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벨리사리우스

조무위키

이 문서는 명장(名將)에 대해 다룹니다.

본문에서는 출중한 무략과 용력, 지도력으로써 전쟁에서 다수 승전을 거두었거나,
통쾌한 대첩을 이끌었거나, 그에 준하는 쾌거를 이룬 세계 각국의 명장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인물은 의로움과 지혜, 문무까지도 겸비하여 진정한 군인, 무인(武人)이라 할 만한 인물이기에
가히 본받을 만한 행적은 본받는 게 좋습니다.

틀:존나쎈

개요[편집]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활동한 동로마 제국의 장군으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둔 명장.

업적[편집]

당시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의 명을 받고 1만 6천의 육군과 600의 함선을 이끌고 10만의 대군을 자랑하는 반달 왕국을 멸망시키고 북아프리카를 정복하라는 명을 받는다. 사실상 자살 임무나 다름없어 보이고 이 일로인해 유스티니아누스가 많이 까이고는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나름대로 당시 로마가 동원할 수 있는 최선을 딸려보내주고(돈먹여서 무마하고는 있다하지만 페르시아, 기타 이민족으로부터 국경을 비워 둘 수는 없다) 유스티니아누스 본인의 특기인 외교술을 발휘해 반달 왕국의 지배에 반하는 반란군을 일으켜 반달군의 군세를 쪼개고 벨리사리우스의 해로상에(육로는 위험하고 오래걸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배 타고 바로 상륙 작전을 하기로 했다) 반달군 함대가 없게하여 벨리사리우스가 무사히 상륙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벨리사리우스가 받은 지원은 수적으로 매우 열세였으며(질적으로는 당연히 로마군이 우세했지만 반달군도 나름대로 문명화가 되어있어서 별로..) 이 수적인 열세를 무마하고 반달군을 격파한 벨리사리우스의 군사적 역량이 저평가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어쨋던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벨리사리우스는 현지 보급을 통해 군량을 보충하려했는데 보통 생각이라면 현지를 약탈함이 당연했지만, 벨리사리우스는 오히려 약탈을 금하고 돈을 통해서 음식을 사먹으라 명을 내렸고 이는 현지 주민과의 친선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 현지 주민들을 야만인 취급치 말고 로마 시민처럼 대우하라 하였고(사실 당연한게 북아프리카가 반달족에게 강탈 당한지는 대략 50여년 즈음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한 현명한 행동을 통해 벨리사리우스는 아주 잠깐의 지체 후 엄청난 속도로 반달 왕국의 수도인 카르타코(제정 로마 중기 즈음에 복원되었다)로 진군한다.

당시 반달 왕국의 지배자는 겔리메르라 하는 자였는데 겔리메리 본인도 꽤나 군재가 있었는지 벨리사리우스의 군을 수도 바로 앞에서 쌈싸먹기 하는데에 성공해 잠깐이나마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로마 군에 중대한 타격을 입힐 뻔 하였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기병대가 반달군의 모루(겔리메르의 동생이 이끌고 있었다)를 박살내고, 그것을 모른채 겔리메르가 이끄는 망치는 모루를 박살내고 쉬고 있던 벨리사리우스의 군대를 치게된다. 겔리메르가 이끄는 군대는 꽤나 매서워 벨리사리우스 군의 후위 부대를 몰아붙이는 쾌거를 벌이고 벨리사리우스의 목을 따기 직전까지 가나 벨리사리우스가 진열을 재정비하고 때 마침 죽은 동생의 시체를 발견한 겔리메르가 동생의 시체를 뭍고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싸우지 않겠다는 병신짓을 벌여 한숨을 돌린다.

말했다싶이 진열을 재정비한 벨리사리우스군은 장례하던 반달군에 맹공을 가해 분쇄하나 겔리메르를 놓치고 만다. 도망친 겔리메르는 사르다니아(이탈리아 옆 네모만 섬)에 일어난 반란(유스티니아누스가 일으킨 군대 분산용 반란)을 진압하던 동생을 불러 다시 군대를 모아 카르타고에 짱박힌다는 전략을 낸다. 이에 벨리사리우스는 사기가 떨어진 반달군과 회전을 벌이기를 원했기에 반달군을 도발해 끝어내는데에 성공하고 치열한 전투 끝에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도 여러 전술, 전략적 이점을 가지고있던 벨리사리우스의 로마군이 승리를 거둔다(그러나 기록에 따르자면 자칫 잘못하면 역으로 쌈싸먹힐 뻔할 정도로 위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엔 겔리메르를 붙잡고 카르타고 시내에 진입해 로마의 깃발을 내걸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스티니아누스는 매우 기뻐하며 벨리사리우스의 공을 치하했고 개선식을 여는것을 허가한다(제정 이후에는 황제나 황제와 혈연으로 이어진 인물들이나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벨리사리우스는 성대한 개선식을 열어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이리저리 잘했다.

15만 명의 군대가 있는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을 정복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고작 7천명을 보내줬다.

이번에도 갓리사리우스께서는 그 한줌 군사로 연전연승하고 이탈리아를 회복했다.

동고트족은 쫄아서 벨리사리우스에게 왕위에 오르라고 제안했는데 이게 의심 많은 황제 귀에 들어간다.

결국 벨리사리우스는 잘 싸우던 이탈리아 전선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투입된다.

물론 여기서도 열세인 전력으로 사산조를 잘 막아내긴 했는데, 의심병 걸린 황제가 지원군은 보내주지도 않으면서 실적이 왜 안 나오냐고 까대자 총사령관직을 관둬버린다.

말년[편집]

말년에도 불가르족과의 전쟁에서 이겨 군공을 세웠는데 도중에 횡령 혐의를 받아서 징역이 선고된다.

하지만 나중에 누명 쓴 것이 밝혀져 풀려난다.

565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랑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