자 수가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약 2천 정도가 전사한 험천 전투와 전사자 수가 비슷했다고 기록된 것과 쌍령 전투 지휘관들도 거의 다 전사할 정도로 전투가 처절했던 것을 감안해보면 2,3천 정도가 쌍령 전투에 참여한 조선군의 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청군과 조선군들의 군 숫자는 큰차이도 없었고 서로 지휘관이 사망하는등 치열한 전투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