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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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3년동안 이어진 기나긴 6.25 전쟁의 막바지를 장식한 전투.
1953년 6월, 공산군과 유엔군은 마지막이었던 포로문제를 어찌어찌 수습하는데 성공하면서 새로운 군사분계선을 그으려고 하고 휴전을 선언하려 했었다. 하지만 6월 18일 싱먼리가 반공포로를 석방하면서 휴전회담이 리셋되고 공산군, 유엔군은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
6월 20일 평양에 도착한 팽덕회는 ㅂㄷㅂㄷ거리면서 싱먼리를 조지겠답시고 금성군지역에 주둔했던 국군 5개사단 1만5천의 머병력을 조지기로 판단하고 중공군 4개군산하 12개 사단을 때려박으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국군은 곧있으면 휴전인지라 피터지게 싸워서 겨우 수복한 금성을 지키기 위해 밀고내려온 중공군에게 공격을 시작했다.
전투[편집]
7월 13일 중공군의 공격을 받은 국군은 금성 돌출부의 양견부가 털리고 수도사단이 중공군의 기습을 받는 헬오브헬에 직면했다. 때문에 미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은 국군의 방어선을 금성천 남단으로 재조정, 남쪽의 백암산, 주파령, 적근산일대로 쪼그라들었고 금성지역 상당부분은 중공군이 점령했다.
7월 15일 6사단과 3사단을 예비부대로 전환배치, 5사단은 백암산 남쪽 고지의 방어선을 만들어 파로호까지 내려오는 중공군을 저지했다. 하늘이 딥빡하고 중공군주둔지에 폭우를 선물하자 5사단, 8사단, 11사단은 중공군의 후장을 털고 미8군의 공격목표였던 아이슬란드선까지 올라갔지만 금성천 북쪽은 회복을 못해부렀다.
결과[편집]
국군은 기갑연대장 육근수대령을 포함한 1,701명의 전사자, 7,548명의 부상자,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을 포함한 포로및 실종자 4,136명이라는 실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중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포로 교환때도 귀환에 실패했고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불쌍ㅠㅠ
하지만 중공군은 12개사단에서 27,216명이 뒤지고 38,700명이 부상당했다. 근데 포로는 186명이고 1,428점이나 되는 국군의 무기를 노획했다. 그리고 얼마못가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휴전상태가 됐기 때문에 북괴는 금성일대 192.6㎢의 땅을 쳐묵해버렸다.
시발....
이후 강청은 문화대혁명시기 <기습백호단>이라고 이 금성전투에서 이긴 중공군을 찬양하는 혁명경극이라는 쓰레기 연극을 만들었다.
1953 금성대전투[편집]
중국군 미화논란이 있는 영화이다 자세한건 항목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