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버나드 로 몽고메리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튀니지 전역 ==== 연합군과 추축군의 전력 차이는 심각했다. 추축군은 사실상 연대, 여단급인 사단 13개와 전차 130대밖에 없었지만 연합군은 완편된 19개 사단과 전차 1.100대를 보유했다. 중동지역 사령관 알렉산더는 메제즈다 계곡을 돌파해 튀니지의 항구들을 점령한다는 작전을 수립했다. 튀니지의 항구를 점령하면 북아프리카에 있는 군대로 이탈리아를 침공할 수 있기 때문. 알렉산더는 4월 22일 패튼의 제1군에게 메제즈 엘 바브와 부 아라디 사이에 있는 추축군 병력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 사이 몽고메리의 제8군은 엔피다 주변에서 추축군을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몽고메리의 정신병이 도졌다. 몽고메리는 이 작전이 미군이 독일군 막타를 낼름 먹게 하는 작전이라고 생각해서 생 지랄을 피웠다. 몽고메리는 제8군 병력으로 적진을 30 km 돌파하는 작전을 세웠다. 알렉산더는 몽고메리의 작전을 써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서 몽고메리의 생각대로 하게 해 줬다. 몽고메리는 기세등등한 영국군의 전투력을 믿고 작전을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느리더라도 제대로 긴장하고 전투에 임하길 바랬다. 안 됐지만 휘하 부대들에게 이런 몽고메리의 바람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영국군의 선봉장 브라이언 호럭스 제10군단 군단장은 부하들에게 적은 고작 연대~여단급 병력이니까 선빵필승이라는 것을 톡톡히 일러뒀다. 하지만 실제 방어전력은 사단 2개 분량이었고 4월 19일 선빵을 갈겼지만 독일군 방어선은 스크래치도 안 났다. 19일 하루종일 공격한 결과 제50 사단이 엔피다를 점령했지만 다른 부대들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 했다. 호럭스는 눈 앞의 독일군과 아군 병력을 1:1로 교환하고 방어선을 부술 수야 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피해가 컸다. 결국 10군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딴딴한 독일군 방어선을 둘러싸고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패배로 몽고메리는 주공을 1군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1군은 4월 30일까지 독일군을 끝없이 밀어붙였다. 그런데 밀어붙이다보니 공세는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고 소규모 부대들의 싸움이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이 됐다. 알렉산더는 공세가 중단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8군에서 정예부대를 차출해서 1군을 도우려고 했다. 몽고메리가 개꼰대긴 하지만 상병신은 아닌지라 순순히 사단3개와 여단 하나를 내 주었다. 5월 6일 제7기갑사단의 선봉대가 튀니스를 뚫었고 미군 제2 군단은 비제르테를 점령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추축군 병력들이 항복하기 시작했다. 아르님은 5월 12일 제4 인도사단에 항복했고 다음 날 이탈리아군 총사령관 메세 원수가 항복하면서 북아프리카 전역이 끝났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